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난은 곧 희망과 꿈의 재료이다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라

             >> 베품의 부자가 되어라

 

 

람들은 나를 가리켜 '청개구리 박사'라고 부른다.  경쟁사들이 광고에 매달릴 때 샘플 홍보에만 나섰고 다른 없체들이 색조화장품 등으로 품목을 늘려나갈 때 고집스럽게 기초화장품에만 몰 두 했다. 업계 관행인 어음거래 대신 철저한 현금거래를 원칙으로 삼았으며 사장이 사원들 월급을 책정하는 것과는 반대로 사원들이 사장 월급을 책정하도록 했다. 모든 부분에서 기존 틀을 파괴는 '청개구리 경영'  그것은 45세의 적지 않은(아니, 너무 늦은)나이에 시작한 참존 화장품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일궈낸 원동력이었다.

  그 힘을 얻기까지 내겐 어둠의 터널이 있었다. 피보약국의 '잘나가던 약사'가 결찰에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로 추락했고 승승가도를 달리던 회사가 난데없는 부도위기설로 공두박질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바닥을 향해 끝없이 내려 갈 때마다 나는 항상 어린 시절의 가난이 떠올랐다. 무엇 하나 변변히 가진 것 없는, 그야말로 지독스런 가난, 너무 없어 오히려 홀가분하기까지 했던 밑바닥 인생. 하지만 그랬기에 나는 꿈 꿀 수 있었다. 컴컴한 물 속에서 올챙이로 내어나, 곧이어 뒷다리와 앞다리가 생긴 청개구리로, 그 다음엔 온전한 청개구리가 되어 뭍으로 뛰어올라가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가난과는 정반대로 거꾸로 뛸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러나 결코 가난을 잊지 않는 청개구리가 되리라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내 인생의 팔 할은 바로 가난이었기 때문이다. 그 가난은 오늘날의 참존을 일으켜 세운 든든한 기둥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에게서 다시 네게로 대물림된 가난

  한국전쟁의 여파가 채 가시기 전인 1953년 늦가을 무렵의 일이다. 일요일이었던 그 날은 경남 하동군 내 30여 개 초등학교 대표들이 모여,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해 화개에 주둔해 있던 군부대로 위문공연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 학교도 학예회에서 호평을 받았던 연극을 가지고 위문공연에 참가하기로 했다.
  당시 6학년이었던 나는 연극의 주인공을 맡아 가슴이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다. 연극도 연극이지만 하동읍에서 화개면까지 60리 길을 차를 타고 간다는 사실이 나를 마냥 들뜨게 했다. 차 한번 얻어 타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내일 아침 8시에 군부대에서 트럭을 보내기로 했다. 한 사람도 늦지 말고 8시까지 학교에 모이도록 해라.”

 전날 연극 담당 선생님의 당부가 있었던 터라 나는 여느 날보다 일찍 일어나 나무 한 짐을 뚝딱 해치웠다. 사실 나는 일요일이라고 해서 마음놓고 놀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평일이면 학교 가기 전에 한 짐, 방과후에 한 짐 해서 두 짐, 토요일이면 석 짐, 일요일이면 넉 짐씩 땔감으로 쓸 나무껍질을 벗겨와야 했다. 하지만 그 날은 아주 특별한 날인만큼 어머니도 이해해주시리라 믿었다.
 서둘러 학교 갈 차비를 마친 나는 조심스레 어머니께 위문공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첫 마디에 고개를 가로 저으셨다.

 “우리 형편에 연극이 다 뭐꼬? 니는 지금 한가하게 위문공연 다닐 처지가 아니다. 오늘부터 몇 주 동안 너뱅이들에 나가서 일을 해야 겨우 올 겨울 김장을 담글까 말까 한데, 그게 무슨 소리고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그 무렵 하동에는 가을이면 너른 들판 가득 배추와 무를 재배하는 너뱅이들이라는 곳이 있었다. 김장철이 다가오면 상인들은 너뱅이들에서 배추와 무를 밭떼기로 사들여 장배에 싣고 부산으로 팔러 나가곤 했다. 그때가 되면 너뱅이들에서 섬진강 장배까지 배추와 무를 날라다줄 일손이 아쉬워진다. 어머니 말씀은 나더러 너뱅이들에 가서 그 일을 거들고 품삯으로 김치거리를 얻어오라는 것이었다.

