壁

SARTRE, JEAN PAUL

 「당신은 의사죠?」
 「그렇소.」
 「죽을 때 고통이……오래 계속되나요?」
 「뭘요……그렇지 않아요.」베르기인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곧 끝니버려요.」
  마치 진찰을 받으로 온 환자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데……누가 그러는데요.……두 번 쏘아야 할 경우도 간혹 있다지요.」
 「더러 있지.」하고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말하였다.
 「처음 쏜 것이 급소에 맞지 않는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총알을 재어 다시 쏘나요?」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쉰목쇠로 말하였다.
 「그 동안이 꽤 걸리겠군요.」

  그는 고통이 겪는 것이 몹시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그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이 탓이리라. 나는 그런 건 별로 생각지 않았다. 땀이 나는 것은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석탄 가루가 쌓여 있는 곳으로 갔다. 톰은 나를 쏘아보았다. 내 구두 소리가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내 얼굴도 이 소년처럼 잿빛이 되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밤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그러나 이 어두운 구석에는 한 줄기의 빛도 스며들지 않았다. 북두칠성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여느때와는 다르게 보였다. 나는 그저께 대사교관(大司敎館)의 지하실 감옥에서 큼직한 하늘 한 모퉁이를 쳐다볼수 있었다. 그때는 시간 시간 색다른 추억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아침나절에 하늘이 푸르고 맑게 보일 때에는, 대서양 바닷가의 모래사장이 생각났으며, 한 잦에는, 고너리와 오리브를 먹으면서 만자니라를 마시던 시베리아의 빠아가 생각났다. 그리고 호후에는 그늘이 들면, 투기장(鬪技場)의 한 쪽은 햇빛에 반짝이고 다른 쪽에는 짙은 그늘이 번져가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 이처럼 지상의 모든 것이 하늘에 반영되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쳐다보아도 하늘은 아무런 추억도 불러 일으키지 못하였다. 그 편이 오히려 낫지 않은가. 나는 톰의 곁에 가서 앉았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야기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생각이 엇갈렸던 것이다. 그는 나한테 얘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는 이렇게 잿빛이 되어 담을 흘리고 있는 나를 바라보기가 무서웠을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은 같은 꼴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마주 대하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이상으로 미웠던 것이다.
톰은 살아 남을 베르기 의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는 알겠나? 나는 알 수 없네.」
  나도 자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베르기 의사를 노려보았다.
 「뭐 말이야? 뭘 안다는 말이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텐데, 나는 무슨 심판이지 전혀 알 수가 없다네.」
  톰의 주위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풍겨왔다. 여느때보다도 코가 예리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조롱하듯이 말하였다.
 「곧 알게 될 걸세.」
 「아무래도 석연치 않네.」그는 집요하게 말을 이었다.
 「용기를 내고 싶지만, 우선 알기라도 해야지……자, 들어보게. 우리를 뜰안에 끌어 내겠지. 그리고는 우리 앞에 놈들이 죽 늘어설 거야. 몇 놈이나 될까?」
 「나들 어떻게 아나? 아마 다섯 명이나 여덟 명쯤 되겠지. 그 이상은 아닐 걸세.」
 「좋네. 그럼 여덟 명이라고 치세.」
 「<겨누어 총!>하는 호령이 내리면, 여덟 정의 소총이 우리를 향해 겨냥을 할 테지. 나는 아마 벽 속이라도 들어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걸세. 그리하여 힘껏 벽을 밀겠지. 벽은 꼼짝도 하지 않을 거야. 무서운 꿈속에서처럼. 그런 것 쯤은 상상할 수가 있네. 아, 내가 얼마나 분명히 상상하고 있는지 아나!」
 「그건 나도 상상할 수 있네.」
 「굉장히 아플 거야. 놈들은 우리의 얼굴을 결단내려고 눈과 입을 겨눠서 쏠 거야.」
  그는 심술 궂게 말을 계속하였다.
 「난 벌써 상처가 난 것 같네. 한시간 전부터 머리와 목이 아프단 말이야. 진짜로 아프게 아냐. 그렇지만 아픈 것보다 더 심한 고통이라네. 내일 아침에 당닿 고통 말이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체하는 눈치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나도 온몸에 무수한 작은 상채기처럼 고통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달랠 수도 없는 고통이었으나, 나는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는 죽어 버리는 거야.」
  나는 무뚝뚝하게 말하였다.

