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아(
嬰芽)예찬

  4월 하순 찰늦은 봄나들이 길에 나섰다. 중간에 자지산과 문복산 꼬불길을 달리는 동안 좌우에 펼쳐진 자연 경관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이 길은 작년 10월 하순 단풍 구경을 하러갔다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드라이브한 코스다.  작년에는  온산이 벌겋게 물든 단풍 경치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잎을 다 털어 버리고 나신(裸身)으로 지내다가 이제는 다시 새 옷을 갈아입은 연초록 영아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준다.

  단풍잎과 연초록 새입 영아, 이 둘은 같은 나무에 열린 잎이면서도 우리에게 주는 정감은 사뭇 다르다. 나뭇잎에도 일생이 있다. 봄에 연초록 새잎으로 태어나 5,6월이 되면 청초록으로 갈아입고, 7,8월에는 짙은 녹음의 풋내음을 마구 풍긴다. 그러고는 9월이 되면 슬슬 초록을 황색에게 양보하면서 초로의 얼굴로 변하고, 10,11월이 되면 얼굴에 홍조를 띠다가 점차 짙어져 단풍으로서의 절정을 뽐낸다. 그러나 늦가을의 서리를 맞으면 어쩔 수 없이 낙엽귀근(落葉歸根), 뿌로로 돌아가게 된다.

  지금 내 앞에 전개되고 있는 나무의 새순들에서 나는 마치, 갓난 애기를 보는 듯 순수함을 느낀다. 영아(嬰兒)가 아닌 영아(嬰芽)를 보고 있다. 갓 태어난 신생아(新生芽)- 새순이기에 마치 신생아(新生兒)의 입술과도 같이 앳되고 보들보들하여 입술이라도 살그머니 갖다 대어 짜릿한 쾌감을 맛보고 싶은 충동까지 느낀다. 갓난 아기에게서 느끼는 천진성과 무구성(無垢性)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어 좋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아이를 좋아한다. 그것은 그들이 세속에 몰들지 않고 타고난 천진성과 무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나닌가. 내가 지금 나무의 갓 태어난 새순들에게 흘리고 있는 것은 연초록 새순에서 풍겨나는 순진성과 신선감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나는 성선설을 지지한다.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선하며, 나쁜 해위는 세상에 태어난 후의 물욕에서 영향 받는 것으로 믿고 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영아(영兒)이고, 갓 피어난 새잎은 영아(영芽)이니 발음조차 같다.

  연초록 새순은 천진스럽고 때 묻지 않은 신생아다. 그에 비해 단풍잎은 타고난 본성-초록을 잃었으니사회에 물들어 세속화돼 버린 인간과 같다.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선함을 지니지 못하고 후천적으로 사회의 물욕에 오염되어 순수성을 잃어가듯이, 단풍잎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성-초록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후천적으로 단풍으로 변신한 것이라 할 진대, 연초록 잎은 생화(生花)요, 단풍은 가화(假花)라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단풍 경치만 선호하고 신록의 경치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은, 짙은 마치 짙은 화장으로 외모를 꾸민 외방여인에게 눈이 홀리어 진실하고 아리따운 아내를 돌보지 않는 팔푼이 남편과 같다고나 할까.

  내가 이처럼 단풍보다는 연초록 영아쪽에 더 애정이 가는 것은 왜일까. 사람이 늙어지면 젊은 기(氣)를 받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나에게 그런 노탐이 생겼다는 것일까. 이미 팔순이 넘었으니, 노화 일로에 있는 단풍보다는 싱싱한 새순 영아가 더 탐스럽게 보인단 말인가. 술꾼들이 술집에 가면, 농담으로 영계접대부를 찾는다 했는데, 내가 그꼴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단풍은 나뭇잎 일생으로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위한 과정을 단풍으로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라 할 것이니, 그것은 그것대로 아름답다. 그러나 새 생명의 탄생 과정을 생생하게 연출해 신선감과 무구성을 안겨 주는 연초록-영아가 훨씬 내 마음을 끈다고 하면 이는 나만의 감살일까. (2007. 5. 『농민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