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록 예찬
4월 하순, 우리 일행 8명은 부부 동반으로 철늕은 봄나들이 길에 나서 경주 H리조트에서 1박하고, 귀로에 건천을 거쳐 청도 운문사를 둘러보고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봄경치를 감상하게 되었다. 중간에 자지산과 문복산의 산허리를 누비는 꼬불길을 달라는 동안 좌우에 펼쳐져 있는 자연 경관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 길은 마침 작년 10월 하순 우리내외와 아들 내외, 손자 다섯 식구가 단풍 구경을 위해 돌아보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차를 달려본 코스여서 그때가 회상된다. 그때는 늦가을이었고, 지금은 그로부터 한겨울을 뛰어넘은 늦봄이니 꼭 반년의 시차가 있는자라, 자연이 보여 주는 경관이 대비되는 점이 판이하다. 나무의ㅐ 황혼기와 신생아기를 대비해 볼 수 있다고나 할가? 작년에는 온산이 벌겋게 물들인 단풍 경치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후 잎을 다 털어 버리고 나신(裸身)으로 지내다가 이제는 다시 새옷을 갈아 입은 연초록 영아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주고 있다.
단풍잎과 연초록 새입, 이둘은 같은 나무에 열린 잎이면서도 우리에게 주는 정감은 사뭇 다르다. 나뭇잎에도 일생이 있다. 4월에 연초록 새잎으로 태어나 5~6월이 되면 청초록으로 갈아입고, 7~8월에는 우거진 녹음의 풋내음을 마구 풍긴다. 그러고는 9월이 되면 슬슬 초록을 황색에게 내주면서 초로의 얼굴로 변장하고, 10~11월이 되면 얼굴에 홍색을 띠면서 그 농도가 점차 짙어져서 단풍으로서의 절정을 뽐내다가 서리를 맞으면 어쩔 수 없이 추풍낙엽의 신세가 되어 낙엽귀근(落葉歸根), 뿌로로 돌아가게 된다.
나는 이번에 신록의 산야를 누비면서 나뭇잎의 신생아인 봄의 새순과 가을의 단풍잎을 비교해 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삶들은 늦가을이 되면 '단풍놀이'한번 안하면 부끄러이 여길 정도로 단풍을 좋아한다. 그러나 봄철 관광 시에 벚꽃이나 철쭉의 꽃구경에는 사족을 못 쓰면서 신록에 눈을 돌리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돋아나는 잎의 연초록 새순이 발사하는 은빛 광채에 눈이 가, 이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가을 단풍 이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다.
지금 내 앞에 전개되고 있는 나무의 새순들에서 나는 마치, 갓난 애기를 보듯 생동감을 느낀다. 영아가 아닌 영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갓 태어난 신생아(新生芽)- 새순이기에 마치 신생아(新生兒)의 입술과도 같이 앳되고 보들보들하여 손끝이라도 살그머니 갖다 대어 짜릿한 쾌감을 맛보고 싶은 생각이 일게 된다. 갓난아기에게서 느끼는 천진성과 무구성(無垢性)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아이를 좋아한다. 그것은 그들이 세속에 몰들지 않고 타고난 천진성과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서이다. 내가 지금 나무의 갓 태어난 새순들에게 흘리고 있는 것은 연초록 새순에서 풍겨나는 순진성과 신선감 때문이다. 순수와 희망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나는 그 중에서도 성선설을지지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선하며, 나쁜 해위는 세상에 태어난 후의 물욕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마는 믿고 있다. 갓 태어난 후의 물욕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영아(영兒)이고, 갓 피어난 새입픈 영아(영芽)이다. 한자로는 다르지만 한글 발음으로는 같은 '영아'이다.
연초록 새순은 천진스럽고 때 묻지 않은 신생아 같다. 그에 비해 단풍잎은 타고난 보성(초록)을 잃었으니사회에 물이 들어 세속화돼 버린 인간과 같다. 사람이 마치 선천적으로 타고난 선함을 지니지 못하고, 후천적으로 사회의 물욕에 오염되어 순수성을 잃어가듯이, 단풍잎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성인 초록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후천적으로 물들어간 것이라 할 진대, 초록 잎은 생화(生花)요, 단풍은 가화(假花)라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단풍 경치만 선호하고 신록의 경치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은 짙은 화장으로 외모를 꾸민 외방여인에게 눈이 홀리어 진실하고 알뜰한 나내를 돌보지 않는 팔품이 남편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우수개 야담 하나다 생각난다. '옛 날 소금 장수가 해가 저물어 모녀만 사는 오두막집에 들러 자게 되었는데 그 중 안주인과 정이 통해 일을 마치고 나니, 딸이 "새것을 몰라보고..."하며 섭섭해 하는지라, 딸에게도 손을 보아주었더니 둘이 다 흡족해 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단풍만 편애하지말고 신록도 함께 사랑했으면 한다.
이처럼 내가 단풍보다는 연초록 새순에 더 애정이 가게 된 것은 왜일까? 사람이 늙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젊은 기(氣)를 받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다고 하는데, 혹시 나에게 그런 노탐이 생겼다는 것일까? 올해 내 나이 팔순이 꽉찾으니, 노화 일로에 있는 나뭇잎, 즉 별 볼일 없는 단풍보다는 싱싱한 생기 넘치는 희망의 새순 연초록 영아가 더 탐스럽게 보인 것이었는지? 술꾼들이 술집에 가면, 농담으로 영계접대부를 찾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그꼴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나는, 작년 늦가을에 단풍 경치를 보고서 감탄사를 연달아 토해내며 통과한 그 코스를, 반년이 지난 봄철을 맞아 다시 돌아보면서 돋아나는 새순의 신선한 미(美)에 도취되어 단풍의 경치보다 더 높은 평점을 주고 싶은 충동감을 느끼게 되었다.
단풍은 나뭇잎의 일생으로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위한 과정을 곱게 표현하여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니, 그것은 그것대로 아름답기는 하다. 그러나 새 생명의 탄생 과정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신선감과 새희망을 안겨 주는 연초록 새순은 결코 단풍에 못지 않은 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면 이는 나만의 과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