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윌슨」
Poe, Edgar Allan
작은 방들이 많이 있는 커다란 교사(校舍)안에는 서로 인접한 커다란 방이 대였 개 있었는데, 학생들은 거기 거처하고 있었다. 이러한 방들은 흔히 움푹움푹 들어간 구석이 많았다. 그것은 모두가 프랜스비박사의 경제적인 설계에 의해 지은 것으로, 학생들의 침실이 되어 있었다. 그곳은 매우 비좁았지만 그래도 사람이 들어갈 만큼은 되어 있었다. 윌슨도 이러한 데 거처하고 있었다.
우리가 입학한지 5년째 되는 해가 끝날 무렵인 어느날 밤, 방금 말한 그 싸움을 하고 나서의 일이었다. 나는 모두들 다 잠든 틈을 타서 자리에서 일어나 등잔을 들고 윌슨의 침실로 통하는 낭하를 조용히 걸어갔다. 지금까지 실패해 온 못된 흉계를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시키려고 나는 오랫동안 별러 왔었다. 그리하여 인제 그것을 성공시켜 내 마음속에 얼마나 큰 원한이 깃들어 있었는가를 보여 주려고 하였다. 나는 그의 방에 이르자 갓을 씌운 등잔을 방밖에 놓고 가만히 방안에 들어갔다. 우선 한발짝 들여놓고 그의 숨소리를 엿들었다.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자 나는 나와서 등잔을 들고 다시 침대로 가가이 다가갔다.
나는 우선 침대를 가리운 시트를 조용히 걷어 올리고 밝은 불빛이 환히 침대 위를 비치게 한다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감각은 얼음처럼 싸늘하였다. 가슴이 뛰고 무릎이 떨려왔다. 전신의 신경이 참을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 나는 숨을 거칠게 쉬며 등불을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이것이 과연 윌슨의 얼굴인가>나는 분명히 그런줄 알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만 같아, 학질에 걸린 것처럼 전신이 달달 떨렸다. < 어찌하여 이 얼굴이 나를 그토록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 나는 그의 알굴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두서없는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의 얼굴은 평소에 결코 이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깨어서 활발하게 움직일 때에는 이렇지 않았다. 같은 성명, 같은 몸집, 동시 입학, 그리고 내 걸음걸이며, 목소리와 음성 및 거동에 대한 악착같은 흉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이 단순히 오랫동안 농으로 흉내내어 온 알굴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두렵고 풀이 죽어 부르르 떨면서 등잔을 끄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그리하여 그길로 학교를 뛰쳐나와 다시는 동아가지 않았다.
집에서 대여섯 달 논 뒤에 나는 이튼 학교에 다시 입학하였다. 그리하여 이 짧은 기간에 프랜스비 학교에서 생긴 일들은 모두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적어도 그것을 생각해냈을 때의 감정은 전과 달랐다. 비극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내 감정의 확실성을 의심해 볼 만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하여 인간이 얼마나 경솔하게 행동하는가에 대하여 놀랍게 생각하는 동시에, 내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상상력에 대하여 쓴 웃음을 금치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튼의 생활이 그러한 종류의 의심을 일소해 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지각없이 사로잡힌 망상이 지난날의 화근을 씻어 버리고 모든 쓰라린 인상을 흘려버림으로써 과거의 생활의 가벼운 흔적만을 남겨 놓았다.