  그는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베르기 의사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그의 말을 귀밖으로 흘러 보내는 것 같았다. 나는 그자가 이곳에 무엇하러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우리가 갖고 있는 관심 따위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신음하는 우리의 육체를 보러 온 것이다.

 「마치 악몽(惡夢)과 같군.」톰이 말하였다.
 「난 죽음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하려고 하네. 그리하여 곧 알 수 있다는 기분이 들다가도 그것이 스르르 빠져 나가 사라져 버린단 말이야.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으려니 하고 생각해 보는데, 그게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때때로 알아차릴 듯한 때도 있지만, 역시 알수 없게 되고, 고통과 총알과 총소리를 다시 생각하게 되네. 난 사실 유물론자야. 난 미치진 않지만, 역시 이상한 점이 있네. 나는 내 시체를 볼수 있단 말이야.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네. 나는 눈으로 그 시체를 보네. 형체는……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이 세상은 다른 인간들을 위해 계속되어 간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처야 해. 그러나 파브로, 인간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어 있지 않네. 이건 사실이야. 나도 전에 무엇인가 기대하면서 하룻밤을 꼬박 새운 적이 있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사정이 다르네. 등뒤에서 갑자기 닥쳐오는 일이라, 우리는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갖출 수가 없네.」
 「그 정도로 해 두데. 참회를 들어 줄 신부라도 불러 올까?」
  하고 내가 물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예언자인 체하면서 나를 한결같은 목소리로 파브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아일랜드 사람은 모두가 그런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서 어쩐지 지린내가 풍겨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아무튼 톰에 대해서는 호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죽을 처지에 있다고 해서, 그에게 호감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사정이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라몽 그리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나는 톰과 후앙의 사이에 끼어 고독하기만 하였다. 하긴 그 편이 나았다. 라몽과 함께 있으면 괜히 친근해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서울 만큼 냉혹하다. 그리고 냉혹으로 일관하고 싶었다.

  톰은 여전히 넋을 잃고 중얼대었다. 생각을 쫓으려고 입을 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마치 섭호선염(攝護腺炎)에 걸린 늙은이처럼, 몸에서 지린내가 확 풍겨 왔다. 나도 물론 생각은 그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이 내 입에서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죽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못된다. 죽음을 앞에 놓고 보니 저 석탄더미도 나는 톰과 마찬가지 생각을 하는 것이 못마땅하였다. 나는 5분쯤 사이를 두고 밤새도록 그와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땀을 흘리면서 떨 것을 잘알고 있었다.

  나는 곁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꼴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얼굴에 죽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자존심이 상하였다. 나는 24시간 동안, 톰의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말을 걸고 하면서도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함께 죽는다는 이유로 톰은 내 손을 잡았다.
 「파브로, 저어……정말 인간이 완전히 무(無)로 돌아갈까?」
  나는 손을 빼면서 말하였다.
 「자네 발밑을 보게! 별 더러운 친구도 다 보겠네.」
  그의 발밑에는 오줌이 고여 있고, 바지에서도 오줌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는 깜짝 놀라 물었다.
 「바지에 오줌을 싼 거지 뭐야.」
 「그럴 리가 있나.」그는 역정을 내었다.
 「오줌을 싸다니!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데…….」
  의사가 다가 와서 친절하게 물었다.
 「괴로운가요?」
  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묵묵히 오줌이 고인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무섭진 않아요. 네, 결단코 무섭진 않아요.」
  톰은 거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의사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톰은 일어나 한쪽 구석으로 오줌을 누러 갔다. 그는 바지 단추를끼우면서 돌아와 벤치에 앉아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의사는 수첩에 뭔가 적어 넣었다.

