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진주 동학군 기포


     순천, 광양의 동학군이 하동에 출동할 8월 하순경에 진주지역 동학군들도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곳의 동학군 동원 방법은 특이하며 동학군 외에도 일반 민중들을 강제로 동원한 것이다. <일본공사관 기록>에 의하면 9월 2일(음)에 73개의 里任에게 통문을 보내 지식인과 장정 13명씩 동원하여 동학도소가 있는 平居 廣灘津으로 모이라 했다. 마치 관에서 동원령을 내리듯 통문을 보냈다. 당시 경상 우병사 민준호와 동학군의 관계를 추론해 보면 가능했던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안위는 백성의 생사를 좌우하며 백성의 생사는 국가의 안위에 달렸으니 어찌 보국안민할 방도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앞서 이런 뜻을 적어 73개 面里首에게 통문을 돌려 보게 했으나 없어지기도 하고 전해지기도 하여 이점이 걱정된다. 우리 진주 민들은 거개가 흩어져 있어 별로 鎭恤해 나아갈 방도가 없으니 어떻게 支保할 대책을 세울 것인가. 이달 초팔일 오전에 각리에서는 13명씩 모두들 평거 광탄진두로 와서 회합을 갖고 의논 처결토록 하면 천만 다행이겠다.


  -갑오 구월 초이일-

  (1) 이장은 이별로 사리에 밝은 사람 2명과 果遊郡 10명씩을 대동하고 죽립을 쓰고 와 대기할 것.

  (2) 만일 불참한 면이 있으면 마땅히 조치한다.

  (3) 이에서 아래와 같이 삼일분의 식량은 제각기 갖고 와서 기다릴 것.

  (4) 시각을 어기지 말고 와서 대기할 것


  9월 8일 광탄진 대회에 얼마나 모였는지는 모르나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물리치고자 결의까지 했다. 이튿날 9월 10일에 재빨리 동리의 크고 작음에 따라 50명 이내 10명 이상의 인원을 배정하여 11일에 복흥 대우치로 모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마치 국가 동원령처럼 里任에게 병력차출을 통고한 것이다. 진주지역 동학도 들이 이처럼 대담한 행동으로 나온 것은 閔俊鎬병사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충경대도소’가 반포한 다음의 “東學徒掛榜”을 살펴보면 동학도와 민준호 사이에는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東學徒掛榜

 각 里任이나 동장은 사통이 도착하는 대로 펴보고 차질이 없도록 하라. 대동은 50명, 중동은 30명, 소동은 20명씩 내일 오전에 복흥 대우치로 모이게 하라. 만일 불참하거나 지체하면 이임과 동장의  집부터 소탕하고 동리도 이처럼 할 것임을 알리니 알아서 하라. 이 통문은 一里에서 곧 二里로 빨리 전하도록 하라. 아! 우리 중민들은 14~5년의 흉년을 겨우 지내왔으니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한 77일 간의 大旱중임에도 온갖 피해가 겹쳐 일어났다. 아! 우리 중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갑오 9월 초 10일-


  復興 大牛峙(대웃재)는 산청군 단성면 당상리의 “시랑골” 마을에서 진주시 수곡면 紫梅里 대우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가 너무도 유명하여 자매리 일대를 “대웃재”라 한다. 起包 장소를 잣실 대웃재로 정하게 된 것은 三壯, 德山, 丹城과 인접해 있으며 지주지역 동학군이 모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학도 들이 살고 있어 숙식이 또한 편리한 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방은 吾山接의 본거지이며 孫殷錫 대접주의 휘하에 있는 접이다. 이 손은석 휘하의 진주지역 각 포에서는 모두 동원됐을 것이다. [주한일본 공사관 기록]에도 “영남 각 읍의 동비들은 모두 덕산을 소굴로 삼았다.” 고 했다. 덕산은 바로 손은석의 본거지이며 진주지역 동학도소가 있는 곳이다.

