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KHOV  ANTON  PAVLOVICH

5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쟈는 모자를 쓰고 외투를 걸치고 나서 다시 한 번 어머니를 만나고 자기 물건을 살펴보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자기 방에 들어가 아직도 온기가 가시지 않은 침대 옆에 서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너미 방에 살그머니 들어갔다. 어머니는 조용히 방에서 잠들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키쓰하고 그 머리칼을 어루만지면서 한동안 서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아래층으로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밖에서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마부는 머리수건이 흠뻑 젖은채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할머니가 말하였다.
  「나쟈, 네가 탈 자리는 없구나!」
  머슴들이 짐을 실을 때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
  「왜 하필 이런 날에 전송하러 간다는거냐? 집에 잠자코 있어라.  원 무슨 비가 이렇게 쏟이진담!」   나쟈는 무어라고 대꾸하려고 하였으나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샤는 그녀를 부축하며 마차에 태우고,  발에 담요를 덮어 주고 나서, 그녀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그럼 조심해라!」
  할머니는 현관에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리고 사샤여, 모스크바에 가면 곧 편지해라!」
  「네, 알겠습니다. 할머니,  안녕히 계셔요.」
  「주여, 도와 주소서!」
  「무슨 날씨가 이래!」
하고 사샤가 말하였다.
  나쟈는 그제서야 비로소 눈물을 흘렸다.  떠나나는 것을 실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할머니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을 때까지도 정말 이 고장을 떠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든 거리여, 잘 있거라!>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지난날의 모든 일 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났다.―아드레이 안드레이치, 그의 아버지, 새 주택, 꽃병과 나체여인을 그린 유화……그러나 이 모든 추억들은 벌써 나쟈를 위협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오직 비천하게 생각될 뿐, 모두가 뒤로 사라져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차에 올랐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엄청나고 끔찍하게 생각되던 지난날의 모든 것이 하찮은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고, 지금까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광대하고 웅장한 미래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빗줄기가 세차게 차창을 두둘겼다. 푸른 벌판과 전주들――그 전깃줄 위에는 새들이 앉아 있었다――이 어른거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쟈의 가슴에는 별안간 커다란 기쁨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자유의 몸으로 대학에 공부하러 가는 자기자신이 장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카쟈크처럼 떠나간다>는 속담이 자기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녀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또한 기도도 드렸다.
  「통쾌하군요!」사샤는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정말 통쾌해요!」

6

 어느듯 가을이 가고 겨울도 지나갔다. 나쟈는 차츰 고향이 그리워졌다. 날마다 어머니와 할머니 생각이 났다. 사샤도 보고 싶었다.  집에서는 정답고 친절한 사연을 적은 편지가 몇 번이나 왔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용서해 주고, 잊어 버린 것같이 생각되었다.
  나쟈는 5월의 학기 시험을 마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에 가는 길에 사샤를 만나러 모스크바에 들렸다.
  그는 작년 여름과 조금도 다른 데가 없었다.  텁수룩한 수염이며, 헝클어진 머리, 그 푸록코오트와 무명바지 하며, 커다랗고 아름다운 두 눈――모두가 전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살이 빠지고 늙어 보이며 안색이 좋지 않고, 몹시 피로한 듯하였다. 그리고 여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나쟈는 그가 우울한 시골뜨기처럼 생각되었다.
  「어서 와요, 나쟈……」
   그는 반가이 맞아 주었다.
  「오 나의 나쟈!」
  두 사람은 잉크와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찌르고, 담배연기가 자욱한 인쇄소 안에 잠시 앉아 있다가 사샤의 방으로 갔다. 거기도 담배 연기가 뿌옇고, 여기 저기 침을 밭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식은 사모바르 옆에는 검은 종이를 덮은 깨어진 접시가 놓여 있고, 책상과 마루 위에는 죽은 파리의 시체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사샤가 되는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으며, 또 그가 사치를 경멸하고 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일 누가 그의 개인적인 행복에 대하여 즉, 개인생활과 그의 취미에 대하여 그에게 어떤 설교를 하더라도, 그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웃어 버릴  것이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어요.」
하고 나쟈는 말하였다.
  「지난 가을에 어머니가 페체브르그에 저를 만나러 오셨어요. 할머니도 인제는 내가 한 일에 대하여 노여움을 푸시고 언제나 내 방에 가서 벼위에 성호를 긋곤 하신대요.」
  사샤는 반가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연방 기침을 하면서 목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쟈는 그의 병이 절말 더친 건지, 나니면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뿐인지 분명히 알 수 없어, 그를 불끄럼미 바라보고 있었다.
