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亡命)의 늪
장엄한 아침이란 것이 있다. 「폐하, 조찬을 드시겠습니까?」 그래도 내가 염세주의자와 다른 것은 언젠가는 장엄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리란 꿈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호화롭고 아늑한 새털 침구에서 아슴푸레 땀이 밴 몸으로 일어나 유리창을 열어제쳐 맑은 공기를 마시곤 똥물이 튀겨오를 걱정이란 절대로 없는 수세식 변기에 왕자처럼 버티어 앉아 장엄하게 아침을 맞이할 날이 있고야 말 것이란 꿈으로 해서 나는 가혹 행복하기조차하다. 만나는 대로 노인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있으며 어쩌다 하워드휴즈 같은 사람에 부딪쳐 거액의 유산을 받을지 모를 일이고, 설혹 그런 횡재는 분에 넘친다 하더라도, 김일성이 자꾸만 간첩을 남파한다니까 간첩 한 놈쯤 붙들어 돈 백만원 수입하는 행운도 무망하진 않을 것이다. 이러한 꿈을 잃지 않고 있다고 해서 변소의 악취가 사라질 리는 없고, 튀겨오르는 똥물이 겁나지 않을 리 없다. 그날 아침도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궁둥이를 쳐든 자세로 변소 안에 앉아 있었다. 버릇대로 주인집에 온 신문을 살짝 실례해서 펴 들었다. 탐탐스런 기사라곤 없었다. 이스라엘 특곡대의 전격작전 같은 얘기는 아무리 먼곳의 얘기라도 그런대로 신나긴 하는데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날 까닭도 없다. 불량 식품이 범람하고 있다는 것은 돈벌이에 혈안이 된 악덕 상인의 흉측한 범죄 행위이기에 앞서, 뭐건 배만 채우면 된다고 해서 초근목피도 사양하지 않았던 이조이래의 사고 방식 탓이란 점을 문제 삼아 볼 만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저러나 식품에 유독 물질을 섞는 놈, 아동들의 급식용 빵에 돌가루를 섞는 놈 따위는 모조리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다. 권총을 마구 쏘아 한 둘을 죽이는 살인범에겐 기혹한 법률이 돈을 벌 목적으로 수십만의 생명을 죽이려고 드는 놈들에게 관대한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신문을 읽으며 그 정도로 흥분해 보는 것도 오랜만의 일이다. 신문을 접으려는데 '하동욱'이란 이름이 눈에 띄었다.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그 일단짜리의 기사가 어떻게 눈에 띄었을까. 자칫했더라면 놓칠 뻔했다는 의식으로 그 사실이 신기롭기까지 했다. 아내는 아직도 잠결에 있었다. 벌린 입 한족 언저리에 흘러내린 침이 말라 붙어 있다. 걷어찬 이부의 한 부분은 허연 허벅다리가 구겨 누르고 있다. 잠자는 얼굴은 이처럼 백치같이 어리석고 조용한데 잠을 깨기만 하면 여우처럼 교활하고 이리처럼 앙칼스러워지는 건 어떻게 된 까닭일까. 내게 생활을 지탱해 낼 힘이 있기만 하다면 영원히 재워놓고 싶은 그런 여자다. 아내 머리맡에 있는 지갑에서 동전 서너 닢을 꺼냈다. 아내는 동전이 몇 님쯤 들어 있는 지갑이면 언제든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둬둘 만큼 관대하다. 그 반면 조금이라도 부피가 있는 돈은 감쪽같이 어디엔지 감추어 버린다. 물론 감추기 힘들 만한 부피의 돈이 있을 까닭이 없다. 나는 아내의 지갑에서 꺼낸 동전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공중 전화를 걸어 볼 참이었다.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긴 골목을 빠져 나가 한길로 나가서도 한참을 걸어야 한다. 7시가 가까운데도 거리엔 사람의 그림자가 드물었다. 이 근처의 사람들은 그만큼 게으르다고 할 수가 있다. 여름철의 가장 좋은 시간은 이른 아침의 이 무렵인데 이 근처 사람들은 그런 시간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공중전화가 있는 박스, 이 박스와 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런 만큼 항상 정답다. 조용히 들어서서 문을 닫고 송수화기를 집어들면 전세계를 향해 호소할 수 있다는 그 가능으로 해서 가슴이 떨린다. 그리고 넓은 공간을 금 그어 유리 벽을 쌓아 성을 만들고 그 유리의 성 안에서 정다운 사람을 찾아 密語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이야말로 문명의 혜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나와 그 공중전화 박스와의 인연은 어느 겨울 밤에 비롯되었다. 전날 밤 외박을 한데다가 그날 밤도 얼근하게 취해 늦게사 돌아온 아내의 얼굴을 힐끔 훔쳐 본 내 눈길이 약간 사나왔던 것이 화근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보죠.」 아내는 여느 때와는 달리 기어이 내게로부터 다짐을 받을 작정인가 보았다. 