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  記

O·HENRY의 본명은 윌리엄·시드니·포오타(Wiliam Sydney Porter)이다. O·헨리라는 필명을 쓰게 된 것은 1886년의 여름부터라고 한다. 당시에 그가 <건방진 헨리>라는 별명을 붙이고 있던 들고양이가 있었다. 그 고양이를 부를 때에, 그저 <헨리>라고 불러서는 돌아다보지도 않지만 <OH·헨리>라고 부르면 금세 그에게로 달려와서 몸뚱이를 비비댔다. 그래서 <O·헨리>라는 필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는 전형적인 단편작가로 단편소설밖에 쓰지 않았다. <아메리카의 모파상>이라 불리는 그는,  10년도 채 못되는 작가생활을 하는 동안에 약 280변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생의 갖가지 단면에 스포트를 비추어 경묘한 문학적 표현으로써 그것을 교묘하게 짧다란 잔편형식으로 정리해 내는 솜씨는 남의 추종을 불허한다.
   유우머와 위트와 페토스, 이것이 O·헨리의 독특한 맛이지만, 더욱 경탄할 만한 것은 그 기발한 착상과 교묘한 구성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훌륭한 구성력을 가진 작가가 아니면 감내하기 어려운 솜씨다.

  그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기승전결이 잘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과 2, 3페이지밖에 안되는 극히 짤막한 단편에도 영락없이 발단이 있고 절정이 있으며, 그리고 결말이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결말의 의외성』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독자의 의표를 쿡 찌르는 취향, 이것은 O·헨리의 18번이라 해도 좋으리라. 더욱이 어떤 작품의 경우에도 거의 예외 없이, 차분한, 마음 속으로부터 저절로 나오는 듯한 웃음을 자아네게 한다는 것은, 이 작가가 인간의 심리, 인정의 기미에 능통해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따뜻한, 다정다감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O·헨리의 전기를 쓴 알폰소·스미스는, 미국의 문학사를 장식한 단편작가들, 아빙, 포우, 호오돈, 브렛·하아트 등과 비교하여, <O·헨리는 미국의 단편소설을 우아하게 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 많은 O·헨리 문학의 본질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O·헨리의 조부 시드니·포오타는 코네티커트주에서 노오드캐롤라이나주로 이주해 온 시계상으로, 손자 O·헨리에게 자기와 같은 이름을 남겨 줬을 뿐만 아니라, 모험과 방랑을 즐기는 성질까지도 함께 남겨 주었다.  O·헨리가 로만스를 사랑했고, 항시 『거리에 굴러다니고 있는 뭔가』를 찾아 헤맨 것도, 아마도 이조부에게서 이어받은 피가 그렇게 시킨 것 같다. 조부인 시드니·포오타는 명랑하고 대주가이며, 사람이 좋아 놈담을 하거나 익살을 부리거나 노래부르기를 좋아했으므로, 마을 사람에게는 사랑을 받았지만, 장사에는 별로 힘쓰지 않은 듯 하다.
   조부 루즈·와즈는 여장부로, 진실하고 부지런하여, 남편 시드니·포오타가, 일곱 자여와 저당에 잡힌 살림을 남기고 죽었을 때에도 우는 소리 한마디 없이 훌륭히 집안을 지키고 아이들을 길렀다. 그러나 노경에 이르자 몸이 붇고, 매일 흔들리는 의자에 걸터앉아서는 담배만 뻐끔뻐끔 피웠다고 하니, 어린 손자  O·헨리의 기억에 그다지 유쾌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외조부 윌리엄·스웨임은 미합중국 초창기에 뉴우욕으로 건너온 홀란드계 이민의 자손으로 독립전쟁 10년쯤 전에 노오드캐롤라이나주로 이주하여, 1827년에 그린즈보로의 지방신문<애국자>의 주간이 되었다. 여간 아닌 편골한으로, 항시 붓을 들어서는 정치의 부패나 정당의 타락을 공격해댔다. 더욱이 남부에 살면서 강경한 노예 폐지론자로, 기회 있을 적마다 노예제도의 부당함과 폐해를 규탄했다. 물론 주위의 남부 사람들에게서는 미움을 사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기세를 꺾이거나 하지 않았다. 신문에선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정에서도, 가두에서도, 레스토랑에서도 굽히지 않고 항시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창해 마지 않았다.

