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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인배 대접주 하동 공격 진주지역 동학도들은 관과 큰 마찰 없이 활동할 수 있었으나 하동지역은 사정이 달랐다. 관의 탄압으로 활동이 부진했으며 전라도와 섬진강을 사이에 둔 이곳 동학도들은 전라도 동학군의 활동상황을 불때마다 어떤 대책이 있어야겠다고 절감했다. 하동 지역은 동학의 연원으로 불 때 전라도 광양, 순천 계통과 하나였다.
하동군과 인접한 전라도 광양군과 순천부의 동학 조직은 대접주 金仁培와 수접주 劉夏德이 관할하고 있었다. 때 마침 6월에 김인배가 영호포 대접주로 내려와 순천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활동하고 있었다. 하동 동학도 들이 지원을 요청해 오자 그는 대책을 숙의한 끝에 우선 같은 연원(包)에 속하는 星浮驛접주 박정주로 하여금 1백 명의 장정을 선발하여 7월 7일(양 8월 8일)에 하동 광평으로 건너가게 했다. 박정주는 접주 여장협과 협력하여 嶺南義所 라는 간판을 내걸었으며 청년들을 모아 활동을 개시했다.
하동부사 李彩淵은 크게 놀라 화개면에 있는 민포대장 金振玉을 불러 상의 하였다. 전에 훈련원 주부와 五衛將을 지낸 인물이라 박살을 내야 한다며 격분했다. 그러나 보복을 두려워한 부사는 “살상하지 말고 광양으로 쫓아 버리자”고 했다. 김진옥은 곧 민포군을 출동시켜 동학도와 그 가족을 광양으로 추방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8월이 되자 전 동학군은 항일 투쟁의 준비를 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으며 순천, 광양에서도 병력을 모아 전투부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나서 ‘김인배’ 대접주와 ‘유하덕’ 수접주는 경상도 서부지역 동학도들의 지원요청을 받아 들이기로하고 출동하기에 이르렀다. 8월 25일 경에 3천여 동학군을 섬진강과 접해 있는 多鴨面(道士里)으로 이동 시켰다.
전라도 동학군이 진격해 오다는 사실을 사전에 탐지한 ‘이채연’ 부사는 몹시 당황하여 원병을 요청한다는 경상감사가 있는 대구로 가버렸고, 민포대장 ‘긴진옥’은 통영으로 달려가 지원을 요청, 12문의 大宛咆를 끌고 왔다. 그리고 岳陽, 花開, 赤良, 河東邑에서 수천명의 민명을 차출한 다음 병력의 대부분과 대포는 뒷산 안장봉에 배치했으며, 일부병력만 하동읍 북쪽에 있는 해량포구에 일대에 포진시켰다. 8월 28일에 이르자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 동학군 대부대와 하동 민포군 대부대는 북과 꽹과리와 포성을 울리며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동학군의 공격은 9월1일 새벽에 시작됐다. 주력부대는 하동읍 북서쪽 5리 지점인 蟾津館 나루타를 건너 “만지등”으로 상륙해 왔다. 곧 花心里와 豆谷里 일대를 장악했다. 나머지 한부대는 광양 津月面 望德에서 선단을 구성,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하동읍 남쪽에 상륙, 余章協 동학군과 합류하여 공격해 들어오게 했다.
짚둥우리(장태)를 굴리며 해량쪽으로 공격해 내려오던 동학군과 해량에 진을 치고 있던 민포군은 얼마간 교전을 벌였으나 민포군은 동학군의 엄청난 수에 못 이겨 철수해 버렸다. 한편 남쪽에서 공격해 오던 망덕과 하동 동학군들은 무난히 읍 남쪽을 장악했다. 화심리와 두곡리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군 주력부대는 점심 후 하동 뒷산 안장봉을 공격했다. 예상외로 산이 가파라 중턱까지 올라갔을 때 날이 어두워 일단 철수했다. 첫째 날의 전투는 동학군이 읍 주변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여 민포군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이날 동학군에 저항하던 민포군은 대포를 많이 갖고 있었으나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기술 부족으로 발사가 더디고 포탄은 하늘로 날아가 버리니 동학군에게 위협을 주지 못했다. 날아오는 포탄을 동학군은 잽싸게 피하니 대완포는 무용지물이 됐다.
9월 2일 동학군의 총공격은 새벽부터 시작하니 민포군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저녁 때에 주봉을 점령당하고 날이 어두워진 다음 읍으로 패주했다. 밤이라 관군과 민포군을 더는 추격하지 못하고 병력을 거두어 철수했다. [오하기문]에는 “2일 저녁 때 적도들이 사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육박해 올라왔다. 밤이 되자 추격이 불가능하여 병력을 철수, 이튿날 날이 밝자 읍내에 들어왔다.”고 했다.
[河東郡史]에는 촌노들의 증언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9월 2일 동도 두목 ‘박정주’가 동학군 1만여명을 이끌고 본격적인 도강 작전을 개시했다. 이때 鞍峯(하동읍사무소 뒷산)에는 ‘김진옥’ 등 수천 명의 민병이 大碗口 등 무기를 갖춘 관군과 함께 진을 있었다. 전라도 동학군은 蟾津館에서 주력부대가 강을 건너 晩池嶝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부는 섬진강에서 큰 짚동을 밀고 그 뒤에 숨어 강 모래사장으로 하여 解良 건너편까지 내려왔다. 만지등 일대의 동학군은 余章協이 인솔하는 1천여 명의 동도와 합세하여 안봉으로 차츰차츰 다가왔다. 그런데 이 때 안봉의 관군측에서 대완구를 쏠수 있다고 하며 막대기 끝에다 기름을 묻혀 대완구 구멍에 넣고 불을 붙이자 대포알이 섬진강 강물에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던 동학군은 대완구의 위력이 없음을 짐작하고 4일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날 쌍방이 치열한 싸움 끝에 민포군 대장 ‘金津玉’, 진사 ‘金瑩秀’, 수리 鄭燦柱 이하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했고 다음날 백의 ‘강윤수’ 등과 남은 병사들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리하여 안봉에 있던 민포군 및 관군이 거의 전멸되자 5일 오후 6시경에 읍내가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됐다. 읍내로 들어온 동학군은 관가와 민가에 방화하여 700호 이상이 불타 전읍내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오하기문’에는 “이튿날 읍에 들어간 동학군은 만가 10여 채를 소각하고 나서 부중에 도소를 설치한 후 마을로 흩어져 약탈했다. 화개동에 올라가 민포 수창자의 집에 불을 지르니 5백여 채나 됐으며, 전후 10여 인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악양과 적량에 가서도 민포군을 색출, 많은 집에 불을 질렀다.
日省錄에는 이에 대해 “하동전역이 소탕됐다”고만 기록했다. 그리고 ‘하동군사’에는 “하동을 점령한 전라도 동학군은 민포의 발상지인 화개에 침입하여 塔里로부터 法下里일대의 가옥을 모조리 불사르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이어서 악양과 적량에 들어가 민포군의 집을 낱낱이 찾아내어 불질러 버렸다”고 했다.
‘하동군사’에서 하동읍에 들어가 민가 700호에 불 질렀다 한 것은 과장된 기록이다. ‘오하기문’에는 “부중에 들어가 민포군을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하면서 민가 10여 채에 불 질렀다.”고 했다. 화개, 악양, 적량에 들어가 민포 首唱者를 색출하여 그 집에 불 지른 것은 사실인지 몰라도 강제로 동원된 민포군 까지 보복했다는 것은 납득이 안 간다.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