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하산길
노년은 되돌아보면서 산다는 말이 있다. 나의 산행 이력을 회고하면 40년이 넘은 것 같다. 30대 중반 아침등산이 시발점이 되었고, 그후 일요일의 1일 산악회에 동참하여 등산을 한 적도 있었다. 비회원이라 데려온 자식 취급당하는 것이 싫어 정식으로 대암신악회에 가입하엿으며, 나이값으로 산악회장직을 맡은 적이 있었다.
산행의 과정은 등산길과 하산길로 편성된다. 목표 산의 진입로에서 출발, 정상까지는 등산길이요, 거기서 성취감을 나누면서 정상식과 마음에 점찍는(点心)행사를 마치고, 오후엔 정상을 출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 코스다. 때로는 도중에 몇 개의 중간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경우도 잇어 등산길, 하산길이 반복되는 수도 있다.
간혹 등산길에서 땀을 흘리다가 하산길을 만나면 반갑기는 한데, 행행을 오래 하다 보면 그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내리막길을 만나면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지만 곧 오름길이 기다리고 있기 바련이니 산은 매우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려가다가 오르기가 더 힘들어 차라리 오름길을 계속 오르는 것이 낫겠다는 심정이 된다.
내가 속한 산악회 회원 중에 등산 기질보다는 하산 기길이 유독 발달됐다는 산우가 있다. 등산길에서는 남달리 땀을 낳이 흘리고 꼴지로 후미대장 역할을 하기가 일쑤인데, 하산기에 접어들기만 하면 제 세상을 만난 듯 펄펄 나니 하신 기질이 탁월한 산사나이로 별명이 붙은 것이다.
등산길과 하산길은 산행의 연속이지만, 그 과정은 확연히 다른 데가 있다. 등산길은 육체의 70퍼센트를 점유한 수분을 열을 가해 육수(肉水)로 변질시며 흘려보내는 과정이다. '다리 들어올리기'운동으로 열을 올림으로써 노폐문을 짜내는 과정이니,그만큼 히들고 젖 먹은 힘까지 동원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에 비해 하산길은 육체적 에너지는 덜 소용되는 편이니 들숨 날 숨을 조율하기는 한결 수월해진다. 등산길은 도전의식을 갖고 우직하게 걷는 데민 주력해야 하는 과정이고 하산길은 덤비지 말고 조심스레 마무리를 하면서 걸야야 하는 과정이다.
얼핏 생각하기엔 하산길은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생각되기 싶다. 그러나 겸험 쌓인 산쟁이일수록 하산길이 더 신경쓰인다고 말한다. 실제로 산행 사고는 등산길보다 하산길에서 더 많이 난다. 등산길은 힘은 들지만, 한 걸음씩 착실히 발을 옮겨 디디기만 하면 된다. 반면에 하산길은 내리막 경사길이기에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가장 조심하여야 하는 것이 미끄러짐과 헛디딤이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바닥요철이 많은 등산화를 신는 것이지만, 이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코 다친다. 심지어 갈바닥 위에 옆으로 뻗어난 나무뿌리에서도 미끄러져 넘어진다.
몇 년 전 등산 애호가 한 사람도 산악회 등산 행사를 앞두고 혼자 사전답사 차 갔다가, 하산길에 눈덮인 솔가지를 헛디뎌 허방에 빠져 실족사를 당한 일이 있었다. 또 60대 중반인 한 친지는 아침등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길바닥에 뻗은 매끈한 나무뿌리를 디뎠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목뼈가 부러져 한달간 병원 신세를 졌으나, 결국 불귀의 색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 시점에서 나의 걸어온 인생을 산행에 비유해 되돌아보고 싶어진다. 어릴 적부터 선생이 되고 싶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져 청년기에는 좋은 교사가 되기위해 마치 산행인이 정상을 행해 한발자국씩을 착실히 디디면서 오르듯이, 옆눈 팔지 않고 교상의 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다 보니 분에 넘치는 교감, 교장, 장학사, 연구관이 되기도 하였다. 오로지 정상만을 향해 걸을 적에는 산도 보이지 않고 시가지도 볼 수 없었지만, 정상에 올라서면 눈아래 전개되는 여러산이 한눈에 보이고, 동네가 보이고, 세상이 보이는 것과 같이, 묵묵히 교사의 길만 걷고 있을 적에는 막상 교육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모르고, 무조건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줄 알고 지냈는데, 교직의 책임자리에 올라서고 보니, 조망의 눈이 틔어 비로소 교육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그리하여 지식교육에 치중한 나머지 인성교육을 소홀시하고 임시위주의 교육을 중시해 온 것이 후회되기도 하였다.
등산인이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천하를 얻은 듯 기쁘고 보람을 느끼듯이, 나도 한 학교를 맡아 정상의 자리에 서고 보니, 자아실현의 꿈을 성취한 듯 기쁨은 헤아릴 수 없고, 보람 또한 비길 데가 없었다. 산행인이 온몸에 육수가 줄줄 흐르면서도 정상을 답파하는 순간의 보람을 위해 한 걸음씩 벽돌 쌓듯 포가 올리는 것은 모든 직업인이 자신의 소망 성취를 위해 온갖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과 같다고 하지 않겠는가?
나는 지금 인생 하산길을 걷고 있다. 예날 같으면 상늙은이 취금을 받았겠지만, 요즘은 중늙은이밖에 안된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ㅇㄴ생칠십고래희라고 '고희'를 마치 큰 벼슬처럼 예찬하였지만, 현대는 평균수명이 팔십을 육박하고 있으니, 두보는 지금 지하에서 자신의 시를 수정하기에 바쁠 것이다.
올해 내 나이 팔순이라, 자식들이 친척들을 초청, 산수연(傘壽宴)을 베풀어 주니 만감이 교차된다. 평균수명을 넘겨서 셍존하고 있으니 선택된 행운아로서 기쁨을 맛보는 듯하다. 이 세상에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와 조상님, 그리고 신에게 큰절을 올리고, 그동안 나를 가르치고 사랑해 준신 모든 분에게도 감사드리고 싶다.
무슨 일에서나 끜맺음이 중요하듯 하산길이 등산길 인생이 자신의 알맹이를 채우기에 여념없는 과정이라 한다면, 하산길 인생은 가진 것을 과감히 비우고 나 이외의 것들에게 따쓰한 눈길을 보내면서 살아야 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산길은 결코 등산 완료를 고하는 나팔 부는 시간이 나이라, 정상 답파의 기쁨을 만끽하고 생행의 진미를 차 마시듯 음미하는 마무리 시간이다.
여기서 실족 사고를 내면 땀흘려 정상에 오른 공이 10년공부 나무아미타불 되고 만다. 누워 떡먹기 식으로 안일시하다가는 다된 죽에 코 빠지는 결과가 된다.
나의 인생 하산길은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며, 올바른 사회 발전에 한줌 부엽토가 되고, 마지막 인생에 향기 섞인 여운을 남겨가는 과정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