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비명(非命)
얼마 전 M아파트에 살고 있는 H노부부가 옥돌 침대에서 자다가 전기합선으로 추측되는 화재가 발생, 얼겁결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사고사를 당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사건을 보는 시각에 두 가지 해석이 있었다. 하나는 억울한 죽음으로 비명에 갔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제 운명대로 살다갔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예상 못했던 자연사나 재해로 인한 사고사로 목숨을 잃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나의 친지 A씨는 동창모임에 나가 술을 곁들인 식사를 끝내고 화장실에 들었다가 실족으로 넘어져 뇌진탕을 일으켜 실려 갔으나, 끄태 말문을 닫고 말았다.
또 한 친구 J씨는 아침등산을 위해 6시에 아파트를 나와 찻길을 건너다가 서투른 운전사의 오토바이에 받쳐 긴급수송으로 병원에 운반되었으나 신음소리만 연발하다가 끝내 눈을 뜨지 못하는였다. 또 전직 동료였던 B씨는 친구들과 어울려 기원에서 바둑판에 몰두하가가 까닭모르게 쓰러져 119차에 병원으로 달려 갔으나 멀 듯 모를 듯한 입속말만 남긴체 피안의 세계로 잠들고 알았다.
운명과 비명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고 싶어진다. 사람에게 운명이란 있는 것일까? 운명론자는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사람에겐 미리 정해진 운명이 잇는 것이 아니고, 운명은 자신이 만들고 개척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범부들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앞서의 옥돌침대 전기합선으로 저승손님이 된 H부부나, 호장실에서 실족사고로 뇌진탕을 일으켜 말문을 닫은 A씨나, 아침 등산을 다녀오다 오토바이에 부딪쳐 숨을 거둔 J씨, 친구들과 함께 바둗 신선놀음 하다가 장난처럼 숨져간 B씨, 이들은 모두가 지난날 40년을 넘는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정년퇴임을 하였으며, 아들 딸 잘키워서 이제 편안한 노후생활만을 보너스로 박아 두었던 복노인들이었다. 그런데 느 노후의 안정된 생활의 꿈이 중도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으니 이것이 운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람의 운명은 다분히 타고나는 것 같다. 처음부터 돈을 물쓰듯하는 부자 아빠를 타고나는 복동이기 있는가 하면, 반듯한 셋방 한 칸 갖지 못한지지리도 가간한 부모슬하에서 고고의 소리를 터뜨리는 가난뱅이도 있다. 이것이 태어날 때의 운명이 나닌가?
그런데 운명의 신은 장난을 좋아한다. 부자 아빠를 타고난 복둥이가 반드시 성공하는 인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고, 인생을 마감할 적에는 오히려 가난이로 태어났던 쪽이 자수성가를 함으로써 인생의 승리자로 등장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함을 볼 수 있으니, 여기에 인생의 묘미가 있다고 하겠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 부자 아빠를 타고난 사람에게는 평생의 행복이 보장되고, 가난뱅이 아빠를 타고난 사람은 관속에 들 때까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생항로를 헤매어야 된다면, 인생은 얼마나 재미없고 불공평한 마라톤이겠는가? 운명은 결코 고정되지 않고 유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인생의 모미기 있다. 그러고 보면 운명의 신은 오히려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전기합선으로 불귀의 객이 된 H부부를 두고 비명에 갔다는 생각을 갖기 쉽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눈을 돌려 노인병원에 가보라. 거기엔 치매에 걸렸거나 반실불수의 환자가 수용돼 있는데, 이들은 비록 숨은 쉬고 있으나 식물인간으로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생존은 하고 있지만 생활은 못하고 있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이니 이러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빨리 보내달라고 한다.
노인 인구의 증가에 따라 요즘 효도병원이 날로 번창하고 있다. 노인네들의 공통적인 희망사항이 장수하는 데 있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가 잠자듯이 편히 갔으면 하는 쪽으로 쏠리고 있다. "그 친구 편히 잘 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불경의 소리'를 한다 싶었는데, 여기에 동조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들이 여럿이 있었다.
이 고개를 끄덕임은 결국 모두가 고통없이 가는 편안한 죽으을 갈망하고 잇다는 표현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순가적인 불의의 사고사를 보고 오히려 그것을 부러워하는 세상이 된 것이 아닌가?
운명이 있다고 할 것인가, 없다고 할 것인가. 나는 100% 운명론자는 아니고, 90% 운명론자임을 자인 하고 있다. 이생에서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해 나가는 면이 상당부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인생은 역시 운명의 신에 의하여 조종당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앞서 예거한 송칭 비운에 갔다는 사람들이 억울하가고 생각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러나 차마 죽지 못해 목숨을 연장하고 있는 식물인간, 그들에 비하면 얼마나 편안한 생을 마감하는 순간인가?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주어진 운명에 기꺼이 순응하는 자세야말로 인간 본연의 자세가 아닐까?
인생에는 아예 비명이란 없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속에서 말하는 '비명' 그것이 바로 운명인 것을 어찌하랴, 비명이 곧 운명임을 깨닫고 살면 삶이 보다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H씨, A씨, J씨, B씨여! 결코 억울 하다고 생각일랑 떨쳐보리고 부디 극락왕생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