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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음의 저울을 되는 쪽으로 기울여라 >> 잘망의 거지가 되어라
1979년 나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약을 조달해준 약국이 전국 60군데에 달했다. 피보약국의 ‘잘나가던 약사’가 ‘갈 곳 없는 도망자’로 추락해버렸다. 전국의 절을 찾아다니며 도망자 생활을 시작했다. 7개월을 피해 다니자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양산 통도사의 쾌쾌한 냄새가 진동하는 골방. 그 곳에서 인생을 마감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 앞에 놓인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벽이었다. 그런데 텅 빈 방 안에 빛바랜 신문 한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6개월 전 나의 기사가 실린 신문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했다. 갑자기 울분이 솟구쳤다. 나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고 한심했다. 이렇게 숨어 지내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일까, 의구심이 일었다. 나는 신문을 움켜쥔 채 울고 또 울었다. 한겨울 혹한의 강바람을 맞으면서 나무껍질을 벗길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아였다. 남자의 눈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나오리라곤 생각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 나는 일생 동안 흘려야 할 눈물을 모두 쏟아냈던 것 같다. 내 나이 마흔, 그 어떤 것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이었다. 남들 앞에 떳떳이 내보일 수 있는 뭔가를 완성하기로 약속한 예순 살 까진 아직 20년이란 길 세월이 남아 있었다. 그 남은 20년을 무의미한 도피 생활로 허비할 수는 없다는 오기가 치솟았다. ‘좋아. 내가 알고 했건 모르고 했건 어차피 나는 그물에 걸려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 그물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내게 남아 있는 20년을 멋지게 새로 시작하는 거야.’ 그 길로 산을 내려온 나는 서울지검을 찾아가 자수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난의 서막에 불과했다.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8억 3천여만 원의 벌금형을 언도받았다. 전 재산을 탈탈 털어도 그만한 돈은 마련할 수가 없었다. 약국을 하면서 조금씩 갚아간다 해도 평생이 걸릴 만큼 큰 액수였다. 생각다 못한 나는 항소심을 신청해 시간을 벌어놓은 다음 다른 사업을 도모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사업은 손대는 족족 실패를 봤다. 더 이상 새로운 사업을 벌일 용기나 투지도 생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벼랑 끝까지 내몰린 기분이었다. 그 자포자기의 순간에 무슨 계시처럼 떠오른 것이 화장품회사 사장으로의 변신. 언뜻 생각하기엔 전혀 엉뚱해 보이지만, 둘 사이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피부’라는 연결고리였다.
'잘나가던 약사’에서 ‘갈 곳 없는 도망자’로 추락 피보약국 시절, 우리 약국을 찾는 손님 가운데 70퍼센트는 여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70퍼센트는 피부병이 아닌 기미나 주근깨, 여드름, 주름살 때문에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피부병 때문에 찾아오는 이들은 병이 나으면 이내 발길을 끊어버리지만 피부 트러블 때문에 찾아오는 이들을 끝까지 단골로 남았다. 10여 년간 그런 손님들을 상대하다보니 여성의 피부에 대해서는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더구나 내게는 당시 국내 화장품 업계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던 바이오 성분을 이용해 외용크림을 만들어본 경험도 있었다. 바이오 원료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75년 무렵. 그 즈음 나는 우리 약국에서 팔던 수입산 기미 크림이나 여드름 연고의 효능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품고 있었다. 약용크림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잘 듣는 듯싶다가도 곧 내성이 생겨 점점 효과가 떨어졌고, 나중엔 오히려 피부를 망쳐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만든 약용크림이나 연고도 그런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에서 원료 약품을 수입해 국내 제약회사나 화장품회사에 납품하는 수입업자 한 분이 찾아왔다. “지병이던 두드러기가 피보약국 조제약을 썼더니 말끔히 나았어요. 외국의 유명한 병원에서도 못 고치던 고질병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답례로 피부 조제약 원료는 물론이고 화장품 원료로도 좋은 기가 막힌 제품을 소개해드릴까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이가 말하는 기가 막힌 제품이란 다름 아닌 바이오 원료였다. 