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과 공간

  20녀 년을 살던 9층 S아파트에서 25층 L아파트에 새 둥지를 옮기고 보니, 마치 빌딩 숲속에 살고 있는 듯, 높은 벽으로부터 압박감이 전해졌다. 그런데 3년쯤 지내자, 벽이라는게 꼭 위압적이고 부정적인 면만을 지닌게 아니라 새로운 공간을 조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층 아파트는 벽이 많은 그만큼 넓은 공간을 포용한다. 벽이 생기는 만큼, 오막조막한 공간이 많이 생겨 독서실, 컴퓨터실, 헬스방,  노인정 등등이 확보된다. 따라서 벽은 부정적이라고만 할 수 없고, 벽이 새로운 공간을 조성하여 편익을 제공한다는 긍정적인 면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벽과 공간, 양자는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은 동반자 관계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인류에게 최초의 벽은 하늘과 땅이었다. 하늘란 벽이 있음으로써 우주 공간이 생긴다. 원시인들은 풍우를 피하기 위해 나무와 풀로 벽을 만들어 움막을 짓고, 돌과 흙으로 벽을 짜 맞추고, 갈대나 나무껍질 등으로 벽을 만들어 지붕을 얹었다.

   벽에는 자연과 인위가 공존한다. 자연의 벽으로 인상적인 것은 산악인들이 자기 의지와의 승부를 겨루는 암벽이 있고, 인위적인 벽에는 울타리 성격의 벽, 건물을 구축함에 따른 외벽과 내벽등이 있다. 또 옛날 군웅활거시대의 영웅들은 성벽을 쌓아 두고, 이를 거점으로 천하를 장악하려는 야망에 일생을 살기도 하였다.

  함편 눈에 보이지 않은 벽도 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벽, 지역과 지역 사이의 벽, 그 밖에 집단과 집단,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의 벽도 있어, 이러한 벽으로 인하여 갈등과 암투, 전쟁이 유발되기도 하였다. 우리 역사에도 선비들이 만든 당파라는 벽이 사화(士禍)를 불러일으킴으로써 피를 뿌렸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엔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동족간의 벽을 만들기도 하였으니, 동서독간의 벽과 우리나라 남북간의 벽이 그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벽으로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벽, 재산 상속을 겨냥한 형제간의 벽, 근로자와 사용자간의 벽, 재산 상속을 겨냥한 형제간의 벽, 근로자와 사용자간의 벽, 지역간,  계급간의 벽들이 있고, 남녀 간의 벽, 세대 간의 벽도 있다.

   나는 최근 벽이 생기면 공간을 동반해 온다는 사실에 눈이 뜨게 되면서, 지금까지의 벽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벽이 생기는 곳에 공간이 동반된다.'는 나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다.
   공간은 인간에게 안식과 안정을 준다. 지구는 인간생활의 공간이요, 주택은 가족 화합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공간이 때로는 죄수를 가두는 감방이 되기도 하고, 선비들의 유배지가 되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비록 산간벽지에 유배당해 생활공간을 제한받았으나, 그것을 긍정적으로 활용하여 수많은 작품과 저서를 남겼다. 안중근 의사나 김구 선생 같은 명사 가운데도 감방에서 징역을 감수하면서 유익한 저서를 남긴 이가 있다. 그러고 보니 주어진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그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정치인들의 장난에 의해 빚어진 영호남간 지역감정도 벽과 공간의 영면성을 잘 활용하면 이를 그복할 묘안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요즘 엉뚱하게도 벽이 생기는 곳에 동반된 공간에 대해 깊이 몰두해 있다.

(2006. 8『영호남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