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회
어느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 오는 동안에 특별히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하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후회! 세상을 오래 살다 보면, 후회되는 일이 한두 가자랴? 우선 자랄 적엔 소견머리기 발달되지 않아서 부모에게 불효스러운 언행을 예사로 저질렀음으로써 속을 썩여 드렸던일, 형제간에 동생을 잘 돌보지 않고 오히려 골려 주었던 일, 그리고 학교에 가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음으로써 시험에 낙방하거나 취직이 되지 않아 고민하고 부모에게 걱정시켰던 일이 후회가 될 수 있다.
또 결혼 후에는 부부 사이에 너무 만만하다고 함부로 행동함으로써 상대를 고민에 빠뜨리게 했거나, 심지어는 격한 감정 싸움으로 이혼 직전까지 갔던 일, 그밖에 자식들에게도 홧김에 지나치게 매질을 하거니 모욕적인 꾸지람을 줌으로써 아이를 빗나가게 하였던 일 드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 생활에 있어서도 친구간이나 작장 동료간에서도 알콜 힘을 빌려 멱살을 쥐고 결투를 벌임으로써 실수를 하고, 술이 깬 후에는 사과까지 하면서 뉘우친 일도 있을 것이며, 정친이 "노인들은 투표를 하지 않아도 되니, 편히 쉬시라." 는 등, 말 한마디를 실수 함으로써 인기도가 급전락되어 후회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인생을 팔순이 되도록 살았으니 후회되는 일이 수없이 많기에 이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그 중 가장 후회되는 일 한가지만을 말하라고 하니 생각해보면, 내가 어버지의 건강 관리를 잘못하여 아버지를 일찍 가시에 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다.
나의 아버지께서 고희(70세) 조금 전의 어느 날이었다. "애야, 내가 왠지 눈이 좀 침침하다."고 하시던 아버지를 모시고 서면의 K안과 의원이 갔다. 진찰을 마친 원장은 "어르신의 눈은 안과에 올 병이 아니고, 혈압이 높아 그런 것이니 내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곧 그 길로 B내과 의원으로 모시고 갔더니, 역시 고혈압임을 진단하고, 혈압 강하제를 주아서 계속 복용을 하였다. 약 6개월을 복용하고 나니 정상 혈압으로 수치가 내려가게 되었으므로 안심을 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것으로 완치가 된 것으로 속단하고, 그 후 아버지의 혈압에 대해 일체 신경을 쓰지 않고 지냈으니, 이것이 훗날 나의 평생 후회의 씨앗이 될 줄이야.
그로부터 2년 반 후, 아버지가 72세 되시던 해 12월 29일 내가 일찍 출근하여 1교시 수업(방학중임에도 보충수업이 있었다.)을 마치고 교무실로 나오는데, 사환아이가 "이 선생님, 집에서 급한 일이 있으니 정화를 해 달라고 합디다." 하는 것이었다. 즉시 전화를 내어 보니, 아내가 "아버님이 위독하시니 빨라 오시라."는 내용이었다. 택시를 타고 30분간을 부랴부랴 달려와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왕진(당시는 의사가 환자의 집에와서 치료 하는 제도가 있었다.)을 왔던 의사가 현관에서 나오면서 "아이구 안되었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급히 올라가 방으로 들어가니. 아버지께서는 이미 말문을 닫으신 후였다. 아침에 내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고 같것이 불과 서너 시잔 전이었는데, 너무나 뜻밖인지라, 기가막혀 처음엔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었다. "아버지, 아버지!"하고 연달아 불러 보았으나 대답을 들을 수 없었으니, 찟어지는 가슴에 어쩔 바를 몰랐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안긴 듯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근근히 진정하여 아내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내가 출근한 후 아버지께서 화장실에 다녀오시더니, 아내를 향해 "애야, 내가 좀 어지럽다."하시기에 큰방에 눕게 하시고, 즉시 동네 단골의원에게 전화로 완진을 줄 것을 부탁하였다. 약 1시간 후 의사가 와 진찰을 하더니, "혈압이 높았던 모양이던가, 심장마비로 가셨습니다." 하고 진단을 내렸다는 것이 었다. 결국 고혈압으로 가신 것이었다.
나는 충격을 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고혈압증으로 가신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 혈압 관리를 자식인 내가 해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였으니, 내가 아버지를 비명에 가시게 한 것과 다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그 후 두고두고 죄책감으로 변하여 갔다. 더욱이 그 후 나의 어머니께서는 20년을 더 살다 92세까지 사셨으니, 만약 아버지의 협랍 관리를 잘해 드렸더라면 어머님처럼 살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니, '후회 莫及'이란 말이 이런 때 쓰기 위해 생긴 말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내가 어찌 그다지도 의학 상식이 부족하였던가? 고혈압이 평생 동안 신경을 써야 하는 하는 병 증세임을 그리도 몰랐던지? 후회가 막심하다. 30년 전에 내가 잘못해 아버지를 비명에 가시게한 후회, 이는 그후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었다. 한편 어머니께서는 그후 20년을 더 사셨으나, 말기의 2~3년은 약간의 '치매'증세가 있어 가족들이 어머니를 모시는데 애로를 느낄 때가 있었다. 빈 이웃집에 들어가 있다가 주인이 오는 것을 보고 "댁은 어디서 왔소?" 하는 일도 있었다.
최근에 와서 노인 병원이 늘어나 간혹 병문안을 가 보노라면, '치매'환자 등 심한 질병으로 소소변조차 남의 신세를 지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되니, 저렇게라도 하여 오래 살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도 된다. 몇 년전 친구 A는 모임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서 실족해 넘어져 뇌진탕으로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말문을 열지 못하고 말았다.
또한 친구 B는 바둑을 두다가 장난처럼 슬그머니 쓰러지더니, 거짓말처럼 신선 죽움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경우, 친구 A나 B나 결코 비명에 간 것이 아니라,그것이 바로 운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인생의 종말에 대해 관심이 많아진 우리 장노(장노는 사람)들이 모여 보면, '결코 오래사는 것이 행복한게 아니라, 마지막 그날 까지 건강하게 살다 가는 것이 진짜 행복이다.'라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지고 있다. 바뀌어 가고 있는 인생관, 향복관을 보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버지를 고혈압 증세로 비명에 가시게 한데 대해 평생 후회심과 죄책감을 느끼고 살았던 데서 이제는 조금은 벗어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때 혈압 관리를 잘해 드렸더라면...."하는 아쉬운 후회의 전은 아무래도 내가 염라대왕에게 불려 가는 그날까지 안고 가야 할 짐일 것 같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