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     記

 

Poe, Edgar Allan

 에드가·앨런·포우(Edgar Allan Poe)는 1809년에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같이 유랑극단의 배우였다. 이듬해에 아버지가 행방을 감춘후에 어머니는 빈곤 속에서 허덕이다 세상을 떴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3세였다. 煙草 수송업자 앨런의 養子로 들어갔는데, 버지니아 대학 재학중, 養父의 沒理解와 그의 도박에 의한 부채 때문에 퇴학하고, 보스턴에서 은거생활을 했다. 거기서 18세 때에 처녀시집<티무르>를 자비출판했다. 그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상관에 반항하여 퇴학처분을 받았다. 양부가 재혼하여 앨런가와 인연을 끊어 버리고 그 집을 뛰쳐나와 叔母 클렘 부인 집으로 옮겼다. 1833년에는 <병 속의 手記>가 당선되었고, 1836년에는 14세의 사촌 누이동생인 버지니아와 결혼했다.

  여러 잡지의 기고가, 편집자가 된 그는 평론과 소설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 중에서도 <그리이엄>誌에 <모르그街의 殺人事件>이하를 발표했던 무렵이 생애의 행복한 시대였다. 1843에는 <황금 딱정이>가 <달러·뉴우스페이퍼>에 일등으로 당선되었고, <검정 고양이>를 발표했다. 1845년의 <까마귀>의 詩篇은 그를 국민적 시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후 1847년에 버지니아와 사별한 그는 술에 취한 끝에 한데서 지낸 것이 탈이 되어 열병에 걸리었고, 아내가 죽은 후 불과 2년만에 그녀의 뒤를 따랐다.

  미국의 역사가이며 편집자였던 필립·반·도오렌·스터언은 포우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포우의 추리소설의 구성법은 거의 그대로 오늘날까지 답습되고 있다. 추리소설은 인쇄술과 마찬가지로, 일단 발명된 뒤에는 그 범위내에서 진보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예술적 가치에 있어서, 포우의 「모르그 街의 殺人事件」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어찌 보면 좀 극단적인 견해 같기도 하지만, 추리소설이라는 특수한 형식을 개척하기에 이른 포우의 경탄할 만한 업적을 찬양하려고 하면, 이밖에 또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포우가 미국이 낳은 소수의 세계적 시인이며, 뛰어난 단편작가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공포와 怪奇를 묘사했던 독자적인 문학자가 어떻게 되어서 추리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는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미국의 평론가 하워드·헤이크라프트는, 1840년의 사건을 전환 계기의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젠틀맨>誌를 쫓겨나서 허탈과 섬망 상태에 빠진 그는, 근근히 광명을 되찾기 시작했을 무렵, <클레이엄>誌의 편집자 지위가 제공되었다. 그는 극단적인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반응이 민속하고, 감정의 세계로부터 이성의 그것으로 옮겼다. 완전한 理知의 사람이 되고, 논리의 具現者가 되어, 기괴한 범죄에 사로잡혀 있던 그가 단호히 법죄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포우의 추리 내지 논리적인 것으로의 지향은, 갑작스레 눈뜬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작품을 처음으로 발표한 것은, <병 속의 수기>가 주간지에 일등으로 당선된 때로, 그 후 년 뒤에는 <멜첼의 장기사>를 <메센저>誌에 기고하고 있다. 손님 상태가 되어 자동적으로 장기를 두는 이상한 인형에 대하여, 포우는 몇 번이나 구경했고, 순논리적으로 모순을 지적하여 마침내 그 비밀을 간파하는 논리는 바람직하다. 이 방법은 후년의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이나 <마리·로제의 비밀>과 다를 게 없다.

   또 <모르그가의 살인사건>과 같은 해인 1841년에 <암호론>이 발표되었다. 역사상의 각종 암호기법에 대하여 풀이한 뒤에, 독자로부터 줄체된 암호를 풀어 보인 것이다. 이와 같이 범죄에나 수수께끼에나 전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던 포우는, 그 날카로운 분석력을 발휘하여 드디어 참신한 형식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1841년 4월호<그레이엄>誌에 게재된<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이 그것이다. 이것은 포우가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던 시절의 것으로, 그때 그는 조지·그레이엄의 호의로 잡지 창간과 더불어 그 편집장이 되어 있었다. 편집하는 한편 매호 소설이나 수필을 발표하여, 그 매력 있는 필치가 호평을 받았다. 그리하여 처음에 5,000부밖에 나오지 않았던 잡지가 3만7천부까지 나가게 되었으니, 그떼 벌써 그는 미국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 자품은 밀실범죄 트릭의 효시이며, 또 뜻밖의 범인에 있어서도 의표를 찌르고 있다. 이듬해의 <마리·로제의 비밀>은 미국의 사실담에 입각한 것이므로, 트릭의 재미는 볼 수 없지만, 분석추리의 과학주의가 주목된다. 그 이듬해인 1843의 <황금 딱정이>는 전반의 괴기소설적 부분과 후반의 암호해독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알파벳 頻出度의 통계는 이미 언어학자에의해 시도되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것을 교묘히 작중에 취택하여 괴기적 분위기에 융합시킴으로써 암호소설의 白眉篇을 이루고 있다.

   그 이듬해의 <네가 범인이다>는 뜻박의 범인의 가장 극단적인 형의 창시로, 그 후 이와같은 형식이 수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별로 진기할 게 없게 되었지만, 그의 착상은 높이 평가된다. 1845년의 <도둑맞은 편지>는 단편추리소설의 첫손 꼽히는 명작으로, 구성이 교묘하고 테에마가 참신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장 교묘히 숨기는 법은 누구나 눈에 띄는 곳이 면서도 눈치채지 못하는 데 있다는 맹점을 노린 주제가 효과적이다.

