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 邦 人

第 1 部

   CAMUS ALBERT(알베르 까뮈)

3

   나는 오늘 회사에서 일을 꽤 많이 하였다. 사장은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나에게 피곤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어머니의 나이를 물었다. 나는 틀리지 않게 대답하느라고 <한 60세 가량 되었다>고 하였다. 사장은 한시름 덜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였다. 그리고 그건 이미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책상위에는 선하증권(船荷證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나하나 눈을 스쳐야 하는 것들이다. 점심을 먹으러 회사를 나오기 전에 나는 먼저 손을 씻었다. 나는 손을 씻는 정오의 시간을 좋아한다. 저녁때에는 수건이 축축하여 재미가 좀 적었다. 진종일 같은 수건을 스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날 나는 이 이야기를 사장에게 한 적이 있다. 사장은 자기도 그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좀 늦게 그러니까 열두 시 반에 운송과에서 일하고 있는 에마뉴엘과 함께 회사를 나왔다. 회사는 바닷가에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햇볕이 쨍쨍 내려쪼이는 하구에 머물고 있는 화물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쇠사슬 소리와 엔진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면서 마침 화물자동차 한 대가 달려왔다. 에마뉴엘은 나에게 물었다.
 「올라탈까?」

 나는 그를 따라 달음박질을 했다. 자동차가 우리를 지나쳐갈 때, 우리는 그 뒤를 따라서 달려갔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권양기(捲揚機)며 그 밖의 기계들, 지평선 위에서 춤추는 돛배, 그 옆을 스쳐가는 선체들 가운데서 마구 달리는 육체의 약동을 따르는 것이었다. 우리는 숨이 가빴다. 자동차는 고르지 못한 부두의 보도 위를 흔들거리며 먼지가 자욱한 햇빛 속을 달리는 것이었다. 에마뉴엘은 허리를 꺾으며 자지러질 듯이 웃어대었다.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셀레스트네 레스트랑에 이르렀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흰 수염을 기른 셀레스트는 뚱뚱한 아랫배에 에프론을 두르고 있었다. 그는 나더러,
 「너무 상심하진 않았오?」
하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고 나서 배가 고프다고 하였다. 나는 재빨리 식사를 마치고 나서 커피를 마셨다. 이윽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포도주를 과음한 탓으로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났으므로 허둥지둥 전차를 타러 달려갔다.

  오후에 나는 회사에서 줄곧 일을 하였다. 사무실 안은 몹시 더웠다. 저녁에 회사에서 나와 부둣가를 천천히 걸어서 집에 돌아올 때믄 매우 유쾌하였다. 하늘은 푸르고 마음은 즐거웠다. 그러나 나는 삶은 감자로 음식을 만들기 위해 곧 집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층계를 오르다가 나와 같은 층 옆방에 사는 싸라마노 영감과 마주쳤다. 염감은 개릴 데리고 있었다. 벌써 8년 전부터 염감과 개는 언제나 같이 다녔다. 내가 알기에 개는 홍버즘이라는 피부병에 걸려서 털이 거의 다 빠지고 온몸에 붉으례한 껍질과 딱지 투성이었다. 싸라모노 영감은 오랫동안 그 개와 단 둘이서 조그마한 방에서 살아왔으므로 개의 모습을 닮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붉으스름한 딱지가 있을 뿐 아니라 누런 털도 생기었다. 한편 개도 마찬가지였다. 목을 뽑고 코끝을 앞으로 내민 것이 허리가 구부정한 주인의 자세를 닮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래도 같은 족속같았지만 사이는 좋지 않았다.

 영감은 하루에 두 번씩, 즉 아침 열한 시와 저녁 여섯 시에 그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8년 전부터 한번도 코오스를 바꿔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 시각이면, 리용 가두에서 언제나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개가 싸라마노 영감을 끌고 가다가는 기어코 영감의 발뿌리를 땅에 부딪게 하여, 영감은 개를 때리며 욕지거리를 퍼붓는 것이었다. 그러면 개는 무서워서 벌벌 기며 꽁무늬를 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면 영감이 개를 끌고 갈 차례였다. 개가 맞은 것을 잊어 버리게 되면 다시 앞장서서 구인을 끌고 가는데, 그러면 으례히 또 매를 맞고 욕을 얻어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둘이 다 길가에 멈춰서서 개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주인은 화를 못이겨 노려보고――날마다 이같이 보내는 것이었다. 혹시 개가 오줌을 누려고 해도 영감은 성급히 끌어당기기만 하였다. 개는 오줌방울을 줄줄 흘리면서 다라가곤 하였다. 어쩌다가 개가 방안에서 오줌을 누면, 또 매를 맞게 마련이다. 이러기를 어느덧 8년이 되었다. 셀레스트는 늘「가엾어라」하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실은 아무 연문도 모르는 것이었다. 층계에서 영감과 마주쳤을 때, 그는 개에게 마구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망할 자식!」
하고 호통을 치자, 개는 끙끙거리기만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내가 인사를 하였지만, 영감은 여전히 욕지거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개가 무슨 잘못을 하였느냐고 물었으나 염감은 대꾸도 않고,
 「빌어먹을 망할 자식!」
하고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그는 개에게 몸을 굽히고 목걸이를 손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돋구어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제서야 고개도 돌리지 않고, 북바치는 역정을 억지로 삼켜버리듯이,
 「이작도 그대로 섰군.」
하고 대꾸하였다. 그리고는 개를 끌고 가 버렸다. 개는 네발걸음으로 끙끙거리면서 끌려가는 것이었다.