  이에 앞서 忠慶大都所 명의로 9월 10일자에 장문의 방을 만들어 돌렸다. 충경 대도소라면 任奎鎬 대접주의 忠慶包 도소를 말한다. 임규호는 청주군 옥산 사람으로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일부, 그리고 경상도 일부에 포조직을 갖고 있었다. 東學道掛榜 전문은 다음과 같다.


  嶺南右道 各邑 各村 大小 士民들에게

  우리 조선은 비록 동방에 있는 작은 나라이나 예부터 소중와라 칭해 왔다. 삼천리가 예의지오, 풍부한 강토이다. 근년에 이르자 국운이 부색하고 인도가 퇴폐하여 심지어 간신배가 왜놈 오랑캐를 불러들여 이 나라를 침범케 하니, 북 삼도는 오랑캐의 땅이 됐고, 남쪽 오도는 왜놈이 가득하다. 그들은 마음대로 궁중에서 병기를 휘두르니 우리의 병기보다 많다.

  아! 우리 동도의 의사들이여! 어찌 피 끓는 분발심이 없으랴.

  옛날 기유 년에 일어났던 삼포의 난과 임진년에 일어났던 팔로의 변란 때 칼에 맞아 돌아가신 조상이며, 총에 맞아 돌아가신 어버이가 없겠는가. 이때야 말로 복수하여 나라에 보답할 기회이다.

  하늘이 도인을 내리어 道로 가르쳐 억천만 인의 생각을 한사람의 마음이 되게 하였도다. 한 사람이 깃발을 올리면 萬人이 호응하고 비록 道外의 농부나 시골 선비라도 어찌 분발심이 없겠는가.

  후생인 우리 도인들은 멸왜와 초멸의 뜻으로 같이 죽기를 명세하고 분찰하여 진주에서 대회를 가졌도다. 이제 진주를 초멸코자 하는 것은 33읍의 대영문이며 삼남의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응당 대임을 맡아야 할 분으로 영우의 사민들은 바라고 있다. 부임한 지 일 년도 못돼 왜놈에 약조하고 선임 받은 신병사가 머지않아 부임한다는 말이 들린다. 이제 멸왜 추멸 하려는 동학도인은 어찌 그를 부임하게 하겠는가. 비록 지금의 병사가 민씨족이긴 하나 “童卓 이 大逆으로 漢을 도왔으나 童丞이 宗彭을 도운 것과 같고 王敦이 찬탈을 꾀하여 진을 도왔으나 王道修가 江右측을 보존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경륜대제인 민공을 1년만에 자리를 옮기고 떠나도록 하니, 왜놈을 끼고 농간하였음이니 어찌 꺼리고 두렵지 않으랴. 그런즉 구 병사는 임기를 마치도록 하기를 원하며 신 병사는 우리지역에 못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통문을 띄워 진주에서 모임을 가지니 소민들은 경동하지 말고 종전처럼 하라. 만일 의로운 일을 멸시하는 자는 병력으로 도륙할 것이다. 비록 도 외인이라도 의분과 기모를 가진 사람은 특별히 상을 줄 것이다. 이점을 유념하여 알아서 칭하고 사사로이 토색질하는 자에 대해서도 소를 내어주기 바란다.


  동학군은 이 私通에서 경상 우병사 민준호의 유임을 주장한 반면 새 병사는 왜놈의 앞잡이니 진주 지역에 들여 놓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동학혁명 과정에서 병사를 옹호하기는 처음이요, 칭찬하기도 처음이다. 지난 4월 이후 민준화와 동학군과의 사이는 매우 각별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즉 민준호는 6월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지 이에 항거하는 뜻에서 동학군을 지원해 준 것도 확실하다. 대우치에 모여 제기포한 동학군은 5~6일간이나 머물면서 군사 훈련도 하고 일본군과 싸울 태세와 준비도 갖추었다. 다음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