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관군과 일본군의 출동


  경상도 남서부 일대가 동학군에게 점거됐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9월 25일자로 대구판관 池錫永을 討浦使로 差下하여 현지로 파견 했다.

  그는 26일(양10월 24일)에 대구를 출발, 28일에 부산에 도착, 監理署와 일본 영사관을 만난 후 29일에 배편으로 통영에 상륙했다. 여기서 砲軍100명과 군관 4명 즉 104명을 조발한 다음 10월 2일에 高城에 당도하여 일본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부산 영사관은 하동, 진주지역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감리서의 主事와 순사 4명으로 하는 정찰대를 만들어 9월 14일(양 10월 12일)에 현지로 떠나도록 했다. 9월 24일(양10월 22일) 일본군 南部兵站監에서는 鈴木(스스끼)대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 약 200명을 급파했다. 이들은 10월 5일(양 11월 2일)고성에 도착, 대기하고 있던 포토사 지석영 군과 합류했다. 고성을 떠난 한일 양군은 진주 舊海倉을 거쳐 7일에 곤양군으로 들어왔다. 곤양군에 유진한 것은 성곽이 있고, 하동, 진주 그리고 사천과 덕산 등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해창에서 잡아온 동학군을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8일 정오에 성내 북쪽 장터에 군중을 강제로 모이게 하고 동학군 접주 林石俊을 효수했으며 17명을 취조한 후에 처분했다.


  동학군과 첫 본째 전투는 하동군 진교면 안심리 뒷산인 金鰲山 줄기에서 접전했다. 9일에 동학군이 집결해 있음을 탐문한 일본군은 10일(양 11월 6일) 새벽부터 공격에 들어갔다. 접주 여장협이 이끄는 동학군은 일본군의 하동진출을 막기 위해 진다리(辰橋)에서 서쪽 4Km 떨어져 있는 안심리와 古下里 일대에 수백 명의 동학군을 배치하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5명을 사살하고 28명을 생포했다 한다.

[경상감사 장계]에는 “9일 밤에 동도 기백명이 하동 안심동 뒷 골짜기 금오산 상에 둔취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밤중이라 공격하지 못하고 10일 아침에 군관 신철회, 정인식이 이끄는 본군과 일본군이 같이 떠나 접전을 벌였다. 이전투에서 동학군 8명이 전사했고 관군에게 21명이, 일병에게 9명이 체포당했다. 총에 맞고 도망치다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고 했다.


  지방민의 증언에 의하면 “동학군은 진교, 양보, 고전면, 일대에 퍼져 있었으며 안심리 뒷산 시루봉에는 2백명 정도가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 안심리의 호수는 70여 호였으며 이곳 동학군도 참가했으나 주로 양보면 동학도가 많았다. 시루봉에는 돌로 성을 쌓았고 나팔과 징과 북을 울리며 깃발을 날리니 10리 밖에서도 듣고 볼 수 있는 장관을 이루었다. 그러나 동학군의 무기는 화승총과 활과 돌맹이로 일본군과 상대가 안됐다. 일본군은 산을 완전히 포위 하고 신안, 성평리 그리고 시루봉 동쪽 등 세 곳에서 공격해 올라갔다. 반나절 만에 동학군은 무너져 고전면 배들이 쪽으로 도주했고, 여기서도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끝내 패주하고 말았다.”고 했다.


  두 번째 전투는 10월10일 같으날 진주 남강쪽 上坪에서 벌어졌다. 전투 규모와 결과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지난 7일(음 10월 10일)상평촌 공격 때 관군 10명을 인솔했는데 아병에게 오하려 방해가 됐다.”는 짤막한 기록이 보인다.

  손은석 대접주 등은  일본군의 출동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矢川, 柏谷, 松村, 集賢山, 頂亭, 院本亭, 水谷, 上坪 등에 동학군들이 집결해 있었다. 전라도 동학군들도 이 전투에 참전 했었다.