  그때 같은 층에 사는 또 하나의 다른 이웃 사람을 만났다. 동네에서는 그를 여자를 뜯어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을라치면 그는 <창고 감독>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잘 나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기 때문에 내 방에 들어와 앉기도 하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와 말해선 안될 아무런 까닭도 없는 것이다. 그는 레이몽 생터스라고 불렀다. 자그마한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지고, 코는 마치 권투선수의 그것처럼 생겼다. 옷차람은 언제나 말숙하였다. 그도 역시 가끔 싸라마노 영감의 이야기를 하며,
 「참 가엾기 짝이 없군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그 꼴을 보면 진저리가 나지 않는냐고 묻기에, 별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우리가 층계를 다 올라와서 서로 헤어지려고 하는데, 나에게 말하였다.
 「저의 집에 소세지와 술이 있는데 같이 드시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나는 끼니 준비를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기에 기꺼이 응낙하였다. 그도 역시 창문없는 부엌이 달린 단간방에 살고 있었다. 그의 침대 위에는 불그스럼한 천사의 성고상이며, 운동선수들의 사진, 그리고 여자의 나체화가 서너장 걸려 있었다. 방안은 누추하고 침대도 정동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먼저 성유 램프에 불을 당기고 호주머니 속에서 이상한 붕대 하나를 꺼내어 바른 손에 감았다. 내가 손을 다쳤느냐고 묻자, 그는 어떤 녀석이 시비를 걸어와 한바탕 싸웠다는 것이다.

  「그건 말입니다. 뫼르소오 선생!」하며 말하였다.
 「내가 마음이 고약한 까닭이 아니지요. 성미가 조급한 까닭이지요. 녀석이 나에게<사나이라면 전차에서 뛰어내려라>하지 않겠어요. 나는 <거 쓸데없는 소리 말어.>하고 대꾸했더니 녀석 나더러 사나이답지 못하다는 거요. 그래 나는 전차에서 뛰어 내려 말했지요. <닥쳐. 그렇지 않으면 본때를 보여 줄테야> 하자 녀석은 <뭐, 어쩌구 어째?>하고 대꾸를 한단 말아예요. 그러기에 한 대 안겼지요. 그랬더니 나가자빠지기에 나는 일으켜 주려고 하였더니 녀석은 자빠져서 발길질을 하지 않겠어요. 그래 나는 무릎다짐을 한번 하고 두어대 쥐어박아 주었어요. 녀석은 얼굴에 피투성이가 되었어요. 나는 <그만큼 경을 쳤으면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는 붕대를 감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침대위에 앉았다. 그는 말을 계속하였다.
 「그러니까 내가 싸움을 건 것이 아니었지요. 그녀석이 버릇없이 굴다가 경친 거지요.」
  그 말은 옳았다. 나는 사실 그럴거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 싸움에 대하여 나의 충고를 듣고 싶어 하였다. 그리고 나는 사나이답고 세상물정을 잘 알터이니 자기를 도와 줄수 있을 것이라면서 내 친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나에게 자기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나에게 자기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무방하다고 하자 그는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말없이 소세지를 꺼내어 화덕에 굽고, 컵, 접시, 수저, 그리고 술 두병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다소 망설이는 눈치더니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떤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나의 정부였지요.」
  그는 자기와 싸눙 사나이는 그 여자의 오빠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생활비는 자기가 대어주었다고 하였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서 동리 사람들이 자기에게 뭐라고 하는지 알고 있지만, 양심에 거리낄 것이란 하나도 없으며 자기는 어엿한 창고 감독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허고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는 여자의 생활비를 또박또박 대어주었다고 했다. 즉 방세를 치루고, 식비도 하루에 20프랑씩 주었다는 것이다.
 「방세가 300프랑이지요. 식비가600르팡이지요. 그밖에 가끔 양말등속이라도 사 줘야 되지요……그래서 이럭저럭 1000프랑은 족히 들었지요. 그런데 그년은 빈들빈들 놀고 먹으면서 하는 소리가 그까짓걸로는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이므로 도저히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반나절 만이라도 일을 좀 하지 그래요. 그러면 내 어깨도 가벼워지겠는데. ……이달에 필요한 물건은 모두 사주고 하루에 20프랑씩 용돈도 주지 않았오. 방세도 치러 주겠다.……오후면 친구들과 커피도 마실 수 있지 않소. 당신 친구들에게 커피와 설탕을 내 놓는 것은 당신이지만 돈은 내가 주지 않소. 나로서는 하노라고 하는데 당신은 나에게 그렇지가 못하단 말이야.> 그래도 그년은 핀둥핀둥 놀고 먹으면서 못살겠다고 바가지만 긁지 않겠어요. 그러던 차에 내가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 여자의 핸드빽 속에서 놀음표 한 장을 발견하였는데, 그 여자는 그것을 손에 넣은 경위를 설명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그녀 방에서 팔지 두 개를 잡힌 전당포 쪽지를 찾아내었으며, 그는 그때까지 그런 팔찌가 있는 줄도 몰랐다는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속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나는 그 여자와 관계를 끊었지요. 그러나 화가 난 김에 그년을 마구 때려 주고 속에 품고 있던 말을 모조리 털어놓았어요. 즉 <네년은 내가 준 돈으로 노는 것을 업으로 삼느냐?>고. <네가 나에게서 받는 행복을 남들은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알기나 해. 두고 보아라, 곧 너도 알게 될테니.>」