 “어머니, 저는 주인공이라서 절대로 빠지면 안 되요. 그 일은 다음 주부터 할게요. 제발 보내주세요.”

  아무리 애걸을 해도 어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만큼 어머니가 미웠던 적이 없었다. 팥쥐 엄마라고 해도 우리 어머니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호랑이보다 무섭기로 이름난 우리 어머니가 한 번 안 된다고 하셨으니 도저히 거역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코를 한 자나 빠뜨린 채 지게를 짊어지고 털레털레 집을 나섰다.
 그때였다. 위문단 아이들의 합창소리와 함께 군용 트럭이 나타나더니 우리 집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연극 담당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고 차를 세운 것이었다.

 “광석아, 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노? 니가 없으믄 우리 학교는 위문공연 못 하는 거 모르나?”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 행색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하신 선생님께서는 어머니를 불러내 설득하기 시작했다.

 “광석이가 오늘 일해서 얼마를 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가 그 돈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광석이 좀 보내주이소.”

 선생님이 무심코 던진 말은 오히려 어머니의 역정만 돋워놓고 말았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어머니는 생전 않던 눈물바람까지 하면서 속엣말을 털어놓으셨다.

 “전들 왜 제 자식을 안 보내고 싶겠습니까. 저렇게나 가고 싶어하는데……. 하지만 우리 집 형편이 그렇지 못한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런 어머니를 보는 내 가슴은 미어졌다.
 선생님은 그제야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태도를 바꾸어 사정하기 시작했다.

 “저기 트럭에 타고 있는 애들 좀 보이소. 광석이가 안 가면 저 애들도 모두 내려야 됩니더. 지금 누가 그 긴 대사를 외워서 광석이를 대신 하겠습니꺼.”

 “고마 데리고 가이소.”

  어머니 입에서 허락하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내 눈에선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에게서 다시 내게로 세습되어온 가난이 치떨리게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가난은 어린 나를 강하게 단련시켰다.
두드릴수록 점점 더 단단해지는 무쇠처럼

  가난이 싫었던 아버지는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 일본 큐슈 지방의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셨다. 어머니와 결혼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를 빼고는 잠시도 탄광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그것만이 가난을 벗어날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고 아버지가 사무직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우리 집 형편도 조금씩 나아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해방을 맞아 일본에서 돌아온 우리 가족은 다시 가난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었다. 아버지가 수년 간 뼈빠지게 일해서 모았던 일본 돈이 해방과 더불어 휴지조작으로 변해버린 탓이다. 외가가 있던 광양에 자리를 잡은 우리 가족은 당장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생각다 못한 나는 주차장을 돌아다니며 까치 담배를 팔았다. 광양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하동으로 옮겨오면서 담배 장사는 우리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 되었다. 아버지와 내가 담배를 말아놓으면 어머니가 돌 박이 동생을 업고 나가 팔아왔다. 하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아 광양에서부터 담배 장사로 이골이 난 내가 직접 목판을 메고 응원을 나가야 할 때도 많았다.

  아버지가 읍사무소에 임시 직원으로 채용되면서 담배 장사에서 놓여나나 했더니 이번엔 나무껍질 벗기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하동에는 지리산에서 베어낸 나무를 목재로 다듬어 부산으로 보내는 제재소가 많았다.
  운송 수단이 마땅치 않던 시절이라 베어낸 나무는 뗏목으로 엮어 섬진강을 통해 날라 오곤 했다.  뗏목이 도착하면 섬진강에 나가 나무껍질을 벗겨오는 게 나에게 주어진 새 임무였다.