나는 여기서 나의 슬픈 음행(淫行)―― 법률을 무시하고 엄한 교직의 제제에서 벗어난 못된 행실을일일히 다 기록하고 싶지는 않다. 3년이라는 세월이 보람없이 지나가고, 악습은 깊이 뿌리를 박고 내 키만큼 자랐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걸친 유흥 끝에 나는 몇 사람의 불량학생을 내 방에 모아놓고 주연을 베풀었다. 우리는 밤늦게 모여서 새벽까지 흥청댈 작정이었다. 술은 넉넉하겠다, 가장 위태로운 유혹도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녘 하늘이 훠히 틀 무렵에 우리의 흥겨운 잔치는 절정에 도달하였다. 나는 화투와 술로 정신이 극도로 산란하여 연거푸 축배를 울렸다. 그때 방문이 사납게 열리더니 사환이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만나기 위해 응접실에서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술에 흥분되어 있었으므로 이 뜻하지 않은 훼방이 오히려 즐겁기도 하여, 나는 비틀거리며 방을 나와 현관으로 걸어갔다. 나지막하고 비좁은 이 현관에는 불이 켜 있지 않았다. 반달형으로 된 창문에서 들어오는 흐미한 새벽빛 이외에는 아무런 관선도 비치지 않았다. 문턱에 들어서자 나는 나와 같은키의 흰 모닌 프록(그 무렵에 유행되었으며, 내가 입고 있는 것과 꼭 같이 재단되어 있었다.)을 입은 청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것만은 흐미한 빛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얼굴 모습은 잘 알수 없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성컴성컴 걸어와서 내 팔을 붙잡고,
「윌리엄 윌슨!」
하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순간 나는 술에서 완전히 깨었다.
나는 그 사나이의 태도에 저으기 놀랐다. 내 눈으로부터 광선을 막으면서 쳐든 그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었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마치 나를 꾸짖는 것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특히 지난날의 기억을 불러 일으키고 마치 전기에나 닿은 것처럼, 내 마음을 찌르르하게 한 것은 이 단순하고도 귀에 익은 짤막한 속삭임의 질과 음조였다. 내가 잃었던 감각을 되찾았을 때, 그는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나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지만, 그 강도가 큰 것처럼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나는 몇 주일을 두고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언제까지 내가 하는 일을 훼방하고 성가시게 충고하는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그것을 알아내려고 하였다. 대관절 윌슨아린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 사람인가. 그러나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나온 연후에 그는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나는 그일을 잊어 버리게 되었다. 나는 옥스포오드에 갈 작정이었으므로 그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바로 그리로 가게 되었다. 부모님들은 부질없는 허영심에서 나에게 많은 돈을 보내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가지 해오던 방탕에 깊숙이 빠져 영국의 부자집 아들들과 어울려 돈을 물쓰듯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악습 속에서 타고난 난봉기가 더욱 조장되어 나는 날로 멍들어 갔다. 그리하여 미치광이 같은 유락(遊樂)에 젖어 절제 엊ㅅ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늘어넣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아무튼 나는 구구 못지 않은 나봉꾼이 되어 버렸다. 나는 날로 난봉이 심해 이름이 알려진 불량학생 중에서도 단연 인기를 독점하였다.
나는 신사의 체면도 돌보지 않고 수째 직업적인 노름꾼으로 나서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방면의 선수가 되어 학우들의 돈을 울거냄으로써 수입을 더욱 올리려고 하였다.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남아다운 명예를 등지고 이 엄청난 법죄를 예사로 저질렀던 것이다. 내 노름 친구들 중에서도 뚜렸한 증거를 갖지 않은 사람은, 옥스포오드대학의 가장 고상하고 여유있는 자비생(自費生)――명랑하고 솔직하고 관대한 윌리엄 윌슨이 이런 방탕으로 몸을 망치고 있다고 누가 의심하겠는가. 나한테 아부하는 사람은 나의 방탕을 젊고 분방한 청춘의 탓으로 돌리고, 나의 과오를 돌발적인 실수로 같주하였으며 가장 고약한 죄악도 하나의 장난으로 간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1년 동안을 떵떵거리고 지내고 나서, 글랜디닝이라는 돈 많은 귀족의 아들이 새로 입학하였다. 듣건대 그는 헤로데스 아티쿠스 못지 않은 부자이며, 또 그처럼 졸장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정신박약자임을 곧 알아차리고 그를 좋은 희생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와 여러 차례 노름을 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노름꾼의 상투수단으로서 일부러 져주고 그가 돈을 딴 연후에 점점 내 올가 속에 걸려들게 하였다. 드디어 결정적인 시기가 찾아왔다. 하루는 이번이야말로 마지막 결판을 낼 때러고 생각한 나는 프레스톤이라는 학생의 방에서 그와 만났다. 그는 우리 두 사람이 다아는 친궁로 나의 흉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 흉계를 눈가림하기 위해 8, 9명의 다른 친구들을 부렀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노름이 시작되고, 더구나 내 꾀에 빠진 그 사람이 자진해서 먼저 하자고 한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요컨대 나는 이러한 경우에 으레 사용하는 야비한 술책을 총동원하였다. 이런 술책에 빠지는 어리석은 자가 아직도 있었던 것이다. 노름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나는 마침내 글렌디닝과 결판을 내게 되었다. 노름은 내가 장기(長技)인 에칼데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우리 노름에 재미가 나서 우리를 삥 둘러싸고 구경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녁에 일찌감치 꾀를 부려 그를 술에 취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가 노름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보니 술기운으로만 그러는 것 닽지 않았다. 그는 금새 나한테 큰 빚을 지게 되었다.
