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밥

  선적지 순례차 경북 양동마을을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 늦가을은 낙하의 계절이라, 버스 창문 너머의 경관을 바라보니, 단풍잎도 거의 지고, 열매도 다 떨어져 버렸다. 그런 가운데도 빨간 감이 군데 군데 달려 있는 것이 마치 저물어 가는 가을의 꽃으로서 삭막한 늦가을을 장식이라도 하는 듯하다.

  감나무에 달린 까치밥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어느덧 어릴 적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고향집에는 감나무가 다섯 그루가 있었다. 동편의 두 그루는 대감이라 하여 알이 그리 굵지는 않았으니 많이 열렸고, 서편의 두그루는 단성감이라 하여 남작한 큰 감이 열렸다. 나머지 한그루는 고등시(枾)로 굴고 살이 많아, 광의 독안에 묻어두었다가 겨울에 홍시가 되면 꺼내 먹었다. 다섯 그루에 달린 수백 접이나 되는 감을 모두 따는 데는 상당한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어릴 적 나도 간혹 일을 돕기 위해 나무위에 올라가 감을 따본 적이 있다. 감따는 도구로는 기다란 장대끝에 막대기를 비스듬히 줄로 매어 가위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는 여기는 기술이 필요하였다.

 이때에 나무마다 까지와 같은 날짐승의 몫으로 일부러 몇 개씩을 반드시 남겨두는 것이었다.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까치밥은 한 나무에 여남은 개는 남겨 두라고 하시면서 짐승에게 베푸는 자선심을 잊지 않으셨다. 지금 정상에 매달려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까치밥의 심정이 어떠할까 굼금해진다. 저들은 봄, 여름, 가을을 지내는 동안에 살아남기 위해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자랐다. 더욱이 빨간 완성형이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친구들이 낙하 신세로 떨어져나가지 않았던가? 그 간 모진 풍우나 벌레와도 싸우면서 무한한 매달리기 경쟁을 벌인 결과, 끝내 그 고통을 이겨내고서 드디어 영광스러운 홍실(紅實)의 대열에 끼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창 탐스러운 모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모두가 인간들을 위한 봉사의 길로 떠나 버리고 몇몇 친구만이 남게 되었으니 지금 그들의 심정이 어떠할까?

  두가지 경우를 상상해 본다.
  첫 번째는 저 까치밥은 지금 수많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왕따)을 당해 외로운 감정 속에 빠져 한창 불만에 가득 차 비관적으로 신세타령을 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싶고,  두 번째는 '천만의 말씀' 인간을 위한 봉상의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잇는 것이니, 수많은 동료 중에서서 까치밥으로 선발된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여기고, 늦가을 풍경 속에서 찬란한 꽃으로서 삭막한 정취를 조금이나마 감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전자는 부정적 사고, 후자는 긍정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어느 쪽이 맞을 지는 직접 까치밥의 말을 들어 볼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까치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문득 내가 인생에 있어서의 까치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문득 내가 인생에 있어서의 까치밥 신세가 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니 이는 또 어찌된 까닭인가? 나의 지난 역정을 돌아보면, 나에게도 청록의 시절을 지나 홍실(紅實)의 시대와 같은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 남의 부러움을 살 만한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같은 보람에 찬 시기는 지나가고, 누구로부터도 부러움을 받을 만한 모퉁이는 아무데도 지니지 못한채, 언제 염라대왕의 호출장을 받을지 멀는 까치밥과 같은 불안한 시점에 와있다.

  회갑을 지난 지는 벌써 까마득하고 인생칠십고래희라는 두보의 시에서 유래되었다는 고희 잔치도 출판 기념회를 겸해 치른 지 이미 7년이 되었으니 새해에는 싫건, 좋건간에 '기쁠 희'자, 희수(喜壽)의 나이를 맞아야 할 처지에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나와 동갑내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초등학교 동기생25명 중 현재 생존자는 눈을 닦고 찾아도 5명밖에 없고, 사법학교 동기 졸업생 50명 중 생사를 알고 지내는 벗이 5, 6명에 불과 하며 1백 명이 넘던 대학 동기 중에서도 현재 생존이 확인된 자가 10명을 넘지 않는다.

  그러니 이 모두가 까치밥 신세로 살고 잇는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수많은 동기생들 중에서 험난한 세상을 살고서도 남아 있다는 면에 있어서는 알단 요행, 또는 다행한 운명을 붙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오히려 감사해야 하겠다.

  장수(長壽)가 오복(五福)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이만하면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도 든다. 한데 이미 나는 까치밥 신세가 되었으니 언제 어느 '까치 사자(使者)'에 의하여 염라대왕 앞으로 안재되어 갈지 모르는 운명에 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고, 우골은 가루를 내어 법과 버무려서 산야에 뿌려 까치밥으로 삼게 함으로써 자연으로 돌아감을 미풍으로 여긴다.

  감나무에 달린 까치밥은 날짐승에게 봉사하기 위해 남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인생에서의 까치밥 신세가 된 나는 무엇을 위해 남아 남아 있다고 알 것인가? 사람은 원래 이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비록 까치밥 신세일지라도 감나무에서의 까치밥이 늦가을 농촌의 정경을 대표하여 최후의 꽃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삭막함을 덜어주려고 애쓰듯이 나도 인생의 시들어져가는 고비에서나마 마지막까지 무엇인가 삶의 여향(餘香)을 풍기다 가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