 우리는 셋이서 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살아 있을 사람이었다. 사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태도와 걱정이 있었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그는 이 지하실에서 떨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선량하고 혈색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육신조차 느낄 수 없을 지경이었다.――마무튼 그 사람처럼 느낄 수는 없었다. 나는 바지 가랭이를 만져보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 단지 베르기인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는 두 다리를 꾸부정하게 딛고 서서, 육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며, 내일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피가 돌지 않는 세 그림자와 비슷하였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흡혈귀(吸血鬼)처럼 그의 생명을 빨고 있었다.

 그는 후앙에게 다가갔다. 어떤 직업적인 목적에서 그의 목덜미에 손이라도 얹어려는가? 아니면 가엾은 생각에서 그러는 것일가? 만일 동정심에서 나온 행동이라면, 그것은 하룻밤사이에 오직 한번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후앙의 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다. 소년은 의사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가 하는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더니, 문득 그의 손을 붙잡고 이상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는 의사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핀세트 강은 잿빛 두손이, 그 윤기가 흐르는 붉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은 결코 보기에 아름답지는 못하였다.

  나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톰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아버지와 같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잠시 후에 소년은 의사의 손을 물어뜯어려고 하였다. 의사는 황급히 몸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면서 벽까지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겁이 나는 얼굴을 하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우리가 자기와 같은 인간이 아님을 문득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깔깔 웃었다. 간수가 자리에서 벌덕 일어났다. 또 다른 간수는 눈을 뜬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피로와 흥분을 느꼈다. 새벽에 닥칠 죽음에 대하여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대야 공허만 느낄 따름이다. 그래 다른 일을 생각 하려고 하자, 나에게 겨누어진 총구멍이 눈에 떠올랐다. 나는 스무 번이나 연이어 처형을 당한 기분이었다. 한 번은 정말 상형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아마 한동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놈들은 나를 벽으로 끌고 갔다. 나는 몸부림 치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때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의사를 바라보았다. 자는 동안에 허소리나 하지 않았나 해서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의사는 수염을 쓰다듬고 있을 뿐, 눈치를 채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자려고만 하면 잠시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84시간 동안이나 눈 한번 붙여 보지 못해 기진맥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남아 있는 두 시간의 여생을 허송하고 싶지 않았다. 잠들면 놈들은 새벽녘에 와서 나를 두들겨 깨울 것이다. 그건 질색이다. 나는 동물처럼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 싫었다. 나는 일어나 돌아다녔다. 그리고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내 과거의 생활을 회상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가지 추억이 뒤죽박죽되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름다운 추억도 있고 흉한 추억도 있다 ―― 아니 적어도 전에 나는 그렇게 말해 왔다.

 거기에는 사람의 얼굴도 있고, 여러 가지 사건들도 있었다. 축제일에 봐렌치아에서 투우의 뿔에 쓰러진 소년 투우사의 얼굴이며, 백부의 얼굴, 라몽, 그리이스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여러자기 사건도 회상되었다. 1926년 석 달 동안 직장을 잃은 일이며, 굶어서 죽을 뻔한 일 등등. 그라나다에서 밤을 밝히던 일도 회상되었다. 사흥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다.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을 생각하니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얼마나 행복과 여자와 자유를 갈망하였던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는 스페인을 해방시키고 싶었던 거이다. 나는 피·이·마르갈에 심취(心醉)하여 무정부주의 운동에 가담해서 군중대회에 나가 연설을 하였다. 나는 마치 영원한 생명이라도 가진 자나 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자기 일생을 눈앞에 삼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건 새빨간 거짓이다>하고 생각하였다. 내 생애는 이미 끝장이 났으니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내가 여자들과 어떻게 놀러 다니기도 하고 희롱하기도 하였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미리부터 이렇게 죽을 줄을 알았더라면 나는 손가락 하다도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일생이 붙잡아맨 자루속에 들어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가 미완성품들이었다. 나는 한동안 내 인생을 비판해 보려고 하였다. 아름다운 일생이었다고 스스로 타일러 보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미완성품에 지나지 않으니까. 나는 영원을 위한 수표를 끊어면서 일생을 보내왔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이제는 아무 미련도 없다. 하긴 미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산더미같이 있기는 있다. 망사리니아의 맛도 여름의 카딕스 근처의 바닷물에서 즐기던 해수욕 등등. 그러나 죽음은 그 모든 매력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의사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나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유언이나 유물을 전해 드리겠어요. 군사정부(軍事政府)의 승인만 있다면…….」
  그러자 톰이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오.」
  나는 잠자코 있었다. 톰은 나를 이상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콘챠에게 전할 말이라도 없나?」
 「없네.」