  세 번째의 전투는 10월 14일(양11월 11일) 하동 옥종면 북방리 신촌 고성산 일대에서 벌어졌다. 이날의 전투는 동학군과 일본군(관군없이)이 최초로 접전한 결전이기도 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이날 새벽 진주를 출발한 일본군이 수곡에 도착한 오전 8시부터 공방전이 벌어져 11시까지 3시간 걸쳐 전개됐다. 그러나 수천 명의 동학군은 화력의 열세로 180명 정도 불과한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전후 관계의 경위는 [경상감사장계]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어제 11일(음 10월 14일) 오전 4시 진주를 출발하여 서쪽 30리 남짓한 곳에 있는 水谷村에 모여 있는 동학당을 공격하려고 그 마을에 갔더니, 동학당이 산과 들에 가득차서 대략 1천4~5백 명(그 지방 사람의 말로는 4~5천명이라 함)이 있었다. 8시 5분 그들이 사격해 오므로 응전했다.

  점차 攻進하여 가는데, 그들의 절반은 산 북쪽으로 퇴거했다. 그래서 먼저 산위에 있는 적을 공격했으나, 산정의 疊壁에 의지해서 완강하게 방어했으며 또 북쪽으로 퇴거하였던 적도 다시 나와 우리의 우측을 공격했다. 10시15분께 1개 소대를 가지고 산위의 성벽으로 돌격하여 이를 점령했다. 이때 우리 측 부상자는 3명이었다. 다른 1개 소대는 계속 우측의 적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遠田과 中村으로 하여금 1개 소대를 인솔, 좌측으로 적을 驅逐하고 그곳에 있는 적을 격파하고 드디어 적의 배후에 이르러 적군을 격멸 소탕했다. 오전 11시 대오를 수습했다. 적은 서북쪽 德山(智異山)쪽을 행해 퇴각하므로 계속 이를 추적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慶尙監司狀啓

  진주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동학도 기백명이 방금  본 주 矢川 水谷 양면에 모여 있다고 한다. 고로 12일(음) 새벽에 진주로 행군했다. 파송했던 將史의 보고에 따르면 矢川의 동학도는 이미 해산했고, 진주에서 50리 떨어진 수곡면에는 수천 동학도가 점점 모여들어 성을 함락시키는 것도 朝暮에 달렸다 한다. 本 軍은 진주성을 지키고 있었고 일병은 진주에서 출동, 접전하고 있었다. 동학도의 포살자는 185명이고 부상당하여 도망친 수는 헤아리기 어렵다.


  곤양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8일(음 10월 11일)에 진주목사의 보고를 받자 9일 새벽에 출동, 수곡촌으로 직행했다. 이곳에서 진주가 위태롭다는 討浦使 지석영의 급보를 받고 다시 진주로 들어갔다. 이튿날 10일(음 10월 13일)에 鈴木대위와 遠田대위는 동학도가 모여 있다는 松寸과 集賢山쪽으로 각각 출동했다. 그러나 이미 동학군은 단성지방으로 철수했기 때문에 진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사실 전 동학군은 10월 13일(양 11월 13일)에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은밀히 수곡면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4~5천에 이르는 동학군은 지금의 하동군 玉宗面 北芳里와 대방리 일대의 들판과 고성산 일대에 유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은 10월 14일(양11월 11일) 새벽 4시에 진주에서 수곡으로 출동했다. 상오 7시경에 德川江 동쪽에 당도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동학군과 대치하게 됐다.

  8시가 되자 일본군이 강을 건너자 전방에 출동했던 동학군이 포문을 열어 전투는 시작됐다. 대포 2문으로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소리만 오란 했을 뿐 쓸모없는 쇠붙이에 지나지 않았다. 전방에서 싸우던 동학군은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밀려 얼마 후에는 후퇴하기 시작, 주력 부대가 高城山으로 합류했다. 이산은 해발 185m의 야산이지만 삼면이 들판이고 써쪽만 낮은 능선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정상에는 자연암석이 성곽처럼 둘려 쌓여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동학군과 일본군은 이 정상을 놓고 2시간이나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동학군은 “ 산꼭대기 疊壁에 의지해서 완강하게 방어했다.”는 일본 기록과 같이 정상에 1백보 정도의 둘레에 돌 성을 쌓아 엄폐물을 만들어 놓고 올라오는 일본군을 저지했다. 동학군은 이고지를 내주지 않기 위해 사수하다가 많은 전사자를 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동학군은 수백 명에 으르는데 일본 측 기록에는 185명이라 했다. “天道敎會史草稿”에는 3백여 명이라 했고,[오하기문]에는 “4백여 급을 참했다.”고 했다.

