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처럼
내 고향엔 지리산이 있고, 거울처럼 맑다는 경호강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산 좋고 물맑은 고장이라고 산청(山淸)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실매동 마을에는 우람찬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렇게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자연 환경을 갖춘 고향을 갖게 된 것이 나의 성장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양소가 된 것 같아 고마운 생각이 든다.
마을 느티나무의 수령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최소한 300~400년쯤은 되지 않았겠느냐는 게 일반적인 추측이다. 이 느티나무는 내 어릴 적이나 8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이나 그 모습에 변화가 없다. 그 간에 키가 얼마나 자랐으며, 몸 둘레가 얼마나 굵어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언제나 예모습 그대로이니, 지금이 청년기인가, 장년기인가, 아니면 노년기인가, 언제나 풀,ㅁ이 창창하니 만년청년이라 해야 하 것인가.
고향 마을 느티나무는 큰 그늘을 만들어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쉽터를 제공하고, 때로는 마을 주들의 대담이나 토론을 위한 광장을 펼쳐 주기도 하였다. 동민들에게는 너밭에 나가 담흘려 일하다가, 오며 가며 판죽 같은 땀을 식혀 주는 고마운 안식처가 되기도 하였다. 고향집이 느티나무 가까이 있었기에 쉽터를 찾는 시간이 잦았고, 그 그늘에서 팩을 읽기도 하였다.
고향의 느티마무는 마을의 수혼신이나 다름 없었다. 마을 입구에 버티고 서서 동네를 침범하고 해치려는 자가 감히 준동을 못하게 하는 위업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 우람한 정자나무를 대하면 숙연해지는 마음이 바람처럼 일어난다. 이처럼 고향 마을 느티나무는 하늘을 받치는 큰 우산으로 온 동민들을 닾어주고 감싸 안아주는 고마운 존대였다. 이런 연유로 향리를 떠나 타향살이 50년이 된 지금에 와서도 고향마을 느티나무는 내 마음속에 우뚝 자리 잡고 있다.
요즈음도 간혹 고향엘 방문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느티나무가 반가이 맞아준다. 느티나무가 풍기는 따뜻한 정서 때문에 '고향'하면 제일 먼저 여러 가지 나무들이 생각나고 많은 나무 가운데 느티나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느티나무! 나는 그대 앞에 서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그대는 참으로 육중하고 웅장하기도 하지. 다름 나무와는 달리 아무도 기위로 다듬어 주지 않아도, 스스로 큰 우산을 만들어 정자나무로서의 아늑한 모양을 이루어가면서 자라 주니, 나는 그대에게서 진짜 자율(自律)을 배우게 되었다오. 또 무게가 있어 경솔하지 않고, 무한한 풍상을 겪고서도 속으로로만 견뎌내니 인고(忍苦)의 수도자요, 어진 선비와도 같도다. 어찌 그 뿐이랴. 그대는 하늘조차 받치는 커다란 우산으로 모든 이를 안아 주고, 불볕 같은 햇살도 가리어 보호하는 포용략을 지녔으니, 이처럼 도량 넓은 이를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처럼 느티나무는 무게 있고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알며, 인고의 미덕을 갖추었기에 나는 느티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다. 언젠가 내가 어느 신설학교를 맡아 교목(校木)을 정할 적에도 여러 선생님들에게 느티나무를 교목으로 제정할 것을 제의한 적이 있다.
고향 느티나무처럼 웅장한 느티나무야 비단 내 고향 마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적지 순례'등으로 시골 여행을 다녀 보노라면, 우람한 느티나무를 만날 때가 더러 있다. 그 교목(喬木)아에 서기만 하면 왜인지 마음이 숙연해지니 이는 무슨 까닭일꼬? 아마도 나의 어릴적부터의 고향 마을 느티나무의 인상이 수호신으로 인각되어 그 상념이 되살아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모습이 얼마나 민음직스러운가. 마치 피라미드처럼 폭삭하게 자리잡혀 안정감이 있지 않은가. 또 말없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잇는 듯한 그 모습에서 한 점 경솔함도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거기에서 우리는 온갖 삶의 고통을 이겨내고 의젓함을 풍기고 있는 선비의 모습을 읽을 수 있으니, 절로 존경심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실매동 고향 마을 느티나무의 정서 속에서 함께 정을 느끼면서 성장한 사람들 중, 생업을 따라 출향하여 도시에 살게된 향우들이 10여 년 전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이 뭉쳐, 해마다 한번씩 향리 마을에 모여'실매동민의 날'행사를 갖기로 합의가 되어 이를 실천해 오고 있다. 정해진 날짜는 매년 5월 첫일요일, 이날이 되면, 진주, 마산, 부산, 서울 등,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향우들이 고향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돼지도 눕히고, 꼬꼬닭도 비뚤어 잔치판이 벌어지고 노래자랑까지 푸짐하다. 이 행사 또한 고향 마을 느티나무 아래 쉽터가 적격이다.
몇 년 전에는 느티나무아래 공간이 마당이 비좁아, 행사에 불편을 느끼게 되매, 어느 출향인의 희사금으로 마을 개울의 양쪽 둑을 가로질러 콘크리트 다리를 걸쳐 넓은 공간을 확보, 바닥에 장판을 깔고, 지붕을 얹고 보니, 비오는 날에도 방안처럼 앉아서 정담을 나눌 수도 있게 되었다. 고향 사랑하는 향우의 성의가 얼마나 고마운가. 이같은 스스로의 애향심이 발휘되는 것도 다 고향마을 느티마무 그즐에서 샘솟은 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향! 이 말이 갖는 의미는 내가 출생하거나 자란 곳, 내 부모가 계신 곳, 나의 친족들이 집단을 이루어 사는 곳 등, 몇 가지 연고가 있을 것이다. 내 고향 생비량면 실매동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묘, 부모님이 묻혀 있는 곳이요, 친족이 살고 있는 곳이니, 고향으로서의 필요 요건이 충족되어 있는 셈이다. 여우가 죽을 떼엔 머리를 고향 쪽으로 돌려서 죽는다는 수구초심(首邱初心)이란 말이 있듯이, 나도 이제 공직생활에서 물러나 희수(喜壽)나이도 지나 팔순을 코앞에 두고 보니, 귀소본능(歸巢本能)의 심정이 일고 농촌에 대한 망향의 정에 잠길 때가 자주 생긴다.
얼마남지 않은 여생을 내 고향 느티나무처럼 포용력 있고, 의젓하고, 베풀면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인생을 마무리했으면 하는 소망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