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 초
오늘은 벌초날이다. 해마다 일요일을 택했었는데, 올해는 교통 혼잡을 피해 토요일에 가기로 하였다. 따라서 아들놈은 직장
근무로 참가 못하고 부산의 종제 하나와 당질, 나의 아내, 그리고 시골사는 종제, 합해 5명이 단성면 묵곡리 선산 동네로 집결했다. 윗대 묘소는
다른 사람들이 하기로 돼 있어 5대조까지의 묘소를 차례로 벌초를 하게된다. 나는 동참은 하엿으니 기운이 브치어 제대로 작업도 못하고 그냥 구경만
하는 형편이 되었으니, 참여에만 보람을 느끼는 꼴이 되었다.
고조부 고조모의 묘소에는 잡초가 그리 많지 않았으나, 그밖의 묘소엔 잡풀이 우거져 있어 예초기로 베었는대도 상당 시간이 소요되어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고조부와 조부의 선소 가는 길이 가장멀고 올라가는 길도 험하다. 낫으로 가시 덩굴과 잡목의 가지치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얽히어 있다.
조부모 묘소의 한 모퉁이에는 벌집이 있었다. 다행이 종제가 이를 먼저 발견하였기에 그 풀무더기는 손을 대지 않았다. 텔레비젼에서 벌초하다가 벌에 쏘여 부상을 입는 사건이 여러 건 보도되었기에 미리 대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묘 봉우리마다 한 위씩 벌초를 마치고는 경건한 마음으로 告由를 하고 절을 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추석을 앞두고 저희들이 유택을 살펴르리고, 벌초를 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저희들이 오늘날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덕분이라 생각하고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핏줄을 이어 받은 저희는 선대의 이름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제각기 성실하게 살고 있아오니, 부디 안심하시고 지하에서나마 편안히 영민하시옵소서."하는 마음으로 함께 엎드려 고개 숙였다.
절을 올리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아침 일찍일어나 출발해 온 보람을 느끼고 쾌감을 맛볼 수가 있었다. 대저, 벌초는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일까? 무덤은 곧 돌아가신이의 집-幽宅이니, 그 유택을 보살피는 것은 자기를 이세상에 있게 해 주신 선대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대대로 내려가면서 선조의 고귀한 정신을 받들고 가문을 이어나가겠다는 것을 마음속에 다짐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1년에 한번, 선조의 유택을 보살피고 벌초를 하는 것은 후손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라 할 것이니, 조상 숭배의 그 정신이 소중하다 하겠다.
나는 산길을 내려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어 본다. 올해 내나이 팔순에 접어 들었으니, 이제 앞으로 이길을 몇 번이나 더 오르내릴 수 있을까? 올해도 벌써 들숨 날숨이 부딪쳐 약간의 부감감을 느끼게 되니 말이다. 72세에 작고하신 내 아버지는 생전에 한 해도 그르시는 일 없이 성묘를 계속 하셨으며, 94세까지 쟁쟁하게 살다 가신 숙부님께서는 90을 넘긴 해에도 한두 번 우리와 함께 성묘에 동행하시던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아왔다.
조상을 섬기는 정신은 곧 효심으로 통한다고 본다. 원래 효심은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라 하겠지만, 부모의 부모, 또 그 부모의 부모, 곧 선조를 섬기는 마음 또한 효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조를 섬기고 숭상하는 정신은 아름답다. 그러기에 '선조를 섬기면 잘 산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잘 살기위해 욕심 때문에 선조를 섬기는 것은 誠心이 아니다. 오로지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해 주신 조상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에, 섬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경지가 되어야 그것이 성심이다.
나의 윗대부터 부모와 선대를 섬기며 살아가는 유교의 가문에 태어난 것을 감사히 여기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나는 아들 딸에게도 항상 부모와 조상 섬기기를 몸에 배이게 하는 것이 자기 행복의 길이 된다는 것을 몸소 가르치려 애서왔다. 이것이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미지수이다. 결코 조급한 성과를 재촉하고 싶지 않다. 다만, 자신들이 자녀를 양육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깨닫고, 효행 정신을 후손들에게 자연스레 계승해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요즈음 한가지 걱정되는 게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 가운데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괴상한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내세우는 이유는 두가지, 즉 하나는 교육비가 너무들어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자식 양육 때문에 인생을 엔조이하는데 장애가 되니, 소중한 내 인생을 자식에게 희생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라 한다.
참으로 해괴망측한 발상이 아닌가? 인간으로 태어난 자 모름지기 2대 과업이 있다고 할진대, 하나는 자녀를 낳아 훌륭히 키워 후대를 잇게하는 일이요, 다음 하나는 자기 자신이 직업을 통하여 사회에 봉사함으로써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다. 이는 인간의 과업이자 의무이다. 그런데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것은, 나는 비록 부모님 덕분으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내 인생만은 결코 자식에게 희생할 수 없다는 논리이니, 열매만 따먹고 씨앗은 퍼뜨리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이기주의자가 또 어디 있는가?
조물주가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종족을 보존해 나가도록 마련해
놓았거늘, 자신만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 후손 이어나가기를 거부하는 행위는 자연의 섭리에도 역행하는 것으로, 신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최악의
죄인이다.
젊은 세대 들이여! 그대들이 어찌하여 인간 윤리에 위배되고, 자연의 순리에도 역행되는 2중의 죄인이 도려는가? 마음을 돌려
먹을 지어다.
한편으로는 그년에 와서 벌초객, 성묘객, 시사 참여객이 증가함으로써 교통체증까지 빚고 있는 형상을 보고서, 아직 우리의 미풍양속인 조상 섬기기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는 증좌를 버는 것 같아 반갑고 희망을 갖게 된다. 이것은 긑ㅇ로만 나타나는 조상 섬기기의 일시적인 허상이 아니고, 우리의 전통사상인 효정신의 살아있음을 말해주는 표상이기를 바란다.
20세기 최고 석학 토인비는 "한국에서 장차 인류문명에 기여할 것의 하는 효사상이다." 라고 극찬하지 않았던가? 공자도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하였다. 나는 벌초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우리민족이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부모와 조상 섬기기-곧 효정신의 꽃을 피워 나가게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 보았다.
[약력]
월간 수필문학
천료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회장역임
영호남수필문학회
회장역임
부산수필문학협회 회장(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부회장(현)
수필집'초상화 그리기' 등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