그는 도도주를 한잔 죽 들이키더니 내가 예상했던 대로, 이미 건 막대한 돈을 갑절로 하자고 제의해 왔다. 나는 반대하는 체하면서 몇 번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는 마침내 화를 버럭 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못이기는 척하면서 그의 제의에 동의하였다. 결국 그는 한 시간도 못되어 네 갑절의 빚을 나한테 지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내 그물에 결려든 것이다.
그때까지 술에 취하여 불그레하던 그의 얼굴빛이 점점가셔지더니 이제 와서는 놀랍게도 무서울 정도로 창백해졌다. 나는 지금 <놀랍게도>라는 말을 썼다.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엄청난 부자라 지금 물론 많은 돈을 잃기는 하였지만, 그다지 큰 타격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그렇게 괴롭히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단연 그가 술을 많이 마신 탓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의 고약한 성품을 다른 친구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노름을 그만 하지고 주장하였다. 그때 그랜디닝은 실망에 찬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 주위에 있던 친구들의 표정은 그에게 매우 동정적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나 때문에 비운에 빠진 그가 모든 사람의 동정을 받고, 어떤 악마가 준 불행속에서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물에 걸린 그의 비참한 꼴이 방속의 분위를 침울하게 하였다. 모두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노름에 그다지 깊이 빠지지 않은 친구들이 나한테 던지는 멸시와 힐난의 눈초리로 하여 뺨이 따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때 갑자기 괴상한 침입자가 나타나 잠시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다. 넓직하고 무거운 문이 홱 열리더니 웬 사람이 들어닥치면서, 무슨 마술이라도 부리는 듯이 방안의 촛불을 다 꺼 버렸다. 우리는 꺼져가는 흐미한 불빛을 통해서 외투로 몸을 싼 내 카만한 사나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방안은 아주 어둡지는 않았으므로 그 사나이가 우리들 속에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무례한 행동으로 말마암아 놀란 가슴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그 사나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나지막한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 목소리는 내 뼈 속까지 울려왔다.
「여러분 내가 이렇게 행동한 까닭을 말씀드리지요. 그것은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해 불가피 한 일이었어요. 당신네들은 오늘밤에 그랜디닝과 노름을 하여 막대한 돈을 딴 사나이가 누구인지 잘 모르실거요. 나는 여러분에게 그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신속하고도 정확한 방법을 가르쳐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저 사나이의 왼쪽 소매 안과 수를 놓은 모오닝 래퍼의 넓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작은 꾸러미들을 조사해 보세요.」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 방안은 바늘이 덜어지는 소리까지도 들릴만큼 조용하였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획 나가 버렸다. 그때의 내 신정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나는 지옥의 두려움을 느꼈다고 쓸 수밖에 없다.
나는 반성할 여유가 없었다. 순식간에 많은 손이 나를 붙잡는 것과 떼를 같이하여 불이 켜졌다. 몸 수색이 계속되었다. 소매 안에서는 에칼테 노름에 핑료한 화투짝이 발견되고, 주머니 속에서는 두어 벌의 화투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지금 노름에서 쓰고 난 화투짝으로 좀 색다른 점은 노름에 능숙한 자들이 말하는 이른바<아론디>라는 종류의 화투짝이라는 것이었다. 즉 그림이 있는 패가 약간 아래 위로 휘어 있는 것이 특색이었다. 이런 식의 화투짝으로 속아 넘어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로 패를 끊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림패를 내 주게 마련이다. 그러나 능숙한 자들은 가로 패를 끊으모로 자연히 그들에게 찌꺼기패만 넘겨주게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발견된 후에 차라리 나에 대한 분노가 폭발되었던들 경멸이나 비웃음보다는 훨씬 견디기 쉬웠을 것이다.
