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회고록
어늘은 나의 팔 순 잔칫날이다. 나의 기출(己出)인 4남매 내외 8명과 종제, 종매, 조카들, 그리고 외손을 포함한 집안 손자 손녀들 약 40여명이 모여 축하 자리를 만련해 주었다. 맏 사위의 사회로 시작된 축하연은 오늘 모임에 대한 사회자의 취지 설명에 이어 자식들을 대표한 아들의 인사말이 있었다.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아버님 팔 순을 맞게 되어 기쁘다는 말, 계속 부모님께서 여생을 편한히 보낼 수 있도록 잘 모실 것을 다짐한다는 요지의 인사말을 하였다. 이어서 헌수(獻壽)의 술잔도 받고, 일곱 살 손녀로부터 축하 꽃다발도 받았다.
사회자가 "다음에는 오늘의 주인공이신 아버님께서 답사를 겸한 인사말씀을 하시겠습니다"고 하여 내가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 인생팔 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살아온 여든 인생을 회고하는 자리였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인가. 나는 팔십 인생에 무엇을 하였는가 등등을 돌아보게 되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일생동안에 해야 할 과업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자식을 낳아 이를 잘 길러 가문을 잇게하고 사회에 기여케 하는 일이요, 또 하나는 나 자신이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혀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사회 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라 한다. 종족 보곶과 직업을 통한 사회봉사, 이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부하된 책무요, 의무다.
나는 결혼을 해서 딸 셋을 낳은후, 막내로 가계를 이을 아들 하나를 점지 받았으니, 종족 보존의 책무는 다한 셈이다. 그리고 젊을 적에 박봉으로 셋발살이를 시작, 온갖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3녀 1남을 차례로 대학까지 졸업을 시킬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비록 명문 대학은 아니었지만, 재수 하지 않고 순조롭게 학업을 마쳐 준 자식들이 고맙다.
또한 부모님은 회갑연을 지낼 때까지는 시골에서 사시다가, 60대 중반에 이르러 부산으로 합가하여 함께 사셨다. 그 후 어머님은 그로부터 27년을 함께 모실 수 있었는데, 아버님께서는 7년간 사시다가 향년 72세로 세상을 뜨셨으니, 아직도 아쉬움을 떨 칠 수가 없다. 더욱이 아버님께서는 고혈압으로 자식에게 임종의 기회도 주시지 않고 갑자기 타계하셔서, 나는 그 후 아버님의 혈압관리를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사회를 위한 봉사적인 면을 회고해 보면, 나는 어릴적부터 교육자가 꿈이었다. 다행이 그 꿈을 펼쳐 40여 년을 교직에 몸담아 정년퇴임까지 소임을 끝내고 큰 결함없이 물러났으니, 자아실현의 소망을 성취시켰다고 자위하면 아잔인수 격인 자평이 될런지? 사범학교 시절 교육학 시간에 '교직은 성직(聖職)'이라는 말을 귓속에 각인(刻印)하면서 사도(師道)를 익혔었기에 나름대로의 정신무장이 되어 있었으므로, 교직생활에 보람을 느끼며 생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직업이든 권태기가 있는 법이며, '남의 떡이 굵어 보인다'는 속담의 의미처럼 교직이 초라하게 보여 어려운 고비도 있었으나, 용케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정년퇴직 후 10년을 훨씬 넘긴 오늘날의 교육계를 돌아볼 때, 학교가 흔들리고, 붕괴되고 잇다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 마음에 걸리고 안타까울 때가 많다. 교원 정년단축 이후 스승 존경 풍토가 사라져 가는 것 같아 가장 마음 아프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 하루 속히 교육이 바로 서게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아무튼 나는 동경하던 교직에 발을 디뎌 정을 쏟고 보람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으니 개인적으로 행운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사회가 인간성을 상실한 이기주의적 사회로 치닫고 잇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지난날 입시위주의 교육에 치우쳐 인간교육, 도덕성 교육을 소홀히 함으로써 빚어진 결과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되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고, 회오(悔悟)의 정을 갖게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옛날에는 회갑을 맞기도 어려웠고, 칠십까지 살기란 더더욱 하늘의 별 따기여서, 두보(杜甫)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詩句를 남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는 고희연을 10년이나 지난 산수연(傘壽宴)을 맞았으니 여러모로 감사해야 하겠다. 우선 나의 친구들 중에는 고희를 맞기도 전에 염라대왕 호출장 받고 간 사람이 허다하고, 목숨은 부지 하고 있으면서도 병석에 누워 자식들을 괴롭히고 있는 이가 있는데, 나는 자아실현의 꿈을 이룬 후에 아직도 아내와 함께 그런대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니 감사할 일이 아닌가?
또 나의 소생인 네 이이들이 중도에 하나도 꺾이지 않고 고이 자라서, 각기 직장이나 가정에서 소임을 다하고 있으니 이또한 감사하고 싶다. 그리고 보면 나의 인생은 5단계 평가를 한다고 하면, 중간 평점인 '미'의 단계는 넘어 '우"의 권역 가까이에 도달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위로 거듭 감사하고 싶다.
이제 나에게 남겨진 과제는 '여생을 어떻게 건강하고 보람되게 보낼 것인가?'이다. 현대 의학의 발달로 잘만 하면 120세까지 살 수 있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노인 병원엘 가서 남의 신세를 지고 있는 반신불수나 치매환자를 보게되면,'저 정도가 되기까지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아심도 갖게 된다. 나의 아버지는 72세에, 어머니는 92세에 가셨다. 아버지의 경우는 예고 없이 가셨기에 아쉬움이 많았고, 어머니의 경우에는 말년에 2년쯤 치매 현상이 있어 아들 며느리에게 간호할 기회를 주셔서 고맙기도 하였다.
그럼, 나는 얼마나 살다 갔으면 좋을까? 평균 수명을 이미 3년전에 넘겼으니, 덤으로 사는 인생인 셈이다. 어머니 만큼 살다 가려면 아직 12년이 남았는데, 그 정도로 살다갈 수 있을까 하는 욕심이 문득 고개를 내민다. 아차, 부질없는 공상에 빠지는 것 같구나. 생사는 오로지 운명의 신이 지배하는 것이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