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KHOV ANTON PAVLOVICH
4
밖에서는 들창과 지붕을 마구 휘몰아쳐, 윙윙거리는 바람소리가 사납게 들려오고, 집안에 있는 난로는 울적한 노래를 부르며 타오르고 있었다.
새벽 한 시였다. 지안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누워 있었으나 아무도 자지는 않았다. 아래층 에서는 안드레이가 줄곧 바이얼린을 켜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덧문이 떨어졌나보다. 잠시 후에 어머니가 잠옷바람으로 촛불을 켜들고 들어왔다.
「나쟈, 방금 웬 소리가 그렇게 요란했지?」
하고 어머니가 물었다. 어머니는 머리를 외가닥으로 틀어올리고 겁이 나는 듯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소란스러운 밤에는 훨씬 늙어 보이고, 하찮은 조그마한 여자로 생각되었다. 나쟈는 얼마 전만 해도 어머니를 훌륭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존경을 표시하고, 그 말에 고분고분 순종하던 것을 상기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말이었는지는 분명히 기억할 수 없었다. 다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희미하고 막연한 생각뿐이다.
난로에서는 여러 가지 저음(低音)이 뒤섞여 <오, 하나님이여!>하고 부르는 듯하였다. 나쟈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머리를 감싸쥐고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하고 나쟈는 말하였다.
「제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세요? 어머니 제발 부탁이에요. 저를 멀리 떠나게 해 주세요, 네!」
「대체 어디로 간다는 거냐?」
나쟈는 말없이 울고만 있었다. 한마디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이 고장을 떠나게 해 주세요.」
하고 나쟈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경혼식을 취소해야겠어요.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저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아요……그분에 대하여는 어떻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안돼, 절대로 아돼!」
어머니는 깜짝 놀라 다급한 어조로 말하였다.
「진정해라! 마음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서 그러는 거란다. 꼳 좋아질 것이다. 그건 흔히 있는 일이란다. 너 안드레이와 말 다툼이라도 했나보구나? 그러나 사랑싸움은 곧 낫는거야.」
「아, 그만 저리가 주세요. 어머니 어서 가 주세요!」
나쟈는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는 잠시후에 말을 이었다.
「넌 얼마 전만해도 어린애나 다름없는 소녀였는데, 약혼을 했으니 그럴 밖에. 그렇지만 세상 일은 끊임없이 변하는거야. 너는 앞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 나와같이 다루기 힘든 딸을 갖게 되는 거란다.」
「어머니, 어머니는 자기자신을 현명한 여잔줄 알고 계시군요. 어머니는 불행한 여자예요.」
하고 나쟈는 말하였다.
「어머니는 정말 불행한 여자예요. 왜 그렇게 따분한 말만 하세요? 왜 그래요, 네?」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한 마디도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숨을 내쉬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난로에서는 다시금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피식피식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나쟈는 별안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침대에서 뛰어내려 어머니 방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책을 손에 든채, 이불을 덮고 눈물에 젖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 제 청을 들어 주세요!」
하고 나쟈는 말 하였다.
「제발 꼭 들어 주셔야 해요! 우리는 지금 얼마나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이건 어머니도 잘 아셔야 해요. 전 깨달았어요. 인제는 모든 것을 분명히 내다볼 수 있어요. 그런데 아드레이 안드레이비치라는 사람은 어떤 위인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시겠어요? 어머니 그는 바보예요!」
어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와 너의 할머니는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기만 하는거냐!」
어머니는 울면서 말하였다.
「나도 잘 살고 싶다. 보람있게 살고 싶다.」
어머니는 이렇게 되풀이하며 그 조그마한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두어 번 때리는 것이었다.
「나를 좀 자유롭게 해다오! 나는 아직 이렇게 젊어 살려고 애쓰는데, 너하고 너의 할머니는 나를 노파로 만들 작정이냐!」
어머니는 흐느껴 울며, 허리를 굽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 동작은 빈약하고 가엾고 초라해 보였다.
나쟈는 밤이 새도록 자리위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는 누가 연신 덧문을 두드리며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다.
날이 밝자 할머니는 지난 밤의 바람 때문에 정원의 능금이 다 떨어지고, 복숭아 나무 하나가 쓸어졌다고 투덜거렸다. 흐린 날씨는 음침하기 짝이 없어 등불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둠침침하였다. 모두들 춥다고 야단들이었다. 창문에는 빗발이 마구 내려쳤다.
나쟈는 차를 마시고 나서, 사샤의 방문으로 갔다. 그녀는 잠자코 방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안락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웬일이오?」
하고 사샤가 물었다.
「나는요……」
나쟈가 입을 열었다.
「지끔까지 용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어요.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에요! 나는 약혼자를 멸시해요. 나 자신도 멸시하고요. 그리고 이 모든 더럽고 무의미한 생활을 멸시할 수밖에 없어요……」
「하긴 그럴테지!」사샤는 영문도 잘 모르면서 말하였다.
「그건 사실이오. 옳은 생각이오.」
「나는 이런 생활에 싫증이 났어요.」
하고 나쟈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이제 하루도 더 참을 수 없어요. 내일 집을 나가야겠어요. 제발 부탁이니 나를 데려가 주세요!」
사샤는 놀란 얼굴을 하고 잠시 나쟈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침내 나쟈의 심정을 이해하고 어린애처럼 기뻐하였다. 그는 기쁨에 못이겨 춤이라도 출 듯이 두 손을 흔들며 슬립퍼를 덜럭거렸다.
「훌륭한 일이오!」
그는 손을 모으고 말하였다.
「정말 훌륭한 일이오!」
나쟈는 그가 곧 어떤 중대하고도 의미심장한 말을 하리라고 기대하면서 무슨 마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 커다란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고 사랑에 도취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쟈에게는 지금까지 상상조차 못한 어떤 새롭고 넓은 세계가 이미 눈앞에 전개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기대에 가득차 그를 그윽히 바라보면서 어떤 일이 닥치드라도, 비록 죽음이 목전에 이르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나는 내일 떠나려고 해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 정거장에 배웅하러 나오세요……내 트렁크에 당신의 짐도 함께 넣어서 갖고 가지요. 그리고 당신의 차표도 사 놓을 테니 세 번째 종이 울리면 차에 오르세요. 함께 떠나도록 해요. 모스크바까지 동행하고 다음부터는 혼자서 페체브르그로 가면 돼요. 여행권은 갖고 있지요.」
「네 갖고 있어요.」
「약속해요. 당신은 후회하거나 불평하지 않겠지요?」
사샤는 그녀를 믿는다는 어조로 말하였다.
「그리로 가서는 공부해야 돼요. 그리고 모든 것을 우면에 맡기세요. 지금까지 해온 당신의 생활을 청산하면 만사는 일변할 거요. 중요한 것은 생활을 청산하는 거요. 그리고 나머지 문제는 아무래도 무방해요. 그럼 내일 출발하도록 해요. 괜찮지요?」
「네, 그렇게 해요!」
나쟈는 자기자신이 상당히 훌륭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여느때 보다는 한결 마음이 괴로운 것 같기도 하였다.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하여도 괴롭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2층에 올라가서 자리에 드러눕자, 얼굴에 눈물 자국국과 아울러 미소를 머금은채 곧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저녁때까지 정신없이 잠을 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