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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섞고 빼고 흔들어라 >> 실패의 부자가 되어라
몇해 전 신문에서 ‘기업과 문화’라는 칼럼을 읽고 어깨가 으쓱해졌던 기억이 있다. 칼럼의 필자가 21세기를 주도해나갈 기업의 대표주자로 참존을 꼽았기 때문이다. 그이는 기업이 장기적으로 성공해나가기 위해서는 반짝하는 아이디어보다는 일관된 기업문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런 면에서 청개구리로 대변되는 일관된 기업문화를 가진 참존 이야말로 앞서가는 기업이라는 얘기였다. 그이는 우리 회사명에 대해서도 상당한 호감을 표시했다. 참존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청개구리다운 면모가 느껴진다고 했다. ‘참 좋은’과 ‘charming zone(매력 지대)'을 결합하여 내수와 수출을 동시에 노린 공격적인 네이밍이 수륙 생활을 겸하는 청개구리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싼 돈을 들여 일류 모델을 기용하는 대신 청개구리를 광고 모델로 내세운 점도 인상적이라고 했다. 청개구리야말로 색다른 상품으로 화장품 시장의 판도를 바꾸어놓은 참존의 기업 이미지에 꼭 들어맞는 모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칭찬보다 더욱 나를 즐겁게 했던 건 칼럼의 마지막쯤에 실려 있는 대목이었다. ‘이 기업에서 생산하는 화장품은 기존 화장품 장르를 뒤섞거나 흔들어놓는다. 기분 좋은 ’해체성‘이 이 기업의 전반적인 기업행동에서 선명하게 읽히는 것이다.’ 이 대목이 유난히 좋았던 건 나의 제품개발 정신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냈고, 또 소비자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가감 없이 그대로 통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기업이든 기존의 제품과는 다른 새로운 제품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자 애쓴다.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제품을 사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장점은 더욱 부각시키고 단점은 개선시키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참존 제품의 특징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미 소비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제품이지만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기보다 그것을 서로 뒤섞고 빼고 흔들어서 전혀 새로운, 엉뚱하리만큼 신선한 제품을 창조해내는 것. 그건 어쩌면 단순한 제품 개발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의 인식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아, 이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 하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동서양의 음식을 섞어 퓨전 요리를 만들어내듯 화장품에도 퓨전이 있다.
서로 뒤섞고 빼고 흔들어서 엉뚱하리만치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소비자의 입장에 서서 제품을 보려고 했던 데 있었다. 96년에 내놓은 ‘크림엣센스’의 출발이 바로 그랬다. 사실 여성 화장품은 제대로 갖춰 쓰려면 한도 끝도 없다. 기초화장품만 해도 클렌징 제품부터 마사지크림, 스킨로션, 밀크로션, 아스트린젠튼, 영양크림, 에센스, 아이크림까지 모두 7~8가지가 넘는다. 이런 제품을 모두 갖추기가 쉽지 않지만 빠뜨리지 않고 챙겨 바르는 것 또한 보통일이 아니다.
물론 기초화장품에도 필수와 선택이 있다. 스킨로션과 밀크로션이 필수라면 다른 제품은 비교적 선택에 가깝다. 한두 가지쯤 빼먹는다고 피부가 당장 ‘악어가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피부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는 기초화장품을 제대로 챙겨 발라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성들은 모두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다만 값이 너무 비싸서, 챙겨 바르기가 번거로워서 기초 제품을 제대로 갖출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런 여성들을 기초화장품 시장으로 끌어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화장품 가격을 내리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기초화장품의 가짓수도 줄여야 한다. 그렇다고 품질에 소홀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런저런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이것과 저것을 섞어 더 나은 한 가지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동서양의 음식을 섞어 ‘퓨전 요리’를 만들어내듯 ‘퓨전 화장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우선 선택 종목에서부터 ‘퓨전’을 시도하기로 했다. 대부분 여성들이 스킨로션과 밀크로션을 따로따로 바르는 것에는 오랫동안 길이 들어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길이 들어 있는 습관을 고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미 몸에 밴 습관을 고치려면 그보다 두 배의 시간이 들어가야만 가능하다. 아니,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매일같이 따로 사용하던 스킨로션과 밀크로션을 합쳐 제품을 만든다면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내기 힘들다. 왠지 모르지만 뭔가가 하나 빠져버린 듯한 허탈감을 쉽게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영양크림과 에센스라면 분명 사정이 다르다는 판단이 들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또는 번거롭다는 이유로 두 제품 가운데 하나만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제품을 섞어 하나로 만든다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품이 크림엣센스였다. 남성용 스킨엣센스 역시 같은 맥락에서 개발된 상품이다. 다만 남성들은 세안 후 스킨로션 한 가지만 바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영양크림 대신 스킨로션에다 에센스를 섞었다. 훗날 크림엣센스와 스킨엣센스는 부부 세트로 묶여 많은 인기를 누렸다. ‘내 화장품과 남편 화장품을 함께, 그것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다.’는 애교 있는 컨셉이 주부들에게 먹혀들었던 것이다.
