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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부채」
다음날 오후, 선생님 집에 수척한 얼굴로 나타난 동식을 보고 유선생을 비롯해서 모드들 놀랐다. 「너 참으로 실연했니?」 B가 물었다. 「실연을 했으면 했다고 정직하게 말해 봐.」 C도 빈정댔다. 대강의 짐작을 하고 있는 것 같은 A가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 동식에겐 고마왔다. 「상심한 베르테를, 꼭 그대로다.」 B가 깔깔대며 웃었다. 「몸이 편찮아 보이는 친구를 그렇게 놀리면 쓰나.」 유선생은 이렇게 점잖게 나무래 놓고, 「동식 군, 어디 아픈 것은 아니지?」 하고 근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조금 열이 났습니다. 지금은 괜찮아요.」
A가 함축 있는 시선으로 동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식은 A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겸연쩍한 사이를 메우기 위해 최에게서 온편지 얘기를 했다. 그러자 최에 관한 얘기로서 한창 얘기꽃을 피웠다. 「최의 요즘의 신조가 뭔지 아나?」 B가 말했다. 「뭔데」 하고 C가 묻자 B의 대답은, 「대학을 나와 불란서로 가는데 방해되는 일은 일체 하지 않겠다는 거야.」 「최라면 그, 영웅이 되기보다 천재 되길 택하겠다고 했다는 학생 말이지?」 유선생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여튼 걸물이에요, 걸물은 아무래도 시골에서 나는가 봐!」 C의 말이었다.
한바탕 잡담이 계속되고 난뒤, 유선생이 텍스트를 들고, 읽고 있던 희곡이 일단 끝이 났으니 이번에는 그 희곡의 역(役)을 각자 맡아서 제법 연극처럼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둘이가 등장 하는 장면은 A와 B가 맡고 셋이 등장하면 C가 끼이고 넷이 되면 동식이가 들어가고 다섯이 될 땐 유 선생도 한몫 들기로 했는데 이렇게 정해 놓곤, 「불란서인 사이에 일본놈이 끼이는 골이 되겠군.」 하고 유선생이 웃었다. 희곡의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었다.
'부르주아' 출신의 청년이 공산당에 입당했다. 입당하자 당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어떤 지도자를 암살하라는 것이었다. 그 지도자도 공산당 간부였는데 당의 주류파의 의견과는 달리 보수정당과 군주정부(君主政府)와 연합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의 주류파는 이것을 알고 그 지도자를 미리 제거하자는 것이다. 청년은 그 지도자의 비서로 취직했다. 그런데 그 지도자의 매력에 끌려만 갔다. 그러나 지령을 내린 자들의 독촉을 받고 어느 날 청년은 드디어 그 지도자를 죽이고 만다.
깜쪽같이 이 암살은 정치적인 관계가 아니라 치정관계(癡情關係)에 의한 살인이라고 캄프라지할 만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청년은 5년의 형을 받았으니 2년만에 특사되어 나왔다. 청년이 감옥에 있을 때 독(毒)이 든 초콜렛을 청년에게 보내온 사건이 있었다. 청년은 그것을 누가 어던 이유로 보냈는가도 알 겸, 같은 당원 동지이며 옛날의 애인이었던 여자를 찾아갔다. 그러자 그 곳으로 청년을 죽이려는 당의 간부들이 들이닥쳤다.
청년의 애인은 청년을 죽이러 온 사람들에게 그 청년이 당으로 복귀가능한가를 타진할 시간의 여유를 달라고 호소한다. 그래 놓곤, 청년을 보고 그 지도자의 암살 이유나 암살 경위를 일체 불문에 붙이고 다시 당으로 돌아오면 살길이 있다고 말한다. 청년은 그 이유를 물었다. 알고 보니 당이 청년을 없애려는 것은 당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그들이 죽여 버린 ㄱ 지도자의 주장 그대로 연합 정권을 세울 방침을 결정한 때문이었다.
