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노미(老美)

 

 어느 날 오후 금정산 등산을 갔다가 귀가길 늦은 시간에 능선을 타면서 서쪽의 낙동변 지평선에 저물어가는 황혼의 광경을 만났다. 낙조(落照)의 광경은 더러 보았지만, 이날따라 산 고지에서 태양이 저물어가는 황혼의 미관을 바라보니, 몇 년 전에 경주 토함산(석룰암)에 올라 바라보았던 해돋이 광경이 문득 떠오른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이랴. 오늘 내가 바라보는 혼혼의 광경은 결코 그때 석굴암 해돋이에 못지 않은 눈부신 경관을 연출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일행은 그날 이글이글 타오르는 진홍의 덩어리를 보고 모두가 탄성을 질렀는데, 지금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하늘이 맞물린 곳에 전개되고 잇는 황금빛 서운 속의 광채는 결코 해돋이의 활홀함에 뒤지지 않는 강렬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 이는 내 인생이 환혼에 접어들었다는 자각증세로 보아야 할 것인가? 강렬한 태양의 아름다움(美)은 해돋이 광경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저녁 노을 환혼의 광경에서도 볼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최근 친목모임 자라에서 유향되고 있는 건배사가 '九九八八二三四(死)'였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만 앓고 편안히 저승으로 가기를 소망한다'는 뜻으로 건배 제의를 하는 것이었다. 이는 '오래 살되, 건강하게 살다 가고 싶다'는 곹오적 소망을 가진 사회의 한 단변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며칠 전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가 건배사의 구호(내용)가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즉, '九九八八'이 '七七八八'로 바뀌고, '二三死'가 '一二死'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앞서의 '구구팔팔..'의 건배사를 며느리들이 듣고, 99세까지 사는 것은 자식들이 너무 고생 스러우니 77세로 낮추고, '2~3일'도 '하루 이틀'로 줄이는 것이 알맞다고 하여 수정을 가해 왔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서운한 감이 있으면서도 일리가 있는 말 같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 남녀 평균 수명이 77세이니 그 이상 오래 살겠다는 것은 과욕을 부린다고 할 만하고, 또 장수의 부작용 현상도 만만찮으니 말이다. 얼마전 어느 회식 자리가 끝난 뒤 그중 한 사람이 남은 음식을 챙겨 싸 가지고 가는 이가 있었는데, 이를 보고 누군가가 "더럽게 늙어간다"는 핀잔을 준 일이 있었다. 본인 귀에까지 들렸는지 모르지만, 이런 장면은 여자들 모임에서는 더러 볼 수 있다고 한다. '더럽게 늙어간다'는 것을 '노추(老醜)'라 한다. '노추'가 있으면 상대어인 '노미(老美)'도 있어야 할 것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노미'는 없다. 어원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일본 사전-『廣辭苑』을 뒤져 보아도 나와 있지 않다. 아쉬운 생각이 든다.

  늙어가는 처지이지만, '더럽게 늙어간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이 말은 음식 자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어니다. 노인이 여러 사람 앞에서 불 필요한 잔소리를 하거나, 나이값을 하지 못하는 행동을 했을 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늙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추하다'는 소리 들어가면서 살아서야 되겠는가?
  여생을 아름답게 늙어갈 수는 없을까? 황혼의 노미(老美)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어진다.

 일찍이 83세를 살다 간 문호 괴테는 풍요로운 황혼을 위한 다섯 가지를 제의 하였다. 건강을 알뜰히 챙기고, 돈 없는 노년이 되지 말며, 죽을 때까지 삶을 지탱해 주는 일을 갖고, 고독을 잊기위한 좋은 친구를 가지며, 끝까지 꿈을 잃지 않기위해 신앙과 명상의 시간을 가지라고 하였다.
  또 인터넷에는 '나이 들어 대접받는 7가지 비결'을 귀뜀해 주는 이도 있다. 집과 환경을 깨끗이 하고, 항상 용모를 단정히 하며,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많이하고, 회의나 모임에 자주 참석하며, 언제나 발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돈이든 일이든 자기몫을 다하고, 포기할 것은 깨끗이 포기하라고 한다.

  인생을 보람되게 살기 위한 니론서는 많다. 그러나 인생은 이론만으로 아름답게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실천이 따라야 하겠다. 그러면 나는 앞으로의 여생에서 황혼의 노미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먼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다. 나는 이미 지난날의 인생에서 유교 집안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선생이 되고 싶었던 꿈을 실현하여 평생 교직생활을 보낸 것을 감사하고, 4남매가 하나도 꺾이지 않고 바르게 자라준 것이 감사하고, 정년퇴임 후에도 '글쓰기'란 취미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고 있지만,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에 대하여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다.

  다음으로, 매사에 모나지 않고 둥굴둘굴하게 살아가야 하겠다. 고향마을 느티나무처럼 말없이 의젓하고, 포용성을 갖고 남을 감싸주고 격려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또, 몸차림,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다녀야겠다. 그래서 아직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는 인상을 주면서 살아가련다. 한편 항상 내가 조금 손해 본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 하겠다. 뿐만아니라, 남에게 조금이나마 베풀면서 살아가는 여유로움도 실천하고 싶다. 또, 젊은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어울려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다.

  때로는 노래방에도 가서 신곡도 부르면서 즐기는 생활도 하고 싶다. 가능하면 새로 나오는 과학문명의 이기도 외면하지 않고, 컴퓨터 기초만이라도 익혀 문학활동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민태원은「청춘예찬」에서 이상을 지진 청춘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극찬을 하였지만, 노년에도 황혼의 아름다움, 곧 노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야 하겠다.

  우리는 해돋이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美觀을 감상하는 데는 기를 쓰면서도 석양에서의 황혼의 아름다움에는 미쳐 눈을 돌릴 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생에는 피 끓는 청춘의 정열미도 있지만, 노년에서 완숙(完熟)으로 꽃피우는 황혼의 노미도 있다.
  바야흐로 시대는 노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으니, 언제까지나 해돋이의 황홀마에만 도취해 있을 게 아니라, 미개지인 저녁 노을, 황혼의 미관에도 시야를 넓혀 볼 여유를 가지고 노후생활을 즐겨 보지 않으려는가.
  노미(老美)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