  「사샤, 몸이 편치 않은가보군요!」
하고 나쟈는 말하였다.
  「뭐 괜찮아요. 그다지 대단치 않으니까……」
  「저걸 어째!」
  나쟈는 딱하여 큰 소리로 말하였다.
  「왜 의사한테 보이지 않는 거예요? 자기 몸을 소중히 여겨야지요. 안그래요, 사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하였다. 동시에 웬일인지 안드레이 안드레이치며 화병과 나체 여인을 그린 유화를 비롯하여 지금은 먼 옛날 일처럼 생각되는 자기의 과거가 눈 앞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사샤는 이미 작년처럼 신비롭고 흥미있고 교양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것이 나쟈를 눈물겹게 한 원인이었다.
   「사샤, 몸이 말이 아니군요. 나는 당신의 몸에 좋은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당신은 나의 은인이니까요! 당신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몰라요.  사샤! 당신은 정말 나와 가장 가깝고 또 다정한 사람이예요.」
  그들은 서로 마주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페체브르그에서 한겨울을 보내고 난 그녀에게는,  사샤의 이야기도, 미소도, 그의 모든 모습까지도 벌써 시들하고 낡아빠져 지금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매장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모레 불가로 꾸무이쓰(말젖)마시러 가려고 해요.」
하고 사샤는 말하였다.
  「나는 그 꾸무이쓰가 먹고 싶어요. 나는 어느 친구 내외와 함께 가리로 했어요. 그 부인은 매우 훌륭한 분이지요.  나는 그 부인에게 대학에 갈 것을 권하고 있어요.  그녀의 생활을 일변 시킬 필요가 있거든요.」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정거장으로 떠났다.  사샤는 차와 능금을 나쟈에게 사 주었다. 기차가 떠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손수선을 흔들어 주었다. 그의 병이 얼마나 더쳤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듯 하였다.

  나쟈는 열두 시경에 고향에 도착하였다.  정거장에서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거리는 매우 넓게 보였지만 집들은 마치 땅바닥에 달라붙은 듯이 작아 보였다.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오직 블그스레한 외투를 걸친 독일인 악기수선사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집집마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듯 하였다. 늙어도 아직 피둥피둥 보기 싫게 살찐 할머니는 나쟈를 보등켜 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동안이나 흐으껴 울었다.  나쟈의 어머니는 늙어서 매우 메말라 보였지만 그러나 역시 옷차람만은 단정히 하고 있었으며,  손가락에는 여전히 다아아몬드 반지가 번쩍이고 있었다.
  <나쟈야!>하고 어머니는 몸을 떨면서 말하였다. <나쟈야!> 할머니와 어머니는 발없이 울고 앉았었다.  이들도 이미 지난간 과거가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느덧 사교계의 지위나,  지난날의 영화나,  아니 손님을 초대할 자격까지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평화롭고 단란한 가정에 별안간 경관이 밤중에 뛰어들어 온 집안을 수색한 끝에, 그 집 주인이 공금을 횡령했다거나, 문서를 위조했다는 죄상이 드러나, 지금까지 행복하던 생활이 영원히 깨어져 버린 경우와 같았다.
  나쟈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침대는 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정원을 둘러보았다.  창문 박으로 햇빛이 즐거운 듯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또 그녀가 책상을 만져 보기도 하고, 앉아 보기도 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나서, 기름기가 도는 구수한 크림과 차를 마셨다.
  그런데 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허전함을 금할 수 없었다.  방속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천장이 금새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밤이 깊어서야 그녀는 자리에 누웠다. 침대는 폭신하고 따스하였지만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었다.
  어머니가 잠깐 이야기를 하려고 들어왔다. 그녀는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나쟈, 그래 어떠냐?」
  어머니는 더듬더듬하여 물었다.
  「너는 흡족하냐? 정말 흡족하게 생각하느냐?」
  「그러믄요. 흡족하고 말고요.」
  어머니는 일어서서 딸의 머리위에 성호를 그었다.