  나무껍질 벗기기는 여름이면 그나마 견딜 만했지만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그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없었다. 겨우내 홑옷바람으로 나무껍질을 벗기러 다니다보면 추운 건 둘째치고 손발이 거북이 등딱지처럼 갈라져 너무 쓰라렸다.

  어린 나까지 나서서 이렇게 죽기 살기로 일을 하는데도 가난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은 월사금을 못 내 학교에서 쫓겨오기가 예사였고, 온 식구가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식량을 빌려오는 것도 내 역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모두가 어렵던 시절이라 선선히 식량을 내주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심지어는 끼니때가 되어도 밥 한술 안 주고 돌려보내는 친척들도 있었다.
  하루는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배가 너무 고파 무 장다리를 꺾어먹고 복통을 일으켜 하루 종일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적도 있었다.

  아이들이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어머니가 선생님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던 것도 모두 그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설움이 복받쳤던 것이다. 서러운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면서 도저히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말끔하게 차려입고 트럭에 올라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이 쑥 들어갔다.

 ‘그래, 지금은 이렇게 가난에 찌들어 있지만 진짜 시작은 바로 이제부터야.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스스로 살아갈 때는 오히려 너희들이 나를 부러워하게 만들 거야. 두고 봐!“

 가난은 그렇게 어린 나를 강하게 단련시켰다.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점점 더 단단해지는 무쇠처럼. 그 후 아버지가 주류 도매상을 시작하면서 우리 집도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도시의 고등학교로 유학 갈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영원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가난이 막을 내린 것이었다.

 

당당함과 고집스러움은
나의 삶을 지탱하는 희망의 재료였다

  돌이켜보면, 가난한 부모가 나에게 물려준 것은 절망과 고통만이 아니었다. 그 절망과 고통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랑과 용기도 함께 들어 있었다. 어두운 밤의 터널 끝에 매달려 있는 새벽의 밝은 빛, 절망의 용수철을 밟고 튀어 오르면 만나게 되는 투명한 희망. 그것으로 향하는 방법을 내게 잊지 않고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한 평 남짓한 친척집 웃방살이를 하면서도, 수업료가 몇 달째 밀려 집으로 쫓겨 온 아이들을 보면서도, 살을 에는 한겨울 새벽녘 강가에서 나무껍질을 벗겨 오는 코흘리개 남매를 보면서도 결코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신 적이 없다. 그 마음이 오죽했으랴만 당신이 흔들리면 어린 자식들에게 상처를 입힐까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를 채찍질하셨다.

  그랬던 어머니가 우리들 앞에서, 그것도 목청 놓아 대성통곡한 일이 딱 한번 있었다. 6・25사변이 일어난 직후였다. 북한군이 물밀듯이 쳐내려오자 우리 가족도 피난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피난 갔다 다시 돌아와 보니 폭격을 맞았는지 집이 다 불타고 까만 재만 남아있었다. 번듯한 집도 아니고 그저 오막살이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터만 남은 채 황량하게 드러누운 잿더미가 우리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때 어머니는 울부짖으셨다.

 “집 탄 거는 하나도 안 아깝다. 우리 광석이랑 어린 점이가 신 새벽마다 얼음장같은 강물 헤치고 바리바리 해다 놓은 나무껍데기가 홀랑 타버렸으니, 이를 우짤끼고! 내, 그 어린것들 새벽마다 내보내면서 얼매나 가슴 아렸는데…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나무껍데기 쌓아놓을 때마다 가슴으로 얼매나 울었는데….”