방 주인은 허리를 굽혀 내 값진 털 외투를 집으며 말하였다.
「윌슨군, 이것은 자네 재산일세.(날시가 차기 때문에 나는 외투를 입고 나왔지만, 여기와서 그것을 벗어 놓았다.) 이제 자네의 놀라운 재주가 어디서 나왔는지 그 근거를 더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네.(그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외투의 주름상을 들여다 보았다) 자, 인제 이것으로 충분하네. 자네는 무슨일이 있든지 옥스퍼드를 떠나야 하네. 그리고 당장 이방에서 나가게.」
이때 내 체면은 물론 땅에 떨어졌다. 만약 갑자기 놀라운 일이 일어나 주위 사람들의 주의가 그리로 쏠리지 않았던들 나는 방 주인에게 폭행을 가하여 화풀이를 하였을 것이다. 내 외투는 값진 털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비산 물건인지는 여기서 말하지 않기로 하겠다. 나는 이런 쓸대없는 일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 외투의 재단은 내가 고안해서 맞춘 것이다.
프랜스톤이 방문 옆 마룻바닥에 있는 외투를 집어서 나한테 넘겨주었을 때, 나는 이미 내 외투를 들어서 팔에 걸치고 있었다. (물론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 받아든 외투의 모든 점이 내 외투와 똑 같았다. 나는 공포에 가까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나의 정체를 폭로한 그 사나이도 외투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방에 있는 사람 중에서는 나밖에 외투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프레스톤이 준 외투를 받아서 몰래 내 외투 위에 덧입고 경멸에 찬 엄숙한 얼굴로 방을 나왔다.
이튼날 나는 날이 밝기 전에 수치와 공포가 뒤섞인 이상한 괴로움을 느끼며 대륙을 향해 옥스퍼드를 떠났다.
아무리 도망쳐도 소용 없었다. 고약한 운명은 기뻐서 날뛰며 나를 뒤쫓아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상스러운 세력이 나에게 작용하는 것이었다. 파리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윌슨이 다시 내 일에 훼방을 놀기 시작하였다. 그 후 몇 해가 지났지만 나는 끝내 생활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악한아! 너는 로마에서 함부로 내 일에 간섭함으로써 훼방을 놀았지! 윈에서도, 베를린에서도, 그리고 모스크바에서도 그랬었지!> 그러니 내 마음 어느 한구석엔들 그를 미워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염병같은 포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세계의 끝까지 부질없이 도망쳐 다녔던 것이다.
나는 몇 번인가 몰래 중얼거렸다.
<그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무엇이 그의 목적인가?> 이게 대하여 나는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세밀하게 그 어처구니 없는 간섭의 형식과, 방법과 특질을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 그가 나를 방해하던지 다만 내 계획을 파괴학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 그 계획을 미리 설명이라도 하였더라면 도리어 큰 실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횡포에 대하여 나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토록 모욕적으로 거부를 당한 내 자유에 대하여 무엇으로 보복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의 적이 오랫동안(그 동안에 세밀하고 교묘하게 나와 똑같은 복장을 하려는 우습기 짝이 없는 마음을 먹고 먹고) 내 견해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간섭을 할 때, 언제나 얼굴을 나한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눈치채게 되었다. 윌슨이 누구이든 간에, 이것은 분명히 가장 어리석고 건방진 수작이 아닐 수 없었다.
