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가꾸기

 

  7년 전 문중 재실 성경재(誠敬齋)가 훼철되었다. 성경재는 나에게 9대조, 성철스님에게 8대조 되시는 국헌 이정석 공의 재실이다. 학덕이 높았고 입향조이셨기에 8.15광복 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지금의 겁외사 동편에 재실을 마련했었는데, 97년 대진 고속도로 개설로 인해 도로 부지로 편입되어 보상금 5천만원 나왔다.
  후손들이 종회를 열렀다. 복월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 끝에 재건을 결의 하고, 부족 공사비는 일족들의 헌성금으로 충당키로 합의가 되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재건추진위원장이란 김이 나에게 지워졌으니, 나약한 어깨에 한섬도 넘는 볏섬이 지원진 꼴이 되었다.

  문중 종사(宗事)라 피할 도리도 없어 과중한 짐을 어깨에 진채 7년간을 끙끙거리면서 걸어왔다. 보상금은 복원 건축비의 3분의 1도 못 미쳤으니 1억원이 훨씬 넘는 성금을 모아야 할 형편이었다.
 국헌공 후손은 족보상 약 150세대가 되는데, 주소 아파악은 50세대뿐이다. 문중 단합대회를 묵곡리에서 열었다. 50명의 일족들이 참집하였다. 무슨 일의 추진이든 깃대드는 이가있어야 하는 법. 추진위원장을 맡은 죄로 내가 깃대를 들 수밖에 없었다. 헌성금 신청 장부 첫머리에 '일금 5백만 원'을 기록하였다. 그 뒤에 내 종제가 또 5백만 원을 그리고 나니, 연이어 3백만 원, 2백만 원, 50만 원, 30만 원... 등 각자의 형편에 따라 자진 분담 성금의 약정액을 기록 서명하였다.

  다음은 단합대회에 참석치 못한 일족들의 현보 구하기가 문제였다. 재실 재건추진위원회 발족 취지문을 발송하였다. 30세 이상 세대주는 30만원 이상의 성금을 분담하기로 결의했다는 내용도 담았다. 그리하여 5년 동안에 중간 진행상황을 알린느 통지문을 20회 이상보내고 나니, 점차 재실 중건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간에 주소 파악자도 1백 명을 넘었다. 5천만원 가량의 성금이 답지되었다. 기존 재산과 봉상금을 합하여 1억 원 고개를 넘게 되고보니 자신감이 좀 생겼다. 여기에 더욱 용기를 북돋운 것은 IMF당시인지라, 금리가 연20프로 이상 되어 3천만원넘는 이자기 붙었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도운다고 했던가. 뜻밖에 국헌공 문중 산 일부가 진주~산청간 국도 확장 부지에 편입되면서 또 2천만원의 보상금이 나와 문중 예금통장의 수치를 1억5천만 원으로 밀어 올렸다. 이런 사실들을 일족들에게 일렸더니 이것이 효력을 발생하였다. 처음 재실 재건 성사에 반신반의했던 일족들이 30만원이상 갹출키로 한 문중 결의에 반응이 미지근했었는데, 이런 상황을 보고는 이제는 안도감이 생겼는지 무루던 성금 갹출에 현조를 해오게 되었다.

  용기 백배하여 문중회의를 열고 부지 물색에 나섰는데, 입맛에 맞는 떡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변바른 남향 산자락이 적당하 싶어 가보니 부지가 1백 평도 안되어 혐소하다. 돈도 받지 않고 희사하겠다는 3백 평 논이 있었는데, 땅 모양이 길기만 하고 폭이 좁아 집을 앉히기가 옹색하였고, 또 어떤 곳은 묘지 바로옆이거나, 옥벽이 가팔라 부적당하였다. 결국, 엣날 뱃사공 집터 218평이 대상에 올라 여기에 낙점이 되었다. 엄혜산을 등지고, 경호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였다. 다만 남향이 아니고, 서향집으로 앉혀야 하는 게 아쉬움이었다.

  건축업자의 선정에 들어가 추천받은 세업자를 대상으로 검토를 해보니, 큰 업체는 건축비 견적이 높았고, 근년에 재실 세채를 지은 실적이 잇다는 개인 업체가 공사비가 낮아 선정이 되었다. 본인이 지었다는 재실 두 곳의 현장 답사를 했다. 마침 그 중에, 본채16평, 대문집4평, 도합 건평 20평이라는 의령에 있는 모재실을 구경하고 그대로 지어 달라고 하였다.

  2002년 10월 13일 기공식을 한 달 후에 상량식을 가졌다. 그리하여 1년 가까운 공사 후에 성경재가 완공되었다.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욕심이 생겨『국헌실기』문집을 후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해 나누어주고 싶었다. 다행히 번역은 삼종제 병희군이 할 수 있었다. 약 2백페이지 되는, 원문 국역문 병합본을 발간하여 준공식 당일 내빈과 일족들에게 배포하기로 하였다. 재실 중건 기문(記文)과 주련(柱聯)을 걸고, 성경재 중건 준공 기념비도 입구에 세우고 보니 제접 구색이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2004년 4월 18일 2백여 명의 내빈과 일족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마치고 나니, 무거운 짐을 벗게 되어 이젠 홀가분한 기분이요, 해방감마져 든다. 7년간에 걸친 과정을 되돌아보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큰 종사(宗事)를 이룩했다는 보람을 느낀다. 특히 소요경비를 특정인 몇 사람이 부담한 것이 아니고, 여손을 포함한 120명의 후손이 각자의 형편에 따라 자진하여 응분의 협조를 했다는 면에서 더 보람을 느낀다. 또 『국헌실기』번역을 타인의 손을 빌지 않고 후손에의해 완역할 수 있었던 데에서도 보람을 느낀다.

  종사(宗事)는 선대(先代)를 위하는 일이다. 나무에서 뿌리를 가꾸면 가지와 잎이 무성해짐은 대자연의 섭리이다. 대를 잇고 살아가는 인간에 있어서 선조는 뿌리이니, 선조를 위하고 섬기는 것은 곧 뿌리를 가꾸는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선대를 위하는 일은 곧 후손이 번창하는 길로 동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싶다.
  부모는 나의 뿌리요, 조부모는 뿌리의 뿌리이다. 뿌리없는 나무가 없듯이, 부모 선조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부모와 선조를 섬기는 정신은 꼳 효정신이니, 이는 인간 윤리 도덕의 기본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이번에 우리 국헌문중에서 성경재를 중건한 것을 뿌리가구기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은 이를 계기로 더욱 단합하여 성경재를 효행정신을 실천하는 구심점으로 활용하고 제사를 정성것 지내 나가고자 한다. 더욱이 국헌조께서는  문집에 보면, 스스로를 속이지 말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라'는 '毋自欺愼其獨(무자기신기독)'을 좌우명으로 벽에 붙여두고 실천하는데 힘썼다고 하니, 이같은 올곧은 정신을 우선 나부터 실천하고, 후손들에게도 대대로 전함으로써 깨끗한 세상 만들기에 일조를 하고 싶다.

  나는 우리 문중에서 성철스임이 태어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고, 국헌공과 같은 올곧은 선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 뿌리에 그 가지가 아니었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