   그는 피가 나도록 그 여자를 때려 주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전에는 한번도 손찌검을 한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야 손을 전혀 안댄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다정스럽게 툭툭 건드릴 정도였지요. 그년이 소리를 지를라치면 나는 문을 닫아 버리곤 했지요. 그리고 끝장은 언제나 마찬자지구요. 그런데 이번에는 본격적이었어요. 그러나 그런 년에겐 벌을 좀 더 줘야 하겠어요.」

  그는 나에게 그 때문에 나의 충고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끄름이 나는 램프 심지를 조절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사뭇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술을 거의 한 병이나 마셨기 때문에 관자놀이가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담배가 떨어져서 레이몽의 것을 피웠다. 마지막 전차가 가고 그 경적소리도 이제는 이 거리에서 멀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레이몽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다만 나처한 일은<아직도 자기는 그 여자의 육체에 약간의 미련을 갖고 있는> 점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한번 톡톡이 혼을 내 주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그 계집을 호텔로 끌고 가서 취체순경을 불러다가 스캔들을 일으켜서 그년의 이름을 대장에 오르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난봉꾼 친구들과도 의논하였지만 별로 뽀죽한 방법이 없더라고 하였다. 그런데 레이몽이 말한 그 난봉꾼이라는 작자들이 그런 것 하나 꺼리할 줄 모르다니――그래서야 어디 체면이 서겠는가. 레이몽이 그들에게 의논하자, 그들은 모두 그년의 <얼굴을 찢어발기면>어떠냐고 하더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좀더 잘 생각해 보아야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먼저 한 가지 물어보고 싶다면서, 자기의 일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어쨋든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가 속고 있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닌게 아니라 내가 보기에도 속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혼을 내주어야겠다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잘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를 골려 주겠다는 심정은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다시 술을 마셨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나서,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는 여자에게 <차버리는 뜻을 밝히되, 그녀가 그리워할만한 사연을 섞어서> 쓴 편지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여자가 돌아올 테니까, 그때엔 같이 자고 <바로 끝날 무렵에> 여자의 얼굴에 침을 뱉아 주고는 밖으로 내 쫓아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게 하면 여자에겐 호된 앙갚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레이몽이 말하기를 자기는 편지를 잘 쓸 자신이 없으므로 나에게 써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 대답도 않자, 그는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귀찮으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지도 않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술을 한 잔 마시고 일어나더니 접시들과 먹다 남은 소세지를 한 옆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탁자의 고무받이 피륙을 정성껏 닦는 것이었다. 그리고 테이블 서랍에서 방안지 한 장과, 노란 봉투와, 붉은 나무 펜과 보라빛 잉크가 들어 있는 네모난 병을 꺼내었다.
  그가 여자의 이름을 대었을 때 나는 그녀가 모르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되는대로 써 나갔지만, 그래도 레이몽의 마음에 들도록 애썼다. 그의 마음에 들지 않게 써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편지를 큰 목소리로 읽었다. 레이몽은 담배를 피워 물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더니, 다시 한번 읽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흡족해 하였다.

  「자네가 세상 물정에 밝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네.」
하고 그는 말하였다. 그가 처음에 나더러 <자네>라고 한 말은 무심히 들었지만,
 「인제 자네는 내 친굴세.」
하고 다시 말하였을 때야 비로소 나는 그 말에 놀랐다. 그는 거듭 <자네>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야 그렇지> 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의 친구라고 해도 무방하였고, 그는 진실로 나의 친구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편지를 봉하고 나서, 우리는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그리고는 잠시 서로 말이 없이 담배만 피웠다. 창밖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자동차가 조용히 미끌어져가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너무 늦었군.」
하고 나는 말하였다. 그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난간다고 말하였다. 하진 어떤 의미에선 그렇다고 볼 수도 있었다. 나는 졸음이 왔지만 일어서기가 거북하였다. 내가 피곤하게 부였던지 레이몽은 나에게 나에게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처음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는 나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과, 그리고 그것은 필경 한번은 당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나의 손을 굳게 잡고 사나이끼리는 언제나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방을 나서자 나는 문을 닫고 어둠에 싸인 층계 위에 잠시 서있었다. 집안은 고요하고, 층계 아래서 눅룩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귓전에 피가 뛰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싸라마노 영감의 방안에서 개가 끙끙거리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