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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상에 없는 것을 찾아라 >> 만족의 거지가 되어라
한번은 모 일간지 기자가 물어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언제나 고객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겁니다.” 뭔가 기발한 답을 기대했던 기자는 너무도 원론적인 이야기에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의 답은 알지 못한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한 번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주변 풍경을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거꾸로 바라보는 세상은 낯설고 새롭다. 늘 보던 그 학교, 그 운동장, 그 나무인데도 말이다. 소비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기업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군대에서 소원수리 하듯 불만사항이나 요구사항을 알아내서 해결해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보다는 소비자 입장에 서서 그들의 잠재된 요구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아직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들어내면 반드시 히트를 치게 되어 있다. 소비자의 요구를 쫓아가는 대신 소비자로 하여금 나를 따라오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 88년에 출시된 참존 클렌징워터가 그런 제품이었다.
화장의 반은 클린싱.
화장의 반은 클린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색조화장 자체가 피부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땀이나 피지, 먼지가 엉겨 붙은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해두면 피부가 자극을 받아 트러블이 일어난다. 화장을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당시 유일한 클렌징제품이었던 클렌징크림은 사용할 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우선 클렌징크림을 얼굴에 발라 잘 문질러준 다음 티슈나 화장수건으로 닦아내야 한다. 클렌징크림에 들어 있던 기름기가 얼굴에 남아 끈적거리기 때문에 비누 세안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는 직장 여성들에게 클렌징은 또 하나의 ‘일’이었던 셈이다.
그 무렵 우리는 클렌징오일이라는 제품을 만들어 선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클렌징오일이라고 해서 클렌징크림보다 특별히 나을 건 없었다. 다만 남들과 똑같은 제품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제형만 조금 바꾸어보았던 것뿐이다. 클렌징크림의 아성을 무너뜨리려면 보다 획기적인 상품이 필요했다. 나는 고민 끝에 화장품의 기제를 기름에서 물로 바꾸어 보기로 했다. 클렌징크림이나 오일이 끈적거리는 것은 기제가 기름이기 때문이다. 기제를 물로 바꾼다면 그런 끈적임은 사라질 게 분명했다. 바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품이 국내 최초의 수성세안제인 참존 ‘클렌징워터’이다.
클렌징워터는 클렌징크림이나 오일과는 달리 끈적임이 없다. 뿐만 아니라 화장 솜에 묻혀 닦아낸 다음 물 세안만 해도 색조화장이 말끔히 지워진다. 귀찮고 번거롭던 클렌징이 놀라울 정도로 간편해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클렌징워터 판촉에 나섰던 영업사원들은 번번이 화장품 전문점 주인들에게 퇴짜를 맞고 돌아와야 했다.
“색조화장을 물로 지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누가 물을 돈 주고 사냐. 옛날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돈 받고 팔아먹었다더니 너희가 바로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로구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다. 참다못한 영업사원들이 나에게 울분을 토해놓기 시작했다. “사장님, 사장님은 정말 돈키호테이십니다. 시장 조사도 안 하고 무작정 제품을 만들어놓으면 저희더러 어떻게 팔라는 말씀이십니까?”
나름대로 자신 있게 내놓은 상품이었지만 막상 소비자들의 반응이 달갑지 않으니 내 마음도 영 불편했다. 어떻게 해야 소비자들로 하여금 클렌징워터의 기능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문득 피보약국을 할 때 써보았던 샘플 전략이 떠올랐다. 맞다, 그거야! 품질만 자신 있으면 샘플만큼 직접적으로 소비자들에게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클렌징크림만 고집하던 소비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은 샘플 전략이었다. 30밀리 그램짜리 샘플을 만들어 뿌리자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클렌징크림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클린싱워터와 클린싱티슈의 성공은 고객의 불편함을 생각했기에 가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업사원 하나가 화장품 전문점 점주의 의견이라면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사장님, 제 거래처에서 클렌징워터는 화장 솜에 묻혀서 써야 되니까 아예 화장 솜까지 넣어주면 좋겠다는데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하고 무릎을 내리쳤다. 품질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소비자의 불편함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비자들이 화장품을 사면 화장품 전문점에서는 으레 화장 솜이나 샘플을 끼워준다. 클렌징워터를 구입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클렌징워터를 쓰다가 화장 솜이 떨어지면 다시 화장품 전문점에서 얻거나 사야 한다. 화장품은 사지도 않으면서 화장 솜만 달라고 하기는 미안한 노릇이다. 그렇다고 거저 주기도 하는 화장 솜을 돈 내고 사자니 아까운 생각이 든다. 그런 불편함을 한 번이라도 느꼈던 고객이라면 다시는 클렌징워터를 사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당장 클렌징워터에 화장 솜을 넣도록 지시했다.
화장솜까지 들어가자 클렌징워터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클렌징크림의 판매량을 넘어서는 것도 잠깐이었다. 나중에는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영국에서 최신형 자동주입기까지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우리 클렌징워터가 전국에서 품질 사태를 빚을 정도로 히트를 치자 경쟁업체에서도 90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 앞 다투어 수성세안제를 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만큼 재미를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최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쟁업체들이 좁은 수성세안제 시장에서 제 살 깎아 먹기식 경쟁을 하는 동안 우리는 또 다른 개선에 들어갔다. ‘클렌징티슈’가 바로 그것이다. ‘어차피 화장 솜에 묻혀서 써야 되는 것이 클렌징워터라면 아예 티슈 형태로 만들어 하나씩 뽑아 쓰게 하면 어떨까’ 하는
발상의 전환이 클렌징티슈를 낳았다. 클렌징티슈는 클렌징워터에 이어 다시 한번 클렌징의 개념을 바꾸어놓은
제품이었다.