  포우는 추리(탐정)소설은 물론 탐정이라는 말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흉중에는 어던 방식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은 뻔한 사실이다. 광의의 추리소설은 포우가 아니더라도 조만간 나타나겠지만, 과영 그것이 엄격한 의미의 본격물이 되었을는지는 의심스럽다. 그가 후세의 본격추리소설의 原型을 확립하고, 게다가 중요한 트릭의 대부분을 창안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 탁월한 도창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포우는 추리소설의 세가지 조건을 확립한 것만이 아니다. 첫머리에 보매 불가해한 수수께기를 제출하고, 논리적인 검투 결과 의외의 진상을 해명해 보인다든가, 전문 수사관이 그릇된 해결로 만족하고 있는 데 대하여, 말하자면 전문가가 아닌 훌륭한 탐정역을 등용한다든가, 또 그의 존재를 역성드는 역할로서 常人의 이야기 상대를 등장시킨다든가 하는 것을 시도했다. 또는 데이터를 미리 독자에게 제시해 두고, 해결 후에 추리의 과정을 일괄해서 이야기하는 등이, 모두가 그 뒤의 추리작가들이 답습한 형식이었다.

   또 그의 자품에 나타난 所論, 이를테면 모든 불가능한 것이 제거되면, 뒈에 남는 것은 아무리 있을 수 없는 것일지라도 진상이라는 것, 너무나도 사람의 눈에 띄기 쉬운 곳인 만큼 도리어 맹점이 된다는가, 그가 발견한 推論의 공리는 현재에도 왕왕 이용되고 있다.

   포우가 취택하고 있는 트릭은, 밀실, 동물범인, 암호해독, 탐정즉범인, 맹점 이용 등으로, 그모두가 후대에 눈부신영향을 미쳤고, 응용작품이 속출했다. 중요한 트릭의 원형 몇 가지인가를 혼자서 안출한 그의 독창력은 눈부시며, 그 유례를 볼 수 없다. 도일이 포우에 대하여, <그는 추리소설에 관한 온갖 수법을 안출해 버렸으므로, 뒤에 잇달은 자는 자기자신의 창의를 발견할 여지가 거의 없다>
고 한탄한고 있는 것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포우가 추리소설 3부작의 주인공 듀팡을 프랑스인으로 하고, 무대를 프랑스로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황금 딱정이>의 무대는 마국의 서리반島이지만, 그 주인공 르그랑은 듀팡과 마찬가지로 추리·관찰 능력에 빼어나 있다. 이 르그랑에 대해서는, 이야기 줄거리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데, 그랑스 신교도의 오랜 家門 출신이라고 못을 박아 두고 있다.

   미국을 떠나는 것으로서 공상력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기 위해, 보지도 못한 北歐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몇편이나 쓰고 있다. 그러나 그 토지의 선택에는 충분한 고려를 하고 있어, 내용에 적절한 나라가 선택되어 있으므로, 추리소설의 무대나 주인공의 경우에도 깊은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헤이크라프트는, 미국 경찰이 뒤져 있엇기 때문에, 포우는 평생 프랑스와 프랑스인에게 관심을 모으고, 찬탄의 념을 지녔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1,800년대 초기부터 파리나 런던의 경찰에 범죄 수사본부가 늘었으며, 포우는 그 작품에 파리市와 경찰에 관한 보통 아닌 지식을 보여 주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세계 추리소설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모르그街의 살인사건>은, 본국에서는 그다지 큰 반향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5년 뒤의 1846년 6월 11일, 왕당파의 기관지 <꼬찌젠느>에 <재판소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未曾有의 살인사건>이라는 대문짝만한 표제로 이 작품의 모조품이 실렸다.

   1840년대의 프랑스 신문은, 그 구독자인 중산계급이 정치적 중심세력을 얻어, 정부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니, 그들은 享受者가 되었기 때문에 정치에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신문은 다른 흥미거리를 찾아내야만 했고, 또 가두독자까지 끌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결과 사회 기사와 신문소설의 연제가 성행했다. 이 두 가지가 다 공포와 죄악을 취급한 것으로, 재판소 기사가 다투어 읽혔다. 이와같은 성향을 타고 포우가 소개되었던 것이다.

   보오들레에르는 < 나는 1846년이가 7년에 잠깐 포우를 들여다보았지만, 실로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고 편지에 쓰고 있다. 그는 그 후로 열심히 포우의 작품을 찾기 시작했고, 그것을 번역하여 여러 잡지에 싣는 한편, 그것을 모아 다섯 권의 전집으로 만들었을 정도였다. 역자 자신이 깊이 포우에게 傾倒하여 정열을 쏟은 譯筆이었기 때문에, 원작의 미를 유감없이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우선 포우의 영향은 널리 詩壇으로 번저, 耽美. 絶望, 頹廢, 恐怖를 노래한 유럽 시인으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편 추리소설측에서는 즉시 모방 작품이 나타났지만, 본격적인 작품의 탄생은 1866년의 가블리오의 <루루제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포우에 매력ㅇ을 느낀 그는, 이와같은 것을 쓰고 싶다고 열망한 나머지 끈기 있게 준비·연구한 다음에 착수했던 것이다. 이것도 포우가 소개되고부터 20년 뒤의 일이다. 포우와 프랑스와의 인연은 이처럼 깊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