이럴 때 청년이 나타나서 그 지도자를 죽인 것은 치정 관걔로서가 아니라 당 주류파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폭로하면 당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죽인 지도자의 동상이 서고 전국의 도시 거리마다 그 지도자의 이름이 붙을 상황 속에 자기는 어떻게 되느냐고 울부짖으며 그 지도자를 죽인 동기를 밝히는 동시 자기도 죽기로 결심한다――
그 희곡을 그저 읽어 내려갈 때와 극중의 인물이 되어 대사로서 말할 때완 감동이 전연 달랐다. 청년의 역을 맡은 A는 얼굴에 홍조를 띠고, 「정말 어떻게 해야 되지요? 그런 경우엔.」 하고 극중 청년의 흥분 그대로 울부짖었다. 「공산당 같은 데 들어가지 않으면 되지 뭐.」 청년의 애인 역을 맡은 B가 말했다. 「공산당이 아니라도 그런 경우가 있잖겠어요? 이용할 대로 이용해 놓곤 죽여 저리는…….」 C의 마소리도 심각했다. 모두가 열띤 눈으로 유 선생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이 작품이 제시한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지.」 유선생은 이렇게 서두를 하고 조직과 개인의 문제, 정치의 생리와 병리의 문제 등에 관해서 세밀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러니가 난 정치가 싫어.」 「정치가 싫다고 해서 문제가 끝날까요?」 B가 물었다. 「정치에 관심을 가져도 문제가 있고 싫어해도 문제가 있고, 그렇다면 싫어하는 방향에서 생기는 문제만을 감당하기로 하는 거지, 별 수 있나.」 「그건 노예의 철학이 아닐까요?」 C가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도 아까 누구 말처럼 영웅되긴 싫으니까. 영웅이 될 각오 없이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넌센스아냐?」
유선생은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치를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을 결집하는데 두 가지 길밖엔 없다. 하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길이고 하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 가며 힘을 모으는 길이다. 정치를 하는 데도 양면이 있지. 한 면은 사람을 자꾸만 타락의 방향으로 하강시키는 면이고, 한 면은 사람을 자꾸만 타락의 방향으로 하강시키는 면이고, 한 면은 사람을 높이는 면이다. 나와 같은 의지가 약한 사람은 힘을 결집하는 데도, 그 힘을 사용하는 데도 추잡하고 타락하는 방향으로만 기울어질 것이니 아예 단념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일 뿐이다.」
이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쥘부채의 이미지를 통해 신명숙을 생각하고 있던 동식은 유 선생에게 물었다. 「아까 희곡의 경우처럼 당시 지령을 받고 어떤 개인이 악을질렀다고 합시다. 당은 벌할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고 개인만 남았습니다. 그 명백한 정치의 악을 그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사형을 과한다는 것이 옳은 일이게씁니까. 법률적으로가 아니라 철학적으로 말입니다.」 「그러한 당의 지령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선택했다는 책임이 있지 않겠나. 아까의 작품은 그 선택의 책임까지를 문제로서 제시하고 있잖아?」
동식은 쥘부채 사건만은 때고 신명숙의 애기를 했다. 유선생은 심각해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더니 거기에 대한 직접적인 감상은 말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대한민국에 앉아 공산당을 욕하고 비판하는 것처럼 쉬운 노릇은 없다. 그럴수록 지식인은 공산당 비판을 신중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내 생각으론 다음 한 가지의 사실만으로도 공산당은 이땅에 발을 붙일 수 없을 거다. 자네들 알지? 박헌영 일파를 미국 간첩으로서 숙청 처단한 사실을. 만일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이었다면 해방 이후 이곳에서 활약한 좌익들은 모두 미국 간첩의 앞잡이로서 놀아났단 얘기가 아닌가. 미국 간첩의 지령을 받은 세력들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역적 노릇을 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놈들의 수작은 뻔한 것이지만, 하여간 그들은 박헌영을 숙청함으로써 그들 나름의 명분조차 죄다 말살하고 말았거든. 그런데 박헌영이가 미국의 간첩이 아닌데 그렇게 몰았다면 그들이 얼마나 음흉하고 무서운 놈들인가를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되잖나.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그들은 죄악을 그들 자신의 손으로 폭로하고 만 셈이 되지 않았나. 태백산에서, 지리산에서 대한민국의 역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김일성 도당으로부턴 미국 간첩의 앞잡이 취급을 받았으니 불쌍한 망자 가운데의 하나라고 불 수 있지 않을까.」
동식은 신명숙에 관한 문제를 두고 좀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보고 싶었는데 C가 앞지르고 나섰다. 「공산당은 그렇게 나쁘니까, 대한민국이 좋다는 말씀이지요?」 유선생은 C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듯 잠깐 얼굴을 바라보더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좋지.」 했다. 「어떤 가능이죠?」 「예컨대 너희들이 좋아하는 불란서와 같은 나라를 만들 수도 있고 영국 같은 나라를 만들 수도 있고…….」 「선생님은 어떤 나라 같이 되었으면 합니까?」 이번엔 A가 물었다. 「나?」 하더니 유선생은 답을 보류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스웨덴 같은 나라가 되었으면 하고 얘기도 하고, 글도 쓰다가 혼난 적이 있다고 했다.
