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역사의 동학과 지금의 천도교
‘인간만이 역사를 반추 한다’고 하는 말을 인정한다. 당초부터 경전을 바로 읽고 제대로 실천을 했었다면 지상천국은 이미 건설되었을지도 모를 것을. 선인들의 억울하고 슬픈 역사가 어쩌면 이토록 한 자귀 한 자 변함없이 되풀이 되는 것일까?! 동학이 천도교로 현도 할 때가 두 번째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기회는 아니었나 하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두 번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허무한 100년을 맞은 지금의 천도교와 국가 사회의 형국은 역사를 닮아도 이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마도 우리 민족성은 유별나게 변증법적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특종 인자로 태어난 이스라엘민족보다 더 진한 부족국가는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기에 溫故而知新의 마음으로 동학혁명의 역사를 진지하게 달관하여 천도교가 쇠퇴한 자명한 이유(毋敬天 毋順天)를 반성 하고, 미래를 위한 선행의무를 이속에서 찾아내어 실천하는 천도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 동학혁명(1894년)
가) 혁명의 원인과 발단
혁명봉기의 배경은 부패한 정부의 무능에 의한 당시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當百錢의 鑄造 통용은 국가 재정을 궁핍에 몰아넣었고, 願納錢은 관리로 하여금 매관매직을 자행케 하였으며, 稅制紊亂을 야기 시켰다. 개항이후 일본의 독점적 掠奪貿易 국가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일본상인은 농민의 곤궁한 약점을 악용하여 미리 금전을 빌려 주었다가 추수기에 수확의 일부 혹은 전부를 인수하는 2중의 이익을 취득하여, 농민은 2중 3중의 부담이 겹치게 되었고, 갖은 명목의 세금이 부과되고, 이를 징수하는 胥吏들의 횡포도 막심하였다.
이때에 해월신사께서는 1864년에 참형당한 대신사의 뒤를 이어 包, 帳, 接 이라고 일컫는 교도의 조직망을 설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대원군의 정책에도 힘입은 것이었다. 양반계급에 대한 반항과 외국세력에 대한 저항이 농민들로 하여금 동학을 지지하게 된 원인이었다. 동학의 교세확대에 따라 교조 伸寃運動이 전개되었다. 1893년 5월 지령에 따라 충청도 報恩에 모인 교도는 약2만여 명에 달했으며, 그들은 탐관오리의 懲討로부터《斥倭洋倡義》를 표방하여, 內政刷新, 外勢排擊이라는 정치운동을 전개한 것이 되었다. 1890년대에 들면서 사회 상태는 더 악화되어 火賊이 횡행하고 民亂이 재연되는 속에, 동학교도의 기세가 점고되었다. 이때 다음에 기술된 전라도 한 지방관의 탐학이 농민의 봉기를 유발케 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나) 혁명의 경과
1892년 전라도 고부군수 趙秉甲은 免稅조건으로 陳荒地를 개간케 하고 수학기에 강제징세를 하는가 하면, 富民에게 죄명을 씌워 금전을 착취하기도 했다. 농민을 징용하여 萬石洑를 수축하고 水利稅 를 징수하여 사복을 채웠다. 군민들은 군수와 관찰사에게 水稅濫徵의 금지를 호소했으나 도리어 탄압되자 고부의 동학접주 全琫準은 호소의 방법으로는 관철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1894년 2월 1,000여명의 농민을 이끌고 만석보를 파괴, 뒤이어 高阜郡衙를 습격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불법으로 징수한 稅穀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보고에 접한 정부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서 그들을 체포 살해하고, 그들의 가옥을 불사르는 등 폭행을 감행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더욱 분격한 全琫準, 金開南, 孫化中 등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은 재차 봉기하여 倡義文을 살포하여 <輔國安民>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태인, 정읍, 부안 등 각처의 농민들이 합세하여 동학군의 세력은 수천에 달 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곤봉이나 죽창을 들고 일부는 각 읍의 군기창에서 탈취한 총기와 刀槍을 들었다.