나는 어설프게 무슨 말을 했다가 장차 곤란을 당하느니보다 이 밤만이라도 어디로 피할 궁리를 했다. 좀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 쪽에서 아내를 꼬신 적은 없다. 사업에 실패한 나머지 죽고 싶다니까 청춘이 만리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쓰냐고 자기편에서 나를 위로하려고 들었고 그 위로를 받고 있는 동안 우리는 어느덧 부부가 되어 있었다. 나내는 자기가 만든 나의 인상에 속은 셈이다. 아내는 나를 조금 도와 주기만 하면 갱생할 사람으로 본 모양이지만 나는 한 가닥 요행을 바라는 꿈은 포기하지 않았어도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볼 생각은 깡그리 포기하고 있는 터였다. 이때, 선뜻 내 뇌리를 스친 것이 있었다. 그 무렵 신설된 공중전화의 박스가 반들반들 유리빛으로 빛나며 내 뇌리에 자리를 잡았다. 취기와 신경질이 상승작용(相承作用)을 하는 모양으로 아내는 못할 말없이 노까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에 여유가 생긴터라 빙그레 웃었다. 이것이 또한 아내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한 모양이다. 침 뱉는 시늉을 하고 있는 아내를 곁눈으로 보며 나는 내복을 입고 양말을 신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양복을 입었다. 나는 소매와 깃이 닳은 외투를 옷걸이에서 내려 입고 역시 낡은 목도리까지 목에 둘렀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 바람이 차가왔지만 아내의 입에서 내뿜는 욕설이 미지근한 온기에 섞여 꽉 차 있는 지옥을 벗어난 것이 우선 상쾌했다. 대문을 의식적으로 요란스럽게 여닫은 것은 아내가 뛰어나와 만류해 줄 것을 은근히 바랐던 것과 술에 취한 아내가 문단속하길 잊었을 경우, 주인이 나와 대문을 잠그라는 뜻이 겹쳐 있다. 긴 골목을 뻐져 나올 때까지 뒤쫓아 오는 소린 없었다. 골목 어귀의 구멍 가게가 이제 막 문을 닫으려는 찰나였다. 거기서 나는 담배와 성냥, 그리고 소주 두 병과 오징어 두 마리를 외상으로 사고, 가졌던 푼돈을 죄다 오 원짜리 동전으로 바꿨다. 그만한 편리를 봐줄 수 있을 정도론 그 구멍 가게에, 나와 아내의 신용은 있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지난 거리엔 사람의 그림자라곤 없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서 깜쪽같이 그 박스안에 몸을 가눌 수가 있었다. 유리 문을 닫으니 밀폐된 방이 되었다. 무픞을 안고 앉을 수 있을 만한 스페이스이기도 했다. 추운 날씨긴 해도 바람막이가 있는 데다가 줄곧 마시고, 씹고,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견디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경찰관이 지나는 듯한 눈치가 보이면 얼른 일어나서 전화를 거는 척했다. 급한 병자가 생겨 병원에 연락하는 중이라고 핑계를 구며댈 작정이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그런 거짓말을 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줄잡이 6백만의 사람을 수면 속으로 봉쇄해 버린 서울의 거대한 밤은 그것이 안은 다양한 꿈으로 해서 소화불양을 일으켜 괴물의 어느 한 부분이 경련을 일으켜도 마땅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파열을 일으켜 피와 고름이 홍수처럼 흘러 내려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이처럼 공중전화 박스 속에 있는 내 자신이 서울의 장부(臟腑)에 이상을 일으키고 있는 이질 분자가 아닌가. 민일 내개 저주의 의사와 악의의 발동이 있다면 서울의 장부에 급성 맹장염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저주할 의사도 악의를 발동시킬 생각도 없다. 설혹 화화스런 육체의 향연이 저 어두운 창 너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짐작을 했어도 내겐 질투할 정열조차 없다. 호사스런 무수한 잠이 서울 가득히 깔려 있는데 다리 한번 만족스럽게 평수 없는 옹색스런 잠을 청하고 있대도 나는 어느 한 사람 원망할 생각은 없다. 나는 부득불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되는대로 다이얼을 돌렸다. 어두운 하공 속에 우리는 전화의 벨 소리, 나는 것이 울리고 있는 공간을 갖가지로 상상하면서 추위를 잊으려고 애썼다. 이제 막 살인을 끝낸 범행의 현장에 울리는 벨 소리. 부부의 침실에 침입해서 情夫를 가진 아내의 가슴을 써늘 하게 하는 벨 소리. 텅 빈 창고에 울려 퍼져 쥐새끼들을 놀라게 하는 벨 소리, 심야의 벨 소린 섣불리 수화기를 목 들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다음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