「요컨대 선거 때 표 한 장 던지는 행동 이상의 정치 행동은 너희들도 안하는 게 좋을 거다. 정치를 하다가 자칫하면 어떤 분파의 편협한 의견에 사로잡힌 괴물이 되거나, 평생 자기가 자기의 주인 구실을 못하고 꼭두각시 노릇을 하거나, 자만만 늘어 인생의 으미를 모르고 자나거나, 공소한 표현 속에 진실을 분실해 버리거나, 기껏 한다는 것이 비민주적 처사를 하기 위해 민주 절차를 가장하고 공짜나 바라고…… 그러나 이건 나의 의견이고 내 경험에서 얻은 것이니 하나마나한 이야길 뿐이다.」
유선생은 너무 많이 지껄였다는 듯이 기지개를 켰다. 유선생의 집을 나서자 A가 동식이더러 따졌다. 「오늘도 너 혼자 빠질 참야?」 「아아니」 하고 동식은 고개를 저었다. 넷은 나란히 걸어 광화문 족을 향했다. 「앞으로 빠지지 말어. 네가 없으니까 바둑의 토너먼트도 안되구, 마작을 하자니 쉴 새가 없구.」 B의 말이다. 「헌데 유선생, 생각하기보다 속물(俗物)인데.」 C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어째서?」 하고 A가 따졌다. 「그 사상, 아니 사고가 지나치게 기는 것 같고 너무나 범속적 아냐?」 「자아식, 위험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만 속물이 아닌가?」 「난 그 부드러운 눈빛 저편에 적어도 무시무시한 아나키즘쯤 깃들고 있지 않나 하고 기대했거든.」 「네가 이놈아 속물이야. 유선생은 아무리 낮추어 봐도 드물게 보는 딜레탕트야. 우리나에 아쉬운 건 유선생 같은 봉 상스 있는 딜레탕트란 말이다.」 A와 C의 응수를 듣고 있다가 B도 한마다 거들었다. 「임마 C, 입 밖으로 나오는 사상하고 가슴 속에 간직된 사상하곤 다를 수가 있는 거다. 넌 그리 얄팍하노.」 「넌 두툼해서 썩은 두부 같구나.」 「썩은 두부라도 좋다. 빙산의 일각도 채 못 될 정치담 한번 듣고 이렇구 저렇구 평을 해? 그게 얄팍하다는 거다.」 「유선생 얘기는 그만뒤. 아가 스웨덴 얘기 하다가 혼났다고 하지 않더냐. 그 도피주의를 우리들만은 긍정해 줘야 할 게 아닌가. 사십 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배운 그 도피주의의 지혜를 우린 건강한 식욕으로써 소화해야 할 게 아냐?」 「A. 너 언제부터 그처럼 어른이 됐노.」 B가 한 말이지만 동식의 마음도 그랬다.
