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동학군 진주지역 장악


  하동을 점령한 영대접주 김인배는 9월 10일 경부터 전라도의 일부 병력과 하동지역 동학군을 진주 쪽으로 이동했다. 일부 병력은 곤양을 거쳐 진주로, 일부병력은 사천, 남해, 고성 등지를 거쳐 이 지방 동학군을 지원하면서 진주로 들어갔다. 진주성 남서부의 넓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행동했다. ‘규장각장서’ 중의 하나인 경상감사 조병호의 狀啓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慶尙監司 狀啓

  남해현령 李圭豊의 보고에 의하면 “이달 11일에 湖南東道 19명이 본 현에 쳐들어와 앉아 관리를 협박 감옥에 가둔 비류 16명을 임의로 석방하고 읍폐를 바르게 한다며 난류를 모아 마을로 보내니 작폐가 대단했다. 16일에 이르러 그들 2백명은 진주에서 창의한다며 곤양등지로 갔다.”고 했다.


  泗川縣 三公의 보고에 의하면 “이 달 13일에 동도 수십 명이 조사한다며 이방을 잡아 갔으며 수백 명의 무리는 남문에서 총을 쏘며 곧 바로 동헌으로 들어오니 본관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군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했다. 본관이 여러모로 타이르자 무기는 반납했으나 함부로 전재를 뒤져내고 억지로 錢票를 받아 갔다.

  17일에 그들의 접소로부터 사천 원님은 嶺 湖에서 알아주는 良史라 하며 받아갔던 錢票 紙를 돌려보냈다. 18일에는 다시 호남 동학도가 쳐들어와 자청해서 유숙하고 19일에 남해 쪽으로 떠나갔다. 20일에는 각처 동학도 8백여 명이 총칼을 갖고 읍내로 들어와 관리만 보면 칼을 뽑아 들고 공갈 협박했다.

  공해에서 유숙한 후 하사(下吏)인 黃鍾羽, 黃台淵의 집에 불을 지르고 어지간한 什物은 모두 가져갔으며 마을의 소와 말과 衣服 産物들도 마음대로 탈취해 갔다. 22일에는 고성 쪽으로 갔다.” 고 했다.


  곤양군수 宋徵老의 보고에 의하면 “15일 하동의 동학군 수천 명이 본군 多率寺에 모였다 하며, 광양, 순천 동학도 수천 명도 깃발을 날리며 각을 불고 총을 쏘고 함성을 지르며 성내로 들어와 혹은 유숙하고 혹은 저녁밥을 갖고 가면서 말하기를 진주로 가던 차에 들렸다 한다. 이들은 방금 합세하여 진주 접경 浣沙를 지나갔다 한다. 본 군에서 장정들이 연습하던 조총 20자루도 협탈해 갔다.”고 했다.


  固城府使 申慶均의 보고에 의하면 “관장이 영문에 가서 자리를 비운사이에 총칼을 가진 6백여 명의 동학도가 들어와 찬고를 부수고 沁營에 보낼 쌀 수십 석을 가져다 근처 마을에서 밥을 지어먹고 밤낮으로 총을 쏘며 불량배를 유인하고 부유층을 잡아다 토색질을 하며 떠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晉州 牧使 류 석의 보고에 의하면 “ 本州 代如村 民人들이 矯幣하자는 내용이 담긴 통문을 각 면에 돌려 당을 모아 읍으로 들어왔다. 효휴 했으나 듣지 않고 장터에는 큰 장막을 쳤으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동헌에 난입하여 갖은 말로 위협하여 옥문을 때려 부수고 죄수를 멋대로 방면했다. 천백의 무리들은 옥천사(고성군 개천면 예성리 소재)로 가서 불당과 僧舍에 불을 지르니 그들의 행동거지를 헤아리기 어렵다 했으며, 17일에는 하동으로부터 수천 명 동학도가 본주에 들어오자 병사와 목사는 성문 밖에 나가 일변 방어하며 일변 타일렀으나 도당들은 승세를 몰아 난입하여 여러 공해에다 도소를 설치했다.”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하동을 점령했던 동학군들은 일변 진주로 진출하는 동시에 일부는 인근 군, 현으로 출동 동학군의 봉기를 지원하면서 진주로 들어갔다.

  진주 대여촌 동학도들은 자발적으로 기포하여 진주에 들어가 시장에 장막을 치고 점거했다가 옥천사까지 출동해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경국 진주성을 중심으로 하여 북서쪽 지역의 동학도들은 잣실에 집결하여 그 일대를 장악했으며, 진주성과 그 남서쪽에 있던 동학도와 하동지방 동학도들은 그 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진주지역을 장악한 동학군은 편제를 재조정한 다음 각지로 나가 악질 부호 배와 향반, 그리고 관리배들의 응징에 들어갔다. 병사 민준호의 묵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일본군도 이점을 통탄하고 민준호 병사를 지체 없이 몰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동학군의 병력은 都統領 鄭運昇이 수백 명을 거느렸고, 中軍長은 4~5백 명을, 하동포는 7~8백 명, 우선봉은 5~6백 명을 거느렸다. 그리고 후군장은 4~5백 명을, 都統察은 백여 명을, 이 밖에도 丹城包, 南原包, 涉川包, 上平包, 吾山包, 求禮包 등도 각각 수백 명씩 이끌고 참가하여 적어도 5천명은 넘었다. 이때 가담했던 동학도들의 사회적 지위는 지배층에 시달리고 소외당한 하층 민중들이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모두 상인, 천인, 사노, 관속, 그리고 패망한 반족 부랑자”라고 했다.


  9월 18일(양 10월 16일)에는 영호대접주 김인배마저 천여 명을 이끌고 주성에 들어오니 동학군의 기세는 더욱 충천했다. 이를 환영하기 위해 진주성 안에서는 동라와 북을 두들겼고, 포성은 우레처럼 산천을 진동시켰으며, 날카로운 창검은 즐비하게 햇빛을 받아 번득거렸다. 그리고 陣前에는 붉은 대형 깃발을 내걸었으니 輔國安民이란 네 글자가 너무나 뚜렸했다.


  동학군의 위세에 눌린 이 지역 관속들은 모두 손을 놓아 행정은 마비 상태에 빠졌다. 더욱이 많은 관속들이 도망쳐 公廨는 텅텅 비어 있었다. 이지경이 되자 누구하나 동학군에 항거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동학군은 장기 주둔에서 오는 숙식 문제와 민심을 고려하여 이튿날인 19일부터 연고지 별로 분산 철수하기로 했다. 주로 덕산, 삼장, 시천, 시월, 백곡, 청암, 양보, 남강 남동쪽에 있는 召村驛과 大如村(진주시 금산면 용아리 일대), 龍尋洞에는 중장군이 이끄는 동학군이 주둔했었다.

  양곡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민폐가 없지 않았으나 악질 향반과 관리들을 응징하자 민중들은 동학에 가담하는 이가 늘어났다. 다음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