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모님의 동학과 나
 

  초등학교입학도 하기 전부터 꼬마 녀석인 나는 아버지를 따라 매년 1번 정도 광양진월면의 외조부모 산소, 하동 고전의 조부모 산소, 횡천, 적량의 윗대 조부모의 산소와 심지어 산청 신안의 윗대 선조묘소까지 4~50여km를 다녔다. 나는 먼 곳은 버스를 탓 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보행으로 다니셨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서는 항상 버스 정류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버지께서는 7녀 2남의 막내로 태어난 나를 아껴주셨다. 아버지의 조용하고 따듯한 표정으로 재미있게 해주시는 이야기는 언제나 듣기 좋았고 신기하였다. 그래서 매년 그렇게 멀고 힘든 성묫길을 꼬마인 내가 겁도 없이 자원한 것도 아버지를 위대하신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 듯 내가 원하는 것을 항상 미리 준비하여 주셨다.

“오늘 아버지께 여쭈려고 했는데... 어찌 아셨어요?”

“응, 아버지 마음이 네 마음하고 같았나 보다.” 라고하시며 웃으셨다.


  해방 직전인가 보다. 하동읍 우시장 입구에 있는 우리 집은 어머님께서 작은 여각을 경영하셨고, 장날에는 국밥집을 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날은 아버지도 어머님을 도와 소장수들이 편안히 들러 쉬었다 가도록 주선하여 주셨다. 가끔 아버지를 ‘이 생원’이라 부르시는 친구 분이 왔다 가면, 어김없이 노란금실방울이 달린 일본도를 찬 헌병이 집을 방문하였고, 아버지는 말없이 빈 지개를 지고 들판으로 나가시곤 하셨다.


  우리 논과 아래 위에 붙은 논임자 김씨와 정씨의 논은 너마지기인데 수확 때면 언제나 논을 탓하는 불평을 한다. 우리 논 두마지기반의 수확과 같기 때문이다. 이웃 사람들은 아버지를 신농씨라 하시며 다음과 같이 숨김없이 하소연을 하신다.

“어르신, 똑 같은 모종이고 똑 같은 논에, 심지어 똑 같은 비료와 똑 같은 어르신의 퇴비를 시비하였고, 심지어 어르신이 주신 간격 넓은 못줄까지 사용했는데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웃으시며

“아마 정성이 나보다 좀 못했나 보이.”

“아닙니다. 어르신보다 더 많이 둘러보고, 논물도 많이 대고 풀 김도 자주 매었는데요.”

하며 억울해 한다. 아버지는 억울해 하는 이웃집 사람들을 보고 담담히 웃으며

“마음을 편안히 가지게, 그래야 곡식도 편하게 자란다네. 그리고 욕심을 부리지 말게나.”

“아니, 욕심이라뇨? 무슨 뜻입니까?”

“내년에는 지금의 모포기를 1/3로 줄여 심어보게나!”하시며

“곡식은 종자를 많이 뿌린다고 더 많이 거두어 지는 것이 아니네.”

“예?” 하며 이구동성으로 의아해 하신다. 아버지께서 이들이 못 미더워 하는 기색을 보고

“곡식도 땅도 정성으로 가꾸고, 바라는 내 마음을 진실로 믿어보게나!” 하셨다.

 

  그 이듬해 한사람은 떡 한 시루를 해 짊어지고 아버지께 큰 인사를 올리며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며 조용하게 아무도 몰래 동학을 찾았다고 하셨다. <다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