학교에 있어서의 나의 훈계자, 옥스퍼드에 있어서의 나의 명예훼손자, 로마에 있어서의 나의 방해자, 파리에 있어서의 나의 원수, 네플스에 있어서의 나의 사랑이나, 그리고 이집트에 있어서의 그가 탐욕이라고 말하는 나의 소행을 훼방하고 파괴시킨 그가, 이렇게 고약한그가 내 어릴적의 윌리엄 윌슨――그는 친구이자, 동창생이요, 경쟁자――프랜스박사의 학교에서의 두렵고도 얄밉던 경쟁자――인 것을 내가 눈치채지 못한 줄 그는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파란 많은 희곡의 결말을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나는 드디어 그의 강압적인 지배에 힘없이 굴복하고 말았다. 그의 고상한 성격과, 엄청남 지식과, 능란한 실력을 목격할 적마다 느끼던 일은 존경심과, 그의 교만을 비롯한 그밖의 여러 가지 성질에 대한 공포심에 합세하여, 나는 그 후로 너무나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내 자신과 견주아 보고 그를 협오하면서도 암암리에 복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래에 와서 술독에 빠지게 되어, 고약한 천성에 술의 위력까지 곁들여 점점 나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혼자서 중얼거리고 망설이고 또 때로는 반항을 일삼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한낱 공상일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처럼 반항을 하게 되면 내 가책자(苛責者)의 마음은 점점 약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어쨋든, 나는 이제 크게 고무되어 앞으로는 경코 그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마음에 굳게 다짐하였다.
18××년의 카니발 때, 나는 로마에서 네플스공작, 디 프로그리오의 저택에서 열린 가면무도회에 참석하였다.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으므로 혼잡을 이룬 숨막히는 밤 공기가 견딜수 없이 나를 괴롭혔다. 게다가 붐비는 사람들 틈을 젖히고 다니자니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어서 나는 더 화가 났다. 나는 열심히(어떤 야비한 동기에서 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늙은 디 프로그리오의 젊고 명랑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미리 자기가 입을 비밀의 복장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의 모습을 흘끔 보자 곧 알아차리고 급히 그리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웬 사람이 내 어깨를 가볍게 치더니 죽기 전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나지막하고도 진저리나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가 치밀어 그 놈의 멱살을 잡았다. 예상했던 대로 놈은 나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프른 스페인 외투를 걸치고 칼을 꽂은 붉은 혁대를 허리에 띠고, 검은 비단으로 된 가면으로 얼굴을 싸고 있었다.
「이 악한아!」
나는 볼멘 소리로 외쳤다. 한미디 한마디가 성난 불길 속에 던져준 나무토막처럼 생각되었다.
「이 악한아! 죽도록 나를 따라다니게 내 버려 둘줄 아느냐. 나를 따라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너를 찔러 죽일테가!」
나는 놈을 억지로 끌고 무도장을 나와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화가 치밀어 놈을 방안에 동댕이쳤다. 그러자 놈은 벽에 부딛쳐서 비틀거렸다. 나는 재빨리 문을 닫아 걸고 칼을 빼라고 놈에게 명령하였다. 놈은 잠시 망설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없이 칼을 빼들고 방어의 자세를 취하였다. 결투는 간단히 끝났다. 나는 미칠 듯 흥분헤 있었으므로 팔에서 무서운 힘과 정력이 소았다. 나는 단숨에 그를 벽에 쳐박고 짐승같은 사나운 힘으로 그의 가슴을 몇 번이고 찔렀다.
그러자 누가 문고리를 덜컥거렸다. 나는 급히 이 침입자를 막아 버리고 다시 죽어가는 내적에게 돌아왔다. 그러자 내 눈앞에 전개된 광경을 바라보고 나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을 몰랐다.이 때의 광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잠깐 옆을 보는 사이에 방 저쪽에 큰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커다란 거울――그것은 혼란 속에서 그렇게 보였다――이 아무것도 없던 곳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거울 앞에 다가갔다. 거기에는 피에 젖어 새파랗게 질린 내가 힘없이 비틀거리면서 나를 맞으러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그런 것이지 실은 상대방은 나의 적 윌리엄 윌슨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의 고비 속에서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다름아닌 윌리엄 윌슨이었다. 그는 가면과 외투를 마룻바닥에 벗어 놓았다. 그가 입은 옷은 어느 한 오라기도 내 옷과 같지 않은 것이 없고, 그의 얼굴에 난 그 특색 잇는 주름살의 어느하나도 내 자신의 주름살과 닮지 않은 거시 없었다. 그것은 바로 윌슨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이겼다. 나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앞으로 너도 죽을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하여, 하늘에 대하여, 희망에 대하여 죽을 것이다. 너는 내 안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어갈 때 너 자신인 내 모습을 보아라. 네가 어떻게 자기자신을 완전히 주였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