  생전 처음 속내를 드러내며 꺼억꺼억 우시면서 “집 탄 거는 하나도 안 아깝다. 집 탄 거는 하나도 안 아까워…”를 몇 번이고 곱씹으셨다. 늘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의 그 통곡 속에서 나는 끝없는 사랑의 깊이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는 너무도 원망스러웠고 또 한때는 몹시도 절망스러웠던 어머니의 당당함이 나에겐 곧 희망과 꿈의 재료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당당함이 나에게 강인함을 심어주었다면 가난한 나의 아버지는 절약이란 게 뭔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가난하게 살 때야 두말할 것도 없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로와졌을 때도 아버지는 절대로 허투루 돈을 쓰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실 때도 꼭 제일 싼 담배를 샀고, 그것도 면도칼로 두 동강이를 내서 피우곤 하셨다. 아버지가 피운 재떨이엔 꽁초가 남아 있는 법이 없었다. 남은 담배가루는 전부 모았다가 파이프에 넣고는 끝까지 태우셨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중학교를 마치고 부산공고 기계과를 다닐 때다. 첫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오니 어머니께서 큰아들 왔다며 모처럼 소고기국을 밥상에 올리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대뜸 호통을 치시는 것이었다.

“왜 이리 풍창거리지? 소고기국이 맛있는 거 누군들 모르나. 하지만 우리 광석이가 이제 1학년을 반도 못 마쳤어. 그런데 이렇게 풍창거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부러 3년은 좀 참아야지. 애가 졸업한 뒤 지가 월급 탄 돈으로 사온 소고기로 그때 맛있게 먹으란 말이야. 그때까지 참아야지.”

 그러고는 국그릇을 밥상 아래로 싹 내려놓으셨다. 얼핏 든 생각은, 참 너무 하신다였다.  이젠 우리도 살만큼 사는데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그럼에도 아버지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분의 변함 없는 생활 태도 때문이었다. 가난할 때나 풍족할 때나 한결같았다.

  가난하다고 해서 더 구차해지지도 않았고, 조금 풍족해졌다고 해서 더 흥청거리지도 않으셨다. 돌아가시던 그 날까지 늘 꽁초가 남아 있지 않았던 아버지의 재떨이.
거기서 나는 삶의 고집스러움을 배울 수 있었다.

 

>>베품의 부자가 되어라

   세상에 우리 어머니처럼 무섭고 엄격한 분이 또 있을까. 한번 안 된다고 한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셨다. 언젠가 어렸을 적에 뭔가를 아주 크게 잘못해서 어머니께 된통 혼이 났던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는 엄동설한 한겨울 밤에 옷을 몽땅 벗겨 나를 문 밖으로 쫓아냈다. 너무나 추었던 나는 한동안 벌벌 떨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코 방문을 열지 않으셨다. 지금 새삼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엄격함이 나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도 어머니는 살림에 있어서만큼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깍쟁이고 구두쇠였다.  집안 살림이 어려웠으니 당연히 더 그러셨겠지만, 무엇 하나 허투루 쓰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머니가 어느 순간부터 바뀌기 시작하였다. 아마 집안 형편도 웬만큼 살만해지고 우리 자식들이 공부를 마치고 다들 제갈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던 듯싶다.  주머니에 꽁꽁 묻어두었던 쌈지돈을 풀어 가난한 사람,어려운 일에 아낌없이 쓰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적에 우리는 남은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자식들이 골고루 나눠 가지는 대신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어머니께 드리기로 결정했다. 어머니 명의의 통장을 만들어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원하시는 대로 다 쓰시고 가시도록 하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돈을 몽땅 남을 위해 쓰셨다. 평소 다니시던 절에 다리가 끊어졌다고 하면 새로 다리를 놓아주었고, 집안이 가난해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겐 선뜻 장학금을 내 놓으셨다.

   그 어머니께서 항상 나에게 해 주셨던 말이 있다. 요새도 문득 문득 생각나곤 한다.
  "윗사람은 베풀어야 된다. 그렇게 안하면 윗사람이 될 자격이없는 거다. 그리고 남에게 뭔가를 베풀 때는 결코 되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그건 진심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다. 내 손에서 떠난 것은 이미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해라. 다시 거둬들일 마음일랑 절대 품지 말아라."

   어머니는 나에게 진정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 또 베푸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가르쳐주셨던 분이다. <다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