나는 그이를 통해 구한 바이오 원료로 외용크림을 만들었고 약국을 찾는 손님들에게 심허삼아 써보게 했다. 세포에 직접 스며들어 세포분열을 활성화시킨다는 바이오 원료의 효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바이오 원료를 첨가해 만든 외용크림은 기존의 외용크림과는 달리 내성이 없었다. 오히려 쓰면 쓸수록 피부가 좋아졌다. 다만 한 가지, 열 사람에 한 사람 꼴로 부작용이 생긴다는 게 문제였다. 그 후로 나는 바이오 원료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거듭했고, 마침내 나만의 노하우를 갖게 되었다. 그 노하우를 이용해 화장품을 만든다면 성공적으로 재기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그 전에도 바이오 원료가 들어간 화장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70년대 모 화장품회사에서 콜라겐이라는 바이오 원료를 첨가함‘프라겐 크림’을 출시해 크게 히트를 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프라겐 크림은 부작용 때문에 이내 출시를 중단해야 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국내 화장품 업계에서는 바이오 원료 사용을 중단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더욱이 당시의 피부과학은 피부를 통해 직접 영양을 공급하는 문제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피부는 선택적 투과성을 가지고 있는데 피부를 통해 영양을 공급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었다. 피부 세포를 통해 영양을 공급하는 바이오 원료의 효능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화장품의 수준도 피부 보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피부 보호와 치료 사이에는 ‘피부 개선’이라는 단계가 있다. 검은 피부를 희어지게 만드는 것, 기미나 주근깨를 없애는 것을 피부 보호나 치료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은 피부개선이라고 해야 한다. 내가 만들고자 했던 것은 바로 피부를 개선해주는 화장품, 다시 말해 ‘기능성 화장품’이었다. 학자들이 뭐라고 하던 나는 바이오 원료를 이용한 외용크림의 효능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지 오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노하우도 이미 내 손안에 들어 있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기능성 화장품을 만들어내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피보약국 시절의 좋은 처방을 활용하기에는 화장품회사보다 제약회사 쪽이 낫지 않겠느냐고 충고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물로 화장품회사가 아닌 제약회사 쪽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약회사는 이름처럼 ‘제약’이 많았다. 의약품을 한 잔의 비유한다면 물은 부형제, 커피는 주성분, 프림과 설탕은 보조성분이 된다. 그런데 의약품은 마치 자판기에서 뽑아내는 커피와 같아서 내 입맛에 맞춰 제각각 타먹을 수가 없다. 의약품의 효능을 결정하는 주성분과 보조성분의 상용량이 미리 정해져 있어서 만드는 사람 마음대로 가감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반면에 화장품은 기제인 물을 제외하고는 커피와 설탕, 프림이 모두 첨가제로 분류된다. 첨가제는 말 그대로 첨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드는 사람 마음대로 빼거나 보태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내가 내린 처방에 따라 내가 원하는 원료를 원하는 만큼 사용해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 셈이다. 피보약국 때도 그랬지만 화장품을 시작하면서도 나는 이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것, 그러면서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제품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 욕심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남들과 달리 거꾸로 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약 남들과 똑같은, 아니 그 어슷비슷한 제품을 찍어내는 회사라면 아예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또 하나, 제약회사 대신 화장품회사를 택한 이유는 사업성에 있었다. 의약품은 제아무리 좋은 원료를 사용해서 만들어봤자 값을 비싸게 받을 수가 없었다. 국민보건과 직결된 제품이라 가격을 함부로 올리지 못하도록 정부에서 제재를 가하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화장품은 달랐다. 좋은 원료를 듬뿍 넣어 만든 제품은 그에 알맞게 비싼 값을 받고 팔면 되었다. 물론 그 제품을 선택하느냐 마느냐는 고객의 마음에 달렸지만. 사업성을 선택의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당시의 형편 때문이기도 했다. 8억 3천여만 원의 벌금을 갚아나가려면 옹골지게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인생은 8억 3천여만 원이란 커다란 족쇄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내 나래를 활짝 펼 수 있는 사업은 제약업이 아니라 화장품 제조업이었다.
