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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의 늪」
「미스 민도 단념해. 성 선생님 같은 싱거운 사람 백날 가도 애인이 안 될테니까. 물에 물 탄듯, 장에 장 탄 듯, 액센트가 있어야지 뭐. 그저 선량하기로만 애쓰는 뭐랄까? 신사? 군자? 평생 로맨스도 모르고 사실 어른이야. 안타까운 우등생! 상장이나 주렁주렁 달아놓고 손주들에게 자랑이나 하고 만년을 지내실 불쌍한 우리 선생님. 에드워드 8세를 배워요. 탕!」 「아닌게 아니라 미스심은 서설가가 될 수 있겠어. 그런데 어때, 미스 심 옆에 있는 그 사나이의 발동을 한번 걸어봐.」 하고 성유정 씨는 웃었다. 「부인에게 혼날려구요.」 미스 심이 나를 돌아보았다. 「혼낼 부인은 없소.」 겸연쩍스럽게 나도 한마디 했다. 「부인이 안 계시나요?」 「없어, 독신이야.」 성유정 씨가 대신 받았다. 「아직 결혼을 안 하셨나요?」 「돌아가셨어.」 역시 서유정 씨가 답했다. 「그래서 그처럼 어두우신 거로구먼요.」 미스 심은 세상깨나 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어두운 걸 어떻게 알았어.」 「전 이래 뵈도 26년을 살아오며 인생을 봐 왔어요. 이 분은 허무주의잔가 봐요.」 「그렇소, 나는 허무주의자요.」 하고 반쯤 남아 있는 스카치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마담이 오고 기타를 든 아가씨가 들어왔다. 웃음 소리에 라틴 음악의 가락이 셖였다. 카사비앙카의 밤이 꿈처럼 느껴지고, 나 자신이 꿈 속의 사람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반딧불처럼 명멸했다.
「간혹 집에 놀러 와요.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라도 생기거든 연락도 하구.」 성유정 씨가 헤어질 때 나보고 한 마지막 말이다. 그 바로 앞엔 택시에서 이런 소리도 했다. 「하인립 씨는 실패할 줄 알았어. 그래 내가 한사코 말린 거야. 그런데 이군은 꼭 성공할 줄 알았어. 아이디어도 좋았고 계획도 치밀 했구, 무엇보다 이군에겐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래 내 나름 대로 도우기로 한 건데……그러나 한번 실수했대서 그처럼 위축할 순 없을 것 아닌가.」
이에 대한 나의 답은 이러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짓밟지 않는 한, 돈을 벌지 못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렇게 해서 돈을 벌어 뭣하겠습니까. 나는 히피처럼 살아가렵니다.」 그때 성유정 씨는, 「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야……히피는 해피라나? 히피엔 철학이 있지. 히피로서 살기 위해서도 아이디어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성유정 씨와 헤어져 나는 버스 정류소로 가려는데 집으로, 아니 아내의 곁으로 가기가 싫어졌다. 얼마간의 돈이 호주머니에 있다는 것이 마음을 거렇게 물들인 것이다. 낙원동 후미진 골목을 헤매고 있는데 이제 막 목로 술집의 문을 닫으려고 양철칸을 옮기고 있는 중년 여자가 눈에 띄었다. 나는 성큼 그 양철칸을 비집고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문 닫어유, 손님. 장사는 끝났시유.」 중년의 여자는 황급히 말했다. 「딱 한 잔이면 돼요. 문을 닫으시려거든 닫으세요. 한 잔 하고 열고 나가면 될 게 어뇨.」 