  「내 믿음이 이렇게 깊어졌다.」
하고 어머니는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철학을 공부하고 있단다. 그래서 늘 생각에 잠기곤 해……인제 내게는 모든 것 이 햇빛처럼 분명히 내다보이는 구나.  인생은 프리즘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곧 지나가 버리는 거야.  이런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해.」
  「할머니의 건강은 어떠세요?」
  「괜찮아. 네가 사샤와 함께 집을 나가서 전보를 보내왔을 때,  할머니는 내려 읽어시다가 기절하셨단다.  그래 사흘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 계셨어.  그 후부터는 날마다 성호를 긋지 않으면 우시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다.」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똑딱!>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가 들여왔다. <똑닦, 똑딱!>
  「무엇보다 우리는 인생은 프리즘을 들여다보듯이 재빨리 지나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
하고 어머니는 말을 이었다.
 「깨달은 생활이란, 이를테면 이 프리즘에 비친 여러 가지 색깔을 입곱 가지 원색으로 환원하게끔 그 원소를 해부하여 따로따로 연구하는 거란다.」
  그 다음에 어머니는 무슨 말을 했는지, 언제 자기 방에서 나갔는지 나쟈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어느새 잠들어버렸던 것이다.
  5월이 지나고 6월이 다가왔다.  나쟈는 그 동안에 자기 집에 익숙해졌다. 할머니는 숨을 몰아쉬며,  사모바르의 준비에 분주하고,  어머니는 저녁마다 자기 철학을 강의하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혼자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잔돈닢도 일일이 할머니에게서 타서 쓰는 처지였다.
  집안에는 파리떼거 윙윙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천장이 날마다 낮아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안드레이 신부와 안드레이 안드레이치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 문밖에도 나가자 않았지만,  나쟈는  정원과 거리를 쏘다니면서 회색 담벼락과 그 안에 세워진 집들을 구경하곤 하였다.  그녀에게는 이 거리가 이미 오래 전에 낡아빠져 멸망을 기다리고 있는지, 혹은 새로운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 새롭고 영화로운 생활이 어서 돌아와 주어야겠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정직해야 하고,  또 즐겁고 자유로와야 한다. 이를 위해 자기 운명에 대담하게 도전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겠다. 그런데 그러한 생활이 그녀에게 찾아온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할머니의 집은 잘 정리되어, 지하실이 불결한 방에는 하인 네 사람만이 살게 될 것이다.  아니, 그때가 되면 이집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아무도 회상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쟈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은 이웃에 사는 아이들뿐이었다. 그녀가 뜰안을 거닐고 있으면, 아이들은 담벼락을 두드리면서 시시덕거리며, 빈정대는 것이었다. 
   「여봐, 약혼녀! 여봐, 약혼녀!」
  사라토프의 사샤에게서 편지가 왔다.
  거기에는 춤추는 듯한 자기 독특한 우스운 필치로 불가의 여행은 성공적이었으나, 사라토프에서는 몸이 좀 약해져서 지금은 발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두 주일째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나쟈는 이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선고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감과 사샤를 생각하는 마음은, 전과 같이 그녀를 슬프게 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또 그녀를 괴롭게 하였다. 그녀는 생활 그녀는 생활의욕이 대단하였다. 그리하여 하루 속히 페체브르그로 떠나고 싶었다. 사샤에 대한 그녀의 우정도 지금에 와서는 단지 그리움을 제공해 줄 뿐,  먼 과거의 일처럼 생각이 되었다.
 그녀는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아침이 되자 창가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아래층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는 당황한 어조로 무엇을 채문하고 있었다. 이어서 누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할머니는 방 구석에서 성호를 긋고 있었으며, 일굴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전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나쟈는 할머니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전보를 펴 보았다.  어젯밤에 알렉산들 치모페비치가, 더욱 간단히 말하자면 사샤가 사라토프에서 폐병으로 죽었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미사를 드리러 교회로 떠났다.  그러나 나쟈는 이 방에서 저방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자기 생활이 일찍이 사샤가 원한 대로 전환되어 있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이 거리에서는 자기가 한 이방인으로, 고독하고 쓸모없는 인간에 불과하며,  한편 이거리의 모든 것이 자기에게는 전혀 필요치 않으며, 모든 과거는 그녀에게서,  불탄 뒤에 바람에 날리는 잿가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녀는 사샤의 방에 가서 한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잘 가요. 그리운 사샤!」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앞에는 한결 새롭고 광대한 생활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직 막연한 대로, 신비에 넘쳐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짐을 꾸리며 아랬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집안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인제는 영원히 혜어질 것을 예상하면서, 희망에 뿌듯한 상쾌한 마음으로 이거리를 따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