  그리고 지방 사람들은 수백 명이라 했으며 柏谷誌에는 “죽은자가 5~6백인이라”했다.

  [천도교 백년 약사]에는 진주접주 全熙淳의 처험담과 전사자 명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全熙淳 體驗記

  전희순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차에 소년 동학군 金龍玉의 구원을 받아 徐弘武의 집으로 갔다. 늙은 할머니 혼자만 있었는데 피 묻은 옷을 바꿔 입고 3일간 치료, 겨우 생명을 보전했다.


  [鼓聲山 戰死者]

  泗川 首接主 金成龍, 大正 崔璣鉉, 中正 姜五元, 昆陽 大正 崔夢元, 金敬連, 崔聖俊, 韓明善, 金命完, 中正 姜夢生, 金旦柱, 趙性仁, 執綱 崔鶴權, 申寬俊, 書司 金華俊 등이고,


  [昆明誌 戰死者名單]은

  강재국(마곡리), 朴小金(작팔리), 金德永(力士) 등으로 되어있다.


  고성산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은 덕산 쪽으로 후퇴했다. 이때 吾山接 동학군은 명석면 오산리에서 일본군과 한차례 전투를 벌였다. 崔三根의 증언에 의하면 “黙谷里 뒷산에 수백 명 동학군이 숨어 있다가 추격해오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동학군이 밀려 劒舞山(해발 280m)으로 후퇴하자 뒤에서 총격을 가해 많은 전사자가 났다.”고 한다.

  일단 진주로 철수한 일본군은 10월 16일(양 11월 13일)에 다시 덕산 방면으로 출동시켜 동학군 토벌에 나섰다. 丹溪 金麟燮은 [백곡지]에서 “나머지 무리들이 흩어지니 10월 10일 이었으며, 2~3일 후에 왜병 4백명이 동학도를 추격하기 위해 잣실 장터에 와서 유숙했다.” 한다. 덕산 쪽으로 후퇴했던 동학군을 추격하여 10월 17일(양 11월 14일)에 하동 쪽으로 출동했다. 지석영이 이끄는 관구은 동학군을 추격하여 10월 17일(양 11월 14일)에 하동 쪽으로 출동했다.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은 黃土峙까지 갔다가 일군을 만나지 못해 진주로 되돌아왔다. 21일에 하동 섬진나루에서 하동 渴鹿峙(河東郡史, 갈마재)에 이르렀다.

  여기서 일본군에 밀려 후퇴하던 동학군 기백명과 만났다. 혹은 배로 섬진강을 건너가고 혹은 산으로 도주하는 동학군을 추격하여 11명을 사살하고, 17명을 생포했으며 총검 등도 많이 노획했다.

  

 [오하기문]에도 지석영은 하동 豆峙(河東郡史, 광평리에 있다) 나루에서 동학군과 싸워 이를 격파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관군과 별도로 20일(양 11월 17일)에 하동 지역에 진출했다. 때마침 섬진나루에서 동학군의 공격을 받고 전투를 벌였으며 22일에도 갈마재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날 동학군은 선제공격을 감행했으나 오히려 30여명의 전사자만 내고 광양쪽으로 멀리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23일(양 11월 20일)에는 흩어진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관군과 일군은 마을을 탐색했으나 동학군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하동부사 洪澤厚(1894. 9. 23~1896. 3. 10)는 지석영 토포사를 따라 내려와 부임했지만 관군과 일군이 철수하자 언제 동학도가 재침할지 모른다며 상주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래서 우병사 휘하 군교 朴枓珏이 거느린 1백명 관군을 잔류시키고 포토사 부대는 26일 창원 마산포로 철수, 부산행 기선에 승선했다. 하동부사 홍택후는 동학도에게 매우 너그럽게 대하는 정책을 썼다. 그 후 별다른 충돌없이 지냈으며 김인배로부터 칭송까지 받았다. 한 달 후인 11월 28일에는 영우 13읍 助防將으로 임명 됐다.  다음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