주인 여자는 내 인상을 보려는 듯, 즉 위험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을 감정이나 하는 듯 양철칸을 놓고 안으로 들어 왔다. 나는 얼른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집히는 대로 꺼내 드럼통위 놓고, 「이것 다 드리겠어요. 잠간 여게서 한 잔 하두룩만 해 주세요. 한 잔 하구 이 근처의 여관에 가서 잘테니까요.」 하고 정중히 말했다. 중년의 여자는, 「안주가 없는디유.」 하면서도 소주 병과 잔을 챙기기 시작했다. 「주인, 문부터 닫으시구려. 시간 넘겨 장사한다고 말썽이나 있으믄 귀찮지 않소.」 양철칸으로 막아 버려 놓으니 가게 안은 찌는 시루처럼 되어버렸다. 「덥군.」 했더니 중년 여자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등창을 열었다. 「들창 저편에 뭣이 있소?」 「고물 수집장이 있어유」 그거나마 터여 놓으니 숨 쉬기가 한결 편했다. 「주인도 이리로 오시오.」 중년의 여자는 가까이에 와서 앉기는 했으나 술엔 손을 대지 않았다. 얼른 마흔을 넘긴 듯한여자로 보였으나 가까이에서 보니 아직 30대에 있는 것 같다. 눈 언저리에 잔 주름이 있을 뿐 화장기가 없는 얼굴치곤 그다지 미욱하지 않았다. 「바깥 어른은 없소?」 「없어유.」 「어딜 갔소?」 「강원도 탄광에서 죽었어요.」 「오래 되우」 「3년 넘었에유」 「여게서 장사를 하신 진?」 「1년쯤 돼유」 「고생이겠습니다.」 「사는 기 그렇고 그런 기 아녜유?」 「혼자 살기가 쓸슬하지 않소?」 「그럴 때도 있기는 해유」 나는 웬지 그 여자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욕망이 슬슬 솟구침을 느꼈다. 「혼자 있으면 짓궂게 구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사람 사는 세상인께유.」 「친정은?」 「충청도 음성이에유」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사이다 있소?」 「얼음에 채워 놓은 기 있어유.」 여자는 물통 같은 데서 사이다를 꺼냈다. 나는 사이다에 소주를 타게 하고 여자에게 한잔 권했다. 여자는 약 먹듯이 그 술잔을 마셨다. 「사소주라고 한답니다. 사이다에 소주를 탄 걸 말이오.」 그러나 그런 유머는 통하지 않았다. 나는 여자에게 그 사소주를 권했다. 「이러다간 취하겠네유.」 「외로운 사람끼리 우연히 만나 오늘 밤 우리 한번 취해 봅시다.」 「손님이 외로운 사람이유?」 「외롭지 않고서야 이렇게 이 시간에 술을 마시고 있겠습니까.」 「가족은 없으시유?」 「없소. 아무도 없소.」 「돈은 많으신가 보쥬?」 아까 꺼내 놓은 돈이 그냥 드럼통 위에 놓여 있다. 「돈? 이건 오늘 어떤 선배로부터 얻은 거요. 버스값 35원만 빌려 달랬더니 이렇게 많은 돈을 주었소.」 하고 눈가름으로 돈 부피를 헤아려 보았다. 5만원은 족히 될 것 같다. 「이것 다 드리겠소.」 하고 나는 그 돈을 여자 쪽으로 밀어 놓았다. 「안 돼유, 그런 돈을 내가 왜 받아유.」 「난 내일 버스값만 있으면 돼요.」 「그래도 안 돼요」 하고 여자는 돈을 내 쪽으로 도로 밀어 놓았다. 나는 말없이 잔을 거듭했다. 카사비앙카의 화려한 방이 뇌리를 스쳤다. 소설을 쓰겠다던 미스 심의 얼굴이 눈앞에서 웃었다. 그 반동으로 나는 짓궂게, 추잡하게 이 밤을 망쳐 놓고 싶었다. 「아주머니!」 「예?」 여자의 대답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안으면 안길 그런 공기가 서렸다. 「어디 과부가 없을까요. 남자를 원하는 과부, 남자가 그리워 죽을 지경인 과부가 없을까요. 돈도 조금쯤은 가지고 있는……」 「왜유?」 