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신고

 아침 일어나자마자 아내가 묻는다. "오늘은 집에 있을 거요, 어디 가실거요?"  대뜸 튀어나온 말이 "오늘은 생존신고하러 가는 날이오." 아내는 어리둥절하여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며 너무 뜻밖의 대답이라는 표정이다.
  우리 노령자들의 목숨은 마치 사그라져 가는 짚불 같아서 언제 꺼져 버릴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정기적 친목모임 날은 서로가 생존을 신고, 확인하는 날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참석하는 이의 연령이 70대에서 80대들이므로 염라대왕 호출장 받고 가는 사람이 두세 달에 하나 꼴 정도 나오고 있으니, 다음엔 누구 차례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따라서 오늘 모임에 만나는 것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의 만남은 서로가 '나는 아직 살아 있소.'라는 생존신고를 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가 정년퇴임을 한 지도 15년이 좀 넘었다. 누구나 퇴임을 하면 일시에 일자리가 없어지므로 집에 들어박혀 허전한 시간을 보내게 마련이다. 모임에 나가야 할 일정표를 달력에 표시해 보았더니, 30일 가운데 표기가 안 된 날이 10일도 채 안 된다. 정년 동기생 모임을 비롯하여, 교장, 교감 연수동기모임, 전직 직장 동료친목회, 삼락회 등이 있고, 향우회, 동창회, 종친회, 퇴계학연구원, 남명학연구원, 담수회, 박약회 등의 모임이 있으며, 문학 단체 모임에도 7,8군데 이름을 걸어놓고 있으니, 모임이 모두 스무 개가 넘는다. 개중에는 격월, 또는 계절 모임이 있고, 야간모임도 있기에 하루에 두세 군데 모임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의술의 발달로 급속하게 늘어나는 노령 인구의 문제는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노년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념은 대체로 부정적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념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볼 때, 자식들로서는 내 부모가 오래 살기를 원하지, 결코 빨리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자는 드물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적에는 노령 인구가 증가하는데 대해 호감을 갖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지난 번 교원 정년 단축 시에 초등하교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학급 담임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다수가 젊은 교사를 선호하고, 노령 교사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던 사실은 단적인 예라 하겠다.  국가에서 건강관리에 중점을 둔 노령화 대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으로 믿는다.

  정년토임 15년을 넘긴 시점에서, 현재 나에게 주어진 당면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지난날 40년을 교직에 모담아 후진 양성에 정력을 쏟으며 보람된 평생을 누렸으니 후회는 없고, 앞으로의 여생을 또 어떻게 보람되게 보내도록 할 것인가가 당면 과제이다. 이를 위하여 우선 건강하게 살아야 하겠기에 각종 친목회나 문학단체 모임에 부지런히 참여, 의미 있는 교유(交遊)활동을 지속하면서, '나는 아직 건강하게 살고 있소.' 하는 힘찬 생존 신고를 하며 살고 싶다. 또 아파트화단의 잡초 뽑기 같은 봉사활동을 쉬지 않고 해 나감으로써 여생의 보람을 느끼려 한다.

  출생신고는 부모가 하고, 사망신고는 유족이 하는 것인데 모두가 행정 기관에 해야 할 의무 사항이고 단번으로 끝나는 신고이다. 그러나 생존 신고는 이를 하지않는다고 누구도 문책하거나 재촉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나에게 있어서는 생존 신고는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되어 이를 거르고서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으니 이 어찌된 일인고? 그러고 보니 생존신고는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하는 신고라고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관속에 드는 날까지 생존신고를 열심히 하면서 여생을 보람있게 살아가려 한다.     (2006.10.『수필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