허옇게 번들거리지 않는 선 크림은 없을까? 고객을 만족시키는 제품을 찾아내라
지난 99년과 올해 연속해서 여름철 선 크림 시장을 강타한 알바트로스 크림과 나인투파이브 선 크림은 내게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소비자도 필요로 하고, 내가 만족스러운 것은 소비자도 만족스러워한다.’는 점을 일깨워준 제품이다. 두 제품의 아이디어를 얻은 곳은 골프장이었다. 골프는 야외에서 장시간에 걸쳐 하는 운동인 만큼 골프장을 찾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선 크림을 바르고 나타난다. 그런데 보통 선 크림 제품은 얼굴에 바르면 허옇게 들떠서 마치 어릿광대 분장을 한 것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선 크림 속에 들어 있는 이산화티탄이라는 성분이 손으로 문지르면 희게 변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화장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차마 그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우선 나부터도 어릿광대처럼 보이는 게 싫어 선 크림을 바르기가 꺼려졌다. 그렇다고 선 크림을 안 바르자니 “명색이 화장품회사 회상이라는 사람이 제 얼굴 관리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참다못한 나는 우리 연구소에 ‘문질러도 허옇게 들뜨지 않는 선 크림을 만들어내라.’고 특명을 내렸다.
그러나 문지르면 허옇게 들뜨는 현상, 즉 ‘백화 현상(白化現象)’을 없애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 크림의 주요 성분인 이산화티탄은 백화현상을 일으키는 주범이기도 하지만 자외선을 효과적으로 차단해주는 일등 공신이기도 한 까닭이다. 실력 좋기로 이름난 우리 연구소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자그마치 3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선 크림이 완성되자 다른 욕심이 생겨났다. 피부가 장시간 노출되다보면 수분을 빼앗겨 거칠고 건조해지기 쉽다. 이런 현상을 막으려면 선 크림 속에 피부를 부드럽고 촉촉하게 유지시켜주는 영양성분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욕심이 채워지자 이번엔 또 다른 욕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선 크림은 자외선을 차단하여 피부가 검게 그을리거나 잡티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소비자들이 선 크림을 사용하는 것은 잡티 없이 하얀 피부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자외선을 차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족한 그 부분을 채우려면 선 크림 속에 피부를 희고 투명하게 가꿔주는 화이트닝 성분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 욕심까지 채워지자 이왕 욕심을 부리기로 한 것, 끝까지 부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색조화장을 할 때는 선 크림을 바르기가 조금 어정쩡한 감이 없지 않다. 선 크림은 기초화장품도, 언더 메이크업 화장품도, 색조화장품도 아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단계에서 발라줘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선 크림이 언더 메이크업 기능을 갖추고 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기초 화장품을 바른 다음 앨버트로스 크림을 바르고 색조화장을 하면 여름철 외출 준비 끝.
이렇게 있는 대로 욕심을 부려 알바트로스 크림을 완성해놓고 보니 가격이 문제였다. 제품에 들어간 원료가 다양한 만큼 아무리 적게 받는다고 해도 타사 제품의 세 배는 받아야 될 것 같았다. 품질 하나만 믿고 그 가격에 출시를 해봤지만 들어오는 반응은 한결같이 “제품은 너무 좋은데,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일단 샘플이 나가자 골프장이나 항공사 쪽에서는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름 한철 쓰고 마는 선 크림에 많은 돈을 투자하기 싫다.”는 일반 소비자들의 반응을 돌려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반 소비자들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우리는 마침내 알바트로스 크림의 효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용량을 줄이고 가격을 낮춘 나인투파이브 선 크림을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나인투파이브 역시 가격은 높은 편이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제대로 된 선 크림 하나를 만들기 위해 3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한 것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았다.
>> 만족의 거지가 되어라
미쓰이 다카토시. 그는 일본의 ‘고객 만족의 원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가 맨 처음 포목점을 연 것은 1673년, 나이 52세 때였다. 그 당시 유명 포목점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방문 판매와 외상으로 물건을 거래하는 방식으로 비싼 값으로 옷감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문을 연 다카토시는 기존 포목점들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판매 방식을 취했다. 방문 판매 대신 가게에서 직접 물건을 팔았고, 외상거래 대신 현금거래를 위주로 했다. 따라서 가격을 훨씬 낮출 수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소비자들이 그의 가게로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물건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다 다른 가게보다 싼 값으로 물건을 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또 이런 광고도 내보냈다. “저희 가게에선 어떤 감이든 다른 가게보다 싸게 팝니다. 다만 가격에 싸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물건값을 깎아줄 수 없으니 고객 여러분께서 널리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이 광고는 이후 정찰제 판매의 시초가 된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보다 새로운 판매법을 개발해냈다. 다른 포목점들은 거의 다 한 필, 두 필 하는 단위로밖에 팔지 않았지만 사실 일반 소비자들은 그렇게 많은 옷감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카토시는 고객의 불만을 받아들여 수건 크기의 옷감을 팔기 시작했다. 그건 놀라운 혁명이었고, 당연히 소비자들로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끊임없이 새로운 판매 방식을 개발해내 소비자를 만족시켰던 미쓰이 다카토시.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새삼 어떤 시각에서 제품을 개발해야 하는지를 되짚어보게 되었다. 소비자의 불편을 제품으로 연결시켜 다시금 소비자의 만족으로 되돌려줄 줄 아는 지혜야말로 성공하는 기업인의 기본 자질일 것이다. <다음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