술의 탓인지 내 말의 탓인지 여자의 눈 언저리에 붉은 빛이 돋았다. 「내 물건이 기가 막히거든요. 그저 놀려 두긴 아무래도 아까와요. 그거나 실컷 해주고 밥만 얻어 먹고 잘 수만 있으면 돼요.」 「손님도 짓궂게…….」 「농담이 아닙니다. 한 번 보여 드릴까요? KS마크, 아니 그것 이상이죠. 보여 드릴까요?」 「망측해유」 나는 바지 단추로 갔던 손을 때고 다시 잔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머니도 한잔 해요.」 하고 잔에 술을 부었다. 「우리 딱 합시다.」 여자는 수줍게 잔을 들었다. 나는 그 잔에 내 잔을 부딪쳐 놓고 단숨에 술을 목으로 넘겼다. 여자도 같은 동작을 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기온은 내렸다. 견디기 힘든 더위는 가셨다. 주전자가 비었다. 다시 술을 청했다. 「이제 술 그만 하세유.」 하며 바라보는 여자의 눈이 반들반들 윤이 나 있었다. 「그만 할까요?」 하고 일어서서 나는 여자의 어깨를 안았다. 땀에 밴 옷의 감촉과 땀 냄새가 한꺼번에 나를 자극했다. 「방으로 가유.」 여자의 음성은 갈라져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여자는 들창을 닫곤 요를 깔고 그 위에 삼베 홑이불을 폈다. 「불 꺼유.」 한동안이 지났다. 터지려는 울음을 겨우 참고 열병을 앓는 듯 전신의 경련을 일으키더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푹석 맥을 풀고 여자는 신음 속에 속삭였다. 「나, 나, 이런 거 처음이에유, 이런 일 처음이에유. 애를 둘이나 났는데두 이런 거 처음이에유.」 「한두 남자 겪어 본게 아닐 텐데 처음이라구?」 「백 명을 겪었으면 뭣해유. 허기사 그렇게 많은 남자를 겪어 본 건 아니지만두유. 처음으로 여자 노릇 해본 기분이랑께유.」 「그래 말하지 않았소. 그저 놀려 두기가 아깝다구.」 「정말 아까와요.」 하고 여자의 손이 내 사타구니를 더듬었다. 「많은 건 바라지 않아요. 먹여 주고 재워 주기만 하면 되니까, 과부 하나 소개해요.」 침묵이 흘렀다. 그 여자로선 심각한 침묵이었던 모양이다. 「먹여 주는 것쯤이야……그러나 방이 단간방이라서유.」 「둘이 자는 데 단간방이면 됐지, 뭐 할라고 방이 또 있어야 해요.」 「장사를 하자면 방도 필요해유.」 「그럼 장사하는 동안 파고다 공원에 가서 앉아 있으면 될 것 아뇨. 아까 내가 왔을 때쯤 해서 돌아오기로 하구요.」 「그래도 될까유?」 「되구 말구.」
그날 밤, 낙원동 그 목로 술집의 단간방에서 나는 오랜만에 죽은 마누라 향숙과 아이들의 꿈을 꾸었다. 장소는 처가집 사랑 마루였다. 향숙은 사랑 마루에 은이와 숙이를 각각 한 팔로 안은채 걸터앉아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소린가를 했으나 알아 들을 순 없었다.
그 장면은 마누라와 아이들을 처가에 맡겨 놓고 어디론지 내가 떠나는 순간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아아 그 슬픈 눈, 은이와 숙이의 귀여운 얼굴! 나는 흐느껴 울다가 잠을 깼다. 이미 눈물이 말라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꿈길에서 흘릴 눈물은 있었던가, 하는 의식이고였다. 향숙의 꿈을 꿀 때마다 처가집 사랑이 나타나는 것은 내 행동에의 뉘우침이 환기한 이미지일 것이었다.
그때 울컥한 광란을 진정하기만 했더라도 가족은 처가집에 맡기고 발길에 채이고 주먹으로 맞고, 철창 신세가 되는 등, 내 과오와 실패에의 보상을 내 스스로 감당할 방편이 있었다는 훗날에야 해 본 후회가 가슴에 사무쳐 처가집 사랑에 걸터앉은 향숙의 모습이 나타나곤 하는 것일 게였다.