오래간만에 바둑 토너먼트를 하기로 했다. 토너먼트를 해서 1위에서부터 4위까지를 정하는데 이 클럽의 관례는 이색적이다. 1위가 4백원을 내고 2위가 3백원, 3위가 2백원, 4위가 1백원을 내서 대폿값으로 하게 되어 있다. 대폿집에 간다고는 하나 아직은 술맛을 몰랐다. 그저 영락(零落)한 분위기를 즐기며 백탁(白濁)한 술잔을 앞으로 하고 앉아 되는대로 떠들어 대는 것이 취미였다. 「동식이, 요 전날 우리가 어딜 갔는지 알아맞혀 봐.」 B가 A와 C를 번갈아 보곤 말했다. 「치사스러, 집어쳐」 하고 A가 소리를 질렀다. 「우린 H동에 있는 사창굴에 갔어. 약방에서 무장 기구를 사들고.」 「H동 입구에서 A가 창녀에게 붙들렸거든.」 C가 B의 말을 거들었다. B가 깔깔대고 웃으면서 A를 가리켰다. 「저 녀석, 비명을 지르고 내빼는 꼴이란!」 홧김인지 A는 자기 앞에 놓인 대폿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C가 말을 이었다. 「동정(童貞)은 부담이 돼서 못 쓰겠다고 하는 것이 쟤의 입버릇 아냐? 그렇게 선동해서 우리를 거기까지 끌고 가 놓곤, 선봉에 섰던 놈이 비명을 지르고 내뺐으니 골이 뭐 됐겠어.」
동정이 부담이란 말을 A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동식이 들은 말은 이랬다. 「동정이란 그만큼 호기심이 많다는 얘기가 아닌가. 여자만 보면 이상해진단 말야. 이래 가지곤 어찌 여자를 냉정하게 관찰할 수 있겠어? 여자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동정은 빨리 깨뜨려 버려야겠어. 그런데 이편의 편리를 위해 학교에 다니는 계집애들을 건드릴 수도 없고 거리에 다니는 쳐녀를 무책임하게 괼 수도 없고 아무래도 우리의 동정을 육(肉)의 암시장에 갖다 버려야겠어.」
A는 또 이런 말을 했다. 「동정의 사랑은 아무래도 여자에게 대한 진짜 사랑이 되지 못할 것 같애. 어떤 우연으로 만날 수 있게 된 여체에 대한 호기심을 우리들은 첫사랑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동식은 세 친구를 돌아보며 자기만이 동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수연해졌다.
「오늘도 H동에 가 볼까?」 B가 A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두지.」 A가 말했다. 「목사의 아들이란 게 그처럼 속박 관념이 되는 걸까?」 C의 말이다. A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너 사람의 비위를 건드려야만 직성이 풀리겠니?」 A가 흥분했다. A는 목사의 아들이란 말만 들으면 불쾌한 모양이었다.
부자연한 침묵이 흘었다. 「이수근이라는 녀석, 너희들 어떻게 생각하니?」 A가 돌연 말을 꺼냈다. 「그 자식 자칫했더라면 즈그 동네에서 영웅될 뻔했잖아?」 C가 이렇게 말하자, 「영웅이 뭐야, 그런 녀석은 어느 동네에 가도 영웅은 못 된다. 우선 그 능글능글한 꼬락서니를 봐.」 「어쨌든 일종의 비극이지.」 C가 또 이렇게 말하자, 「비극? 비극 좋아하네. 비극이 되자면 인물에 어느 정도의 품위라는 것이 있어야 해. 사상과 인간성의 상극에서 오는 고민이라든가, 고민의 심연에서 풍겨지는 성격의 빛깔이라든가.」 하고 B가 흥분했다. 「이수근에게도 성격은 있잖아?」 C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것은 비극이 될 성격이 못 된다고 하잖았어? 비극적 인물이라면 꼭같은 행동을 했다고 치더라도 이수근 같은 그런 몸가짐, 그런 행세는 안 하는 거야.」
B의 말을 들으면서 동식은 그 번들번들한 이수근의 이마를 생각했다. 그 이마를 생각하니 쥘부채 생각이 났다. 쥘부채로써 그이마를 딱 쳤으면? 관상학(觀相學)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B의 말은 더 계속되었다. 「입신 출세를 위해서는 동료, 동배를 모함하는 것쯤은 예사로 하고, 어떠한 모험도 감내하되 편리주의의 방향만을 택하고, 자기 때문에 어떤 손해를 남에게 끼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러면서 자존과 자만만은 똥배에 가득차 있어 가지고, 구원받지 못해.」 「경쟁 사회에 이겨 남을 표본적 인간으로구먼, 자네 말대로 하면.」 C가 빈정대며 말했다. 「헌데 뚱딴지 같이 술맛 떨어지게 이수근의 얘기는 왜 꺼냈어?」 하며 B가 A를 노려보았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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