   외조모 아비아·샤아리는,  더·로버트·샤아리는,  더·로버트·샤아리의 직계 자손인 다니엘·샤아리의 딸로, 다니엘은 버지아州 프린세스·안·카운티의 부유한 농장주였다. 샤아리家는 17세기 중엽에 왕당파로서 활약했던 영국의 명문이다.
   O·헨리의 아버지 알자난·시드니·포오타는 시내의 개업의사로, 처음 부렵에는 붙임성이 있고 환자에게도 친절하여 꽤 평판이 좋았었는데, 차츰 발명에 열중하여 본업을 등안히하게 되었고, 기인취급을 받는 동안은 그래도 나은 편으로, 마침내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되고 말았다. 소용도 닿지 않는 기계나 장치의 발명에 몰두하여, 그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게 되었는데, 성공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만년에는 마냥술에 취해 있었다.

   어머니 메아리·젠·버지니아·수웨임은 예의 <애국자>의 주간과 버지니아州의 농장주 딸 사이에 태어난 장녀로, 그린즈보로 여학교에서 프랑스어와 그림을 배웠다. 畵材가 있었고 문장 표현에 능숙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機知가 풍부하고 특히 언어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센스를 가겼던 모양이다. 이 어머니의 소질이 그대로  O·헨리에게 계승된 듯싶다. 불행히도 어머니 메리는  O·헨리가 세 살 때에, 폐병으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이렇게 남겨진 유아의 양육과 집안 살림은  O·헨리의 고모인 라이나·포오타라는 노쳐녀의 손에 맡겨졌다.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집안에 私塾을 만들어 근동의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교실에서는 즐겨 디킨즈나 스코트의 소설을 교재로 택했던 모양인데,  O·헨리도 이 사숙생의 한 사람이었다.

    O·헨리의 이 미혼의 고모는 대단한 문학 애호가로, 우럽의 고전에도 통달해 있었는데, 또 그 반면, 남부의 여성다운 격한 성품과 청교도적인 결벽성을 지니고 있었다. 생도들에게 대해서도 꽤나 엄격한 교사로, 의무를 태만히하거나 질이 나쁜 장난을 하거나 하면, 용서없이 채찍을 휘둘러 따끔한 맛을 뵈었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도들이 싫증을 느끼지 않고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시키는 법을 알고 있는 좋은 선생이기도 했다. 그녀는 생도들에게 책을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문학을 사랑할 것을 고취했다. 그리고 그녀는  O·헨리가 대단히 공부에 흐이를 가지고 있을 뿐더러, 문학을 올바르게 감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이따끔씩 있었던 이야기 시간에, 이야기를 석 잘하는  O·헨리는, 기상청외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서는 항시 듣는이를 기쁜게 했다. 그는 이때에 고모의 지도로, 스코트, 디킨즈·삭카레이, 윌키, 코린즈·듀마 등을 애독했고, 특히 디킨즈는 전작품을 되풀이하여 읽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의사 일을 그만두어 버렸고, 라이나 고모가 집안 살림에 공생하는 상태였으므로,  O·헨리는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단념하고, 열다섯 살 때, 같은 시내에서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드럭 상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상점은 시내 사람들의 집회소 같았으므로, 남부인을 연구하는 데는 십상이었다.  O·헨리는 여기서 일물의 특징을 교묘히 포착하여 단순한 선으로 날카롭게 이것을 표현하는 회화를 익혔다. 이것이 곧 그가 후년에 단편소설을 창작함에 있어 구사한 숫법이 되었던 것이다.

