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자(曾子)의 도를 걸으라는 주문
나의 아명은 증도(曾道)였다. 일제시대 4년제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이 아명으로 지냈다. 호적 이름으로 입학함이 정상인데, 당시 나의 아버지가 출타중이었는지라, 동네 구장이 아명 그대로를 원서에 적어 넣은 것이었다. 4년 후에 전학을 하면서 '병수'라는 호적명을 찾게 되었는데, 당시의 동창들은 지금도 아명을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나의 성장과정에서 증도(曾道)와 병수(炳壽) 두 이름이 있었는데, 모두 아버지가 지어 주신 것이다. 이름을 지을 적에는 대개 바라는 소망을 담아서 짓는 경우가 많다. 증도(曾道)하는 아명에는 어떤 소망을 담았을까? 한문 공부를 많이 하신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 자식이 증자(曾子)의 도를 걸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증도'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생각된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 효행으로도 유면한 한가자가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나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대를 이을 장손이 학문도 빼어나고 효성도 있는 인간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을 가지셨던 모양이다. 내가 철부지여서 내 이름자에 담긴 아버지의 주문을 몰랐었기에 다행이지, 만약 그걸 알았더라면 나믐 얼마나 부담감을 갖고 스터레스를 받으며서 살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기도 하다.
다음으로 호적명 '병수'는 어찌하여 지어졌을까? 항렬(行列)자를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이신지라, 재량권은 한 글자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의 항렬자는 불꽃병(炳)자이다. 거기에 목숨수(壽)자를 붙인 것은 아마도 수명을 누리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았던 것이 나닌가 생각된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네 명의 아이를 출산하셨는데 누님 한분은 건젔으나, 둘은 꺾이고 말았던 모양이다. 따라서 내가 태어났을 당시 부모님의 가장 절실한 소망은 가문의 장손이 잘 자라서 수명을 누리고 혈통을 고이 이어나가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한자 중에서 수(壽)자를 붙인 것이 나의 호적명으로 등재되었다.
이렇게 등록이 된 '병수'는 지난 70여년간 공인의 명패로 행세하게 되었던 바, 그다지 흔하지 않았으나, 간혹 동명이인을 만나기도 하였다. 내가 B고교 교사 적에 담임 학급 가운데, 성명 석 자가 같은 학생이 있어 불편을 겪은 일이 있었다. 출석 점호때 내가 내이름을 불러야 할 때가 있었고, 내가 지나가는데 짖궂은 학생이 '이병수'하고 불러서 뒤돌아보면, 저희들끼리 제친구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 제자가 30년이 흘러간 훗날 교수가 되어 내가 있는 수필동인회에 입회를 해 와서 또 한번의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하여 '교장 이병수'와 '교수 이병수'로 구별하여 쓰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느 예부터 이름자를 소중이 여긴 나머지, 함부로 부르지 않기위해 자(字)와 호(號)를 만들어 사용 하였다. '자'는 누구나 지어 부를 수 있었지만, '호'는 유명인사가 되어야 불렀다. 나에게도 족보에 보면 화열(和烈)이란 '자'가 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40세 이후였다. 그때까지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지도 않았고 필요성도 없었다. 그런데 '화열'이란 그 '자'가 어쩐지 나는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자식에게 바라는 인간상을 자(字)에 담으셨던가 생각된다. 바깥(또는 남)으로는 부드럽고, 안(또는 자신)으로는 매섭게(엄격하게) 대하라는 처세훈을 암시하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아버지의 숨은 소망이 텔레파시로 전달되었음인지, 나는 평소에 남에게 될 수록 부드럽게, 나에게는 엄격하게 대한다는 생활방침을 나름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옛날 선비들이 사용했던 아호(雅號)는 요즘도 사용되고 있다. 성균관, 유도회, 향교, 퇴계학회, 남명학회 등 유림단체를 비롯, 로타리클럽, 라이온스클럽, 정년퇴임 동기회, 그 밖의 노년층 친목 모임에서 선비들을 본받아 아호를 지어 부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선조들이 선비를 이상형 인간으로 삼아 생활하셨으니, 그를 본받아 본이름 대신 아호를 부른는 것은 어쩌면 못이있고, 노년기의 삶에 낭만성도 있지 않나 생각된다.
나의 아호는 현봉(玄峰)이다. 정년퇴임 동기회에서 어호를 지어 부르기로 결의함에 따라 내어놓은 것이다. '현봉'은 사실은 내가 40세 초반에 성전암에서 3천배를 하고 성철스님에게서 불명(佛名)으로 받은 것이었다. 갑자기 정년 모임에서 아호를 내어 놓으라는 요청에 깊이 생각지도 않고 덜렁 등록을 한 것이 시초였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무모한 짓이었다. '玄峰'이란 '큰 봉우리'가 아닌가? '중간 봉우리'도 못되는 소인배가 겁도 없이 '현봉'이라니 당키나 한말인가?
그래서 아호를 바꾸려 시도도 해 보았다. 내 고향의 집현산이란 이름을 따서 '집현(集賢)'으로 함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도 있었고, 또 화열이란 '자'가 마음에 들어 그걸 아호로 삼을까 하는 마음도 가졌다. 몇 군데 모임에서 아호 병경 홍보(?)를 하였으나 먹히어 들지 않앗다. 팔순이 다된 처지에 '아호 변경'이 무슨 소용이냐는 핀잔을 받기도 했다. 어찌 되엇든, 한번 정해진 나의 아호'현봉'은 몇 개의 친목단체는 물론, 문학단체에까지 퍼져쓰이고 잇으니 이젠 주워 담기가 어렵게 되어 포기할까 한다.
우리 선조들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할 만큼 자기 이름석 자를 목숨처럼 귀히 여겨왔다. 이제 인생의 환혼기에 접어든 이시점에서 나는 아버지께서 이름을 지어 주실적에 가졌던 기대에 얼마나 부응을 하였는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첫째, 증자의 도를 걸으라는 주문에 대하여는 기대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기에 언급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 사람됨의 도를 가르치는 교직에 발을 디뎌 후진들을 인도하는 일에 종사하여 40여 년간 봉사를 하였으니, 미흡하나마 이로써 만족을 해야 하겠으며, 둘째로 증자처럼 극진한 효행엔 미치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72년, 어머니는 92년을 모시는 동안에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려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것만으로 용서를 빌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셌째로, 목숨 수(壽)자를 넣어 수명을 오래 누리기를 바랐던 그 기대에 대하여는, 팔순을 코앞에 두도록 살면서 평균 수명 이상을 누리고, 덤의 여생(餘生)까지 얻고 있으니, 이만하면 부모님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아전인수격인 생각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