 나는 제법 친한 사이라도 되는 체하는 그의 태도가 싫었다. 어젯밤에 그에게 콘챠의 얘기를 한 것이 잘못이다. 그런 얘기는 참고 하지 말아야 옳았을 것이다.
  콘챠와는 1년 동안 함께 지냈다. 나는 어제까지만 하여도, 그 여자와 5분 동안이나마 만날 수 있다면 팔 하나쯤 도끼로 잘리더라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얘기를 그에게 하였던 것이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만나고 싶지도 않고 또 전할 말도 없었다. 팔로 껴안고 싶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온몸이 잿빛이 되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내 꼬락서니가 너무나 끔찍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육체를 보아도 역시 무서운 생각이 들 것 같았다. 내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녀는 울부짖을 것이다. 몇 달 동안은 살고 싶은 의욕조차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죽는 건 여기 있는 나 자신이다. 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을 생각해 보았다. 나를 지긋이 바라볼 때면, 그 무엇이 내 속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끝장이 난 것이다. 아마 그녀가 나를 보려고 하여도 시선이 얼어붙어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독하다.

  톰도 고독하지만, 사정이 나와는 다르다. 그는 말 탄 자세로 걸터앉아서, 희미하게 웃으며선 벤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나무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마치 무엇을 망가뜨리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다가 얼른 손을 떼고 부르르 떨었다. 내가 만일 톰이라면, 그런 장난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아일랜드인의 수작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모든 물건이 이상하게 보이기는 하였다. 물건들은 여느때보다 형태가 분명치 않고 밀도(密度)도 엷은 것 같았다. 벤치나 등불이나 석탄더미를 보기만 하여도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물론 죽음을 분명히 목격할 수는 없지만, 내가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물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죽어가는 환자의 머리맡에서, 나직막한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처럼 물건들이 뒤로 물러나 멀리 얌전히 서는 꼴을 보더라도 죽음을 알 수가 있었다. 아까 톰이 벤치에서 만진 것은 실상 제 자신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아마 나는 현재와 같은 생태로는 설사 목숨을 살려 집으로 돌려보내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냉담하였을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환상이 무너진 이상, 몇 시간을 더 살든, 몇 해를 더 살든, 마찬가지이다. 나는 애착을 느끼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뿐더러, 어느 의미에서는 마음이 평온하였다.

 그러나 내 육체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무서운 편온이었다. 나는 그런 육체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나 자신은 아니었다. 육체는 혼자서 땀을 흘리고, 혼자서 부들부들 떨었다. 나로서는 이미 알 수 없는 육체이다. 그것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마치 남의 육체나 되는 것처럼, 만져보고, 바라보아야 했다. 나는 때때로 육체에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급히 아래로 나는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미끄러져내리고 떨어져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심장의 고동 소리도 들려 왔다. 그러나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육체에서 느끼는 모든 것이 이상하고 애매하였다. 대체로 육체는 묵묵히 얌전을 빼고 있었다. 나는 일종의 중압――나를 누르는 압박감 밖에는 느끼지 못하였다. 마치 어떤 커다란 벌레라도 붙어 있는 상 싶었다. 나는 조심스르레 석탄 더미로 오줌을 누러 갔다.

  의사는 시계를 꺼내 보았다.
 「세 시 반이군.」
  죽일놈 같으니! 놈은 일부러 그런 말을 뇌까린 것이 분명하다. 톰이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아직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것이다. 밤은 어두운 덩어리처럼 우리를 에워사고 있었다. 밤이 언제 찾아왔는지 그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후앙이 울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그는 두손을 비비면서 애원하듯 큰 소리로 말하였다.
 「죽기 싫어! 죽기 싫어!」「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