된다는 믿음이 곧 가능성이다 새 사업의 방향을 결정하고 난 후 곧바로 시장 조사에 들어갔다. 맨 먼저 우리나라 10대 화장품회사의 공장장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열이면 열, 모두 나를 말리려고만 들었다. “피보약국은 유명하니까 그것만 해도 먹고 살 만큼 꽤 돈을 버실 텐데 왜 하필 망할 게 뻔한 화장품회사를 하려고 하십니까?” “도대체 왜 망한다는 겁니까?” 답답한 나머지 따져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화장품은 패션입니다. 유행을 선도해나가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그리고 유행을 선도해나가려면 광고를 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광고비가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한두 푼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화장품회사 매출 순위는 광고비 지출 순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장님은 우리나라 화장품회사가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10대 화장품회사를 빼고도 70~80군데가 넘습니다. 광고를 안 하니까 사람들이 모를 뿐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70~80군데 회사 매출액을 모두 합해도 업계에서 1위를 하는 회사 매출을 따라가기 힘들다는 겁니다. 그런 화장품회사를 뭐 하러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러나 그들의 비관적인 전망도 내 의욕을 꺾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내 투지에 불을 질렀다. ‘화장품이 패션이라고? 보아하니 광고에만 신경 쓰느라 제품개발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군. 그래, 내가 힘을 기를 때까지 한 십 년만 계속 그렇게 하고 있어라. 지금부터 나는 기능성 화장품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거다. 그래서 십 년 안에 우리나라 화장품 시장을 석권하고 말 거야.’ 시장 조사를 마치고 나서 우선 익산의 대도화학을 인수하는 형식으로 화장품 제조 허가증을 손에 넣었다. 남은 것은 공장을 마련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경기도 일대를 다 돌아다녀봐도 마땅한 공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장소가 마음에 들면 값이 터무니없이 비쌌고, 값이 적당하다 싶으면 장소가 형편없었다. 결국 공장 매입을 포기하고 의왕에 있는 100평 남짓한 공장을 빌려 10명의 직원들과 함께 제품 생산에 들어갔다. 1984년 11월, 드디어 시제품이 나와 판매에 들어갔다. 하지만 광고 한 번 안 내보낸 제품을 받아주겠다는 화장품 전문점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물론 광고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공장 임대료와 수도세, 전기세만 해도 벌써 8개월 치나 밀려 있는 터였다. 임대 보증금을 거의 다 까먹어 들어갈 즈음, 공장 주인이 나를 불렀다. ‘혹시 공장을 비워 달라고 하려나?’ 가슴 졸이며 찾아간 나에게 그이는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자네 사정이 너무 딱해 보여서 하는 말인데… 다른 화장품 회사에 물건을 대는 하청일을 맡아서 해보지 않겠나? 왜 그 OEM이라는 것 말일세. 안 되는 회사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그게 벌이도 훨씬 나을 거야. 자네가 하겠다고만 하면 내가 다리를 놓아보겠네.” 그이의 마음은 정말 고마웠지만 나는 조금도 주저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냐하면 나이 마흔이 넘어서 시작한 사업, 망하든 흉하든 내 것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늘 이렇게 따뜻하게 격려하고 위로해주시니…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하청일을 하게 되면 지금 당장의 형편은 나아질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또 남의 것을 자꾸 만들다보면 내 것은 그대로 묻혀버릴 것 같아요.” 그 뒤로도 몇 년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상황은 계속되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내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 아울러 안 된다는 생각도 마음속에 품지 않았다. 무언가 새로운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보려 할 때, 우리 마음의 저울은 된다고 믿는 쪽과 안 된다고 믿는 쪽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게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된다고 믿는 쪽에 조금 더 무게를 실어준다. 그렇게 하면 마음의 저울은 물론이고 운명의 추까지 ‘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걸 느끼곤 한다. 된다는 믿음 자체가 커다란 가능성인 까닭이다.
>>절망의 거지가 되어라 언젠가 신문에서 읽었던 칼럼이 떠오른다. 주제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과 생각이 그 사람의 인격과 생활과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빈센트 필 박사라는 분의 글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었다. “내셔널 풋볼 리그 시카고 베어즈의 유명한 코치 조지 헬라스는 집과 사무실 벽에 언제나 이런 글귀를 적어놓고 스스로 말했다. ‘잠자리에 들 때는 언제나 승리자가 되어 있어라.’ 이 얼마나 현명한 슬로건인가. 우리도 헬라스의 교훈에 따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지닌 채 잠자리에 들지 않도록 하자. 잠 속에 빠져들면서도 앞으로 성공할 때의 일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인간이란 자기가 오랫동안 상상해왔던 그대로의 인간이 되기 쉽다.” 칼럼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처음 화장품회사를 차렸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몇 달째 월세도 밀리고 전기료조차 내지 못해 제대로 문을 열어보기도 전에 다시 닫아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때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건 ‘정말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지? 또다시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난 꼭 될 거야. 성공에는 어떤 속임수도 통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내 모든 열정과 노력을 기울이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훗날 화장품 업계의 제1인자가 외어 세상 사람들에게 참존의 제품을 자신 있게 권하는 모습을 마음껏 상상하는 거야. 정말이지 그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군.’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다시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다음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