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로 쓰는 수필

  나는 유서 쓰는 기분으로 글을 쓴다.  거기엔 사연이 있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세상 빛을 보기 전 작고하셨으므로, 그 용안과 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학 공부를 하시고 글을 남기셨기에, 선친께서 해방 직후 한문본 문집을 펴냈다. 그후 내가 이를 한문학과 교수에게 의뢰, 우리발로 번역본을 간행함으로써 그 내용이 이해됨에 따라, 할아버지가 어떤 사상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셨는가를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할아버지께서 남기고 가신 문집에서 살아있는 사람에게서처럼 감동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번역된 할아버지의 문집 내용은 나에게 유서가 되었다. 거기엔 할아버지의 서정이 담긴 시서(詩書)가 있고, 친지간에 왕래한 서신이 있다.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훈사(訓辭), 죽은 이를 애도하는 만사(輓詞), 심지어 사위에게 보낸 편지 등등 다양한 내용이 들어있다.

  이로써 나는 할아버지 얼굴 모습은 몰라도 생시의 생각과 인품을 읽을 수 있었으니 삶의 길을 시사(示唆)해주는 유서가 이나고 무엇인가.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인생독본을 주고 가신 것 같다. 그러기에 나는 이 같은 문집을 남기고 가신 할아버지가 고맙기 그지없다.

 이로부터 나는 글스는 시간이 유서 쓰기 시간처럼 되어 버렸다. 지금 내가 쓰는 이 수필은 나의 자식들이 읽어줄 것이며, 내가 할아버지 문집을 읽었듯이, 먼 훗날에도 얼굴 모르는 나의 후손들이 '이런 할아버지도 계셨던가?' 하고 친근감을 갖고 읽어줄 것으로 믿는다. 그리하여 그 가운데 혹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는 글이 단 몇 편이라도 있다고 하면 얼마나 보람이 있는 일이겠는가.  그래서 내가 유서 쓰는 마음으로 수필을 쓰는 이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고 엄숙해짐을 느낀다.  (200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