나는 향숙과의 10년 동안의 생활을 회고해 봤다. 미아리 아내의 그 앙칼스런 저주에서 벗어나기로 한 결심이 비교적 조용한 마음으로 그때를 회고케 한지도 몰랐다. 나는 여태껏 그 당시의 생각을 안 하기로 마음 먹고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북악산 일대를 헤매 내 숨결을 가쁘게 해선 그 영상을 쫓아냈다. 샐러리맨으로서 5년 동안은 그림에 그린 것 같은 단란한 가정 생활이었다.
T물산을 그만두었을 무렵에 가졌던 아이디어로써 사업에 착수 했을 때만 해도 순조로왔다.퇴직금이 있었고 저축도 있었다. 계획을 설명하고 부탁만 하면 자금도 모여 들었다. 내가 착안한 것은 모종의 전열기였다. 전기로써도 바테리로써도 쓸 수 있고 바테리는 언제든 가정에서 충전할 수 있는, 규격에 따라 용도가 광범한 전열기였는데 나는 그것을 미국의 잡지를 읽으면서 착안했다.
국내에선 아무데도 그것을 만드는 곳이 없었으며 그걸 만들 계획조차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미국의 상사와 계약을 맺었다. 다행히 친한 미국의 실업자가 있어 보증금도 싸고 로열티도 비겁하지 않게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난관은 상당 규모의 시설이 있어야 하는 것과 주된 기계를 외국에서 도입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자연 자금의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한 등산용으로부터 10인 가족의 밥을 한꺼번에 지을 수 있는 것에 이르기까지 각 상품의 구색도 맞추어야 하니 시작부터 공장의 규모를 크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다소의 무리가 겹쳤다. 하지만 특수한 회로 장치가 돼 있어 전열기가 필요로 하는 전력 10분의 1쯤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었고 그것이 시중에 나가기만 하면 시장을 席券할 수 있는 전망이 확실했다.
하인립 씨에게서도, 성유정 씨에게서도 그 밖의 여러 친구에게서도 뱃심 좋게 돈을 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자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기계를 발주할 때 화인(禍因)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 사업체들은 비상한 산업 스파이 망을 가지고 있다. 나들 그것을 몰랐을 까닭이 없다.
그래 모든 일을 극비리에 진행시켰고 자금 융통을 위해 돈을 빌 때도 돈을 빌 확신이 서기까진 전열기 공장을 할 작정이란 대법한 설명 이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돈을 빌고 나선 좀 더 상세한 성명을 했는데 그럴 땐 절대로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만일 비밀이 새기만 하면 빈 돈을 갚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못을 밖기까지 했다.
재벌들의 부는 무서울 정도로 불어갔다. 그 불어가는 돈을 은행 금리를 받을 정도로 해서 사장(死藏)할 순 없다. 새로운 투자 방도를 찾아 돈이 돈을 몰아오도록 하자면 이득이 있고, 경쟁이 덜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 때문에 대 사업체는 수많은 산업 스파이를 중소기업을 비롯한 각 업체에 침투시켜 제조 품목 또는 제조 과정의 정보를 입수하려고 서둔다.
중소기업이 수지가 맞을 만할 때 넘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 재벌이, 그것이 이득이 있다고 판단했을 때는 중소기업이 생각도 못할 정도의 규모인 생산을 해선 덤핑을 해 치운다. 덤핑은 경쟁 상대인 주소기업이 넘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공업이 고도로 발달된 이 마당에선 산업 스파이의 대상이 되는 것이 그다지 흔하진 않다. 그러나 내가 계획하고 있는 전열기 같은 것은 스파이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부류에 속한다. 내 실수의 원인은 그 기계의 발주를 어느 재벌에 속한 무역 회시에 맡긴 데 있었다.
그 무역 회사에선 어느 원자재, 어느 기계의 발주 의뢰가 있으면 그 목록을 일단 재벌의 총본부로 올리게 되어 있었다. 재벌의 본부에 있는 분석실에선 원자재, 또는 기계의 용도를 분석해낸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외국에 파견된 지사원을 시켜 조사케 한다. 거기에 내 기계가 걸려든 것이다.「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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