白山을 점거하고 대오를 정비한 그들이<除暴救民><逐滅倭夷>의 기치를 들고 관군과 대결할 태세를 갖추게 된 것은 그해 5월 초순이었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제1차로 전주에서 출동한 관군을 黃土峴에서 쳐부수고, 정읍, 고창을 거쳐 茂長을 점령하고, 다시 靈光을 거쳐 咸平에 도착하였다. 정부에서는 洪啓薰을 兩湖招討使에 임명하여 中央軍의 정예부대 약 800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케 하였다. 그러나 전주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도망자가 속출하여 그 병력은 반감하였다.
동학군은 홍계훈이 거느린 관군을 長城전투에서 격멸하고 북상하여 겅의 관군의 저항을 받음이 없이 전주를 점령하고 말았다. 홍계훈은 승산 없는 전투를 자각, 동학군에 대해서 선무 공작을 펴서 양군사이에는 講和가 성립되었다. 동학군이 전라도 일대를 점거하고 도정에서 내세운 내정개혁에 대한 요구조건은 30개 조항이나 되었다. 요구 조항의 주요 골자는 삼정(三政 : 田政, 軍政, 還穀)의 문란에서 오는 무궤도한 징세의 금단, 시정과, 지방관의 부정, 부패에 대한 근절책, 또 외국 상인, 특히 일본상인들에 의한 商權침해에 대한 禁斷 등이었다.
이와 같이 관군의 요청에 의해 휴전이 성립되어 동학군은 전주에서 철수하여 각기 출신지로 돌아가고, 충청도에서 일어난 다른 동학군도 해산하였다. 한편 정부는 동학교도로 하여금 전라도 53郡에 執綱所(民政機關)를 두게 하여, 동학교도들에게 이를 관장케 하여 지방행정의 보조기관으로 삼게 하였다. 지방행정에 참여케 된 동학교도들은 정치개혁의 요강을 발표했다.
모두 12개 조로서 탐관오리, 양반, 부호들의 횡포 엄징, 노비문서의 소각, 신분차별의 개선, 과부재가의 허용, 토지 균분제의 실시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휴전은 동학군에 불리하였다. 淸의 후원군은 물론, 이에 대항하는 일본군도 와서 일촉즉발의 위험한 정세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에 동학군은 척왜를 구호삼아 북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公州에서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에게 패하였고, 계속하여 泰仁에서 또 패하였다. 전봉준이하 많은 동학군의 지도자들이 체포 혹은 피살되어, 동학란은 종말을 맞았다.
다) 혁명의 실패와 의의
동학혁명은 양반사회에 항거하여 일어난 대규모적인 농민전쟁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힘을 근대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층을 동학 안에서 발견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제2세 교주 최시형 등은 국가의 역적이요, 師門의 亂賊이라고까지 부르며 무장 봉기를 반대하였다. 이러한 동학 내부의 분열은 동학군의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동학에 합류한 몰락한 양반이나 胥吏層은 자신의 야망을 위하여 가담하였을 뿐이다.
한편 동학혁명은 일본 상인의 경제적 침입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였다. 처음 斥倭는 정책적으로 정부에 제시되었으나 일본군이 개입함에 있어서는 이와 직접 싸웠다. 그러나 근대적인 훈련과 무기를 갖춘 일본군을 당해낼 만큼 강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안으로는 양반 중심의 봉건체제에 대항하고, 밖으로는 외국의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동학혁명은 결국 양자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이결과로 대내적으로는 1896년의 갑오개혁이란 내정개혁을 보았고 밖으로는 청, 일 전쟁을 유발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다.[東學亂記錄韓國史料叢書 10. 金庠基:東學과 東學亂. 李丙燾:東學亂의 歷史的意義. 金容燮:東學亂硏究論(歷史敎育3)]< 다음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