퓨전의 출발점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크림엣센스가 호응을 얻자 이번에는 스킨로션과 밀크로션, 에센스를 하나로 묶어볼 생각을 했다. 물론 따로따로 쓰는 게 습관화되어 있는 세 제품을 하나로 묶는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스킨밀크엣센스에 대한 고객의 반응은 의외로 신선했다. 처음에는 스킨로션을 바른 듯 산뜻하고, 조금 있으면 밀크로션을 바른 듯 촉촉하며, 하루 종일 에센스를 바른 듯 부드러우면서도 끈적임이 없어 세 제품을 따로 사용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세 제품을 모두 구입하려면 적어도 7~8만원이 드는 데 비해 스킨밀크엣센스는 그 절반 가격 정도에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사실 참존의 히트 상품은 대개 뉴 콘트롤크림이나 크림엣센스, 스킨밀크엣센스와 같은 단품들이다. 이런 단품들이 히트를 친 까닭은 다른 게 아니다. 경제적인 이유나 귀찮다는 이유로 몇몇 기초 제품을 생략해오던 소비자들을 공략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른바 틈새시장을 노린 게 주효했다. 내가 ‘퓨전 화장품’을 시도할 때마다 우리 사원들은 한숨부터 내쉰다. 한마디로 ‘이것도 저것도 다 못 팔아먹을 짓’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시도가 사원들의 우려처럼 기존 시장을 잠식해 들어가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며 나아가 시장의 흐름을 바꿔놓는 일이다.
최고가 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존의 일들을 젖히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내가 최고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일등 역시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뛰고 있다. 일등의 꽁무니만 쫓아서는 영원히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가 없다. 행영 일등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금세 다른 누군가가 나를 치고 올라오게 마련이다. 진정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소니가 오늘을 가전제품의 대명사로 불리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남들이 커다란 진공관 라디오를 만들어 팔 때 손바닥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들어 팔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하드웨어 산업에 골몰하고 있을 때 당시로선 상품 가치가 희박해 보이던 소프트웨어 개발에 주력했던 게 그들의 성공 비결이다. 최근 들어 리눅스가 ‘패러다임 리프트’를 외치며 마이크로소프트에 맞서고 있지만 그들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란 요원해 보인다. 세상에 없는 것을 ㅁ나들어낸다는 것은 나만의 시장을 개척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시장에서는 아무도 나를 당해낼 수가 없다.
>> 실패의 부자가 되어라
우리라고 해서 모든 제품이 다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쓰라린 실패의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실패한 제품은 모두 우리가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남들 하는 대로 따라했던 것들이다. 우선, 석고 팩이 그렇다. 당시 머드팩이 출시되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을 때였다. 영업부에서 적극 권유하는 대로 석고 팩에 집중 투자해 용기도 수입해서 한꺼번에 몇 십만 개를 만들어 내놓았다. 그런데 엄청난 양이 곧바로 반품되어왔다. 한마디로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항상 제품을 개발할 때는 소비자가 돼서 역지사지하는 입장으로 만들어내야 하는데 석고 팩의 경우는 우리 쪽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또 스킨메이트라고 하는 제품도 실패한 것 중의 하나다. 스킨메이트는 단계별로 2주씩 8주 동안 바르도록 프로그램화된 제품인데, 이 역시 이미 외국 기업에서 출시해 인기를 끌었던 아이템이었다. “독창력 없이 남을 모방하면 잘해야 2등일 뿐”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다음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