   1882년 3월 어느 날,  O·헨리는 텍사스의 목장으로 갔다. 호기심이 강한 O·헨리는 그 토지의 기후, 풍토, 인정, 습관 등에 흥미를 느꼈다. 그 근방은 비가 적고 定住者는 거의 없었지만, 密生한 삼림이 숨기에는 십상인 장소였으므로, 텍사스뿐이 아니라 멕시코 근방에서도 온갖 법죄자들이 흘러들어와서 거기에 잠복해 있었다. 그래서 목장 관리인인 호올 대위는, 삼림경비대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쁘고 위험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O·헨리는 호올 대위로부터 무법자, 삼립경비대, 멕시코의 양치기, 카우보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O·헨리는 이 목장 생활을 하는 동안에 프랑스어와 독일어 독습을 시작했는데, 이내 그것을 그만 두고 스페인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덕택으로 스페인어에는 제법 능통했던 모양이다. 영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고, 항시 웹스터 사전을 옆에 놓고선 틈만 있으면 그걸 들여다보았다는 것이다.

   1884년, 21세의 탄생일을 맞이하고서 얼마 후에 그는 목장 생활을 그만두고, 그 州의 수도 오스틴으로 나갔다. 그는 약품회사, 토지회사 등을 전전하다가 1887년에 텍사스 토지관리사무소에 근무하게 되었다.

    O·헨리가 에이졸·에스터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886년, 그녀가 18세 때의 어느 파티에서였다. 얼마 안가서  O·헨리는 그녀에게 구혼했다. 그러나 그녀 양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드디어 그는 사랑의 도피를 하려고까지 결심했다. 그런데 1887년 7월 1일, 뜻밖에도 행운이 돌아왔다.
  그날 에이졸은 어머니 심부름으로밖에 나갔었다. 찢어진 옷을 입은채로. 그런데 도중에서 두 사람이 마주쳤다.  O·헨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짜고짜로 그녀를 마차에 태워 교회로 데리고 갔다. 옷의 찢어진 곳은 핀으로 떠메고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이라하여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 후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고, 에이졸 역시 병약한 몸임에도 헌신적으로 그를 도왔다.

   사랑하는 아내의 격려로 처음으로 소설을 써서 어느 잡지사에 보냈더니, 그것이 채택되어 원고료가 송금돼 왔다. 이때부터 그의 작가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891년에느 토지 관리사무소를 그만두고 프아스트·내셔널 은행 출납계가 되었다. 재직중 신문 발행에 손을 댔다가 막대한 빚을 지고, 불행하게도 공금 횡령죄를 지게 되었다.

   O·헨리가 뉴우욕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02년 봄의 일이다. 여기서 그는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奇才를 간파한 길맨·홀은 그를 위해 아파트를 빌려주고, 열심히 집필할 것을 권장했다. 이에 힘입어,  O·헨리는 속속 단편 소설을 써냈다. 뉴우욕에 온 지 불과 1년도 못되어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 잡지나 신문의 일요판에 게재하게 되었다. <뉴유욕·와르드>지의 일요판에 매주 한편씩 작품을 제공하기로 계약을 체결한 것은 1년 반쯤 되어서이다. 이것은 1903년부터 1906년까지 실로 4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기간이  O·헨리의 가장 다작시대이다.

   이리하여 명성도 떨치고 수입도 와짝 불었다. 이제는 확고부동한 유행작가였다.
   1904년에 최초의 단편집 <캬베쓰와 임금님>이 출판되었다. 이어 1906년에 둘째 단편집<4백만원>이 나옴에 이르러, 그의 작자적 지위는 한층 굳건한 것이 되었다.  <4백만>이라함은 당시 뉴우욕 인구를 가리키는 숫자로, 어느 것이나 뉴우욕을 묘사한 것이다. <20년 후>, <경관과 찬송가>, <분주한 브로커의 로맨스>등, 오늘날에도 그의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四百萬>은 또   O·헨리 단편의 특징이기도 한 『結末의 意外性』을 매우 두렸이 보여 준 것으로서 알려져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가 마지막에 가서 예상도 못한 뜻밖의 결말을 피로하여 독자를 아연케 하는, 저 홱 뒤집는 숫법은 이 <四百萬>이 나온 후에는 완전히 그의 전매특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결말의 의외성』도 주의깊게 읽어 보면, 실은 의외도 부자연도 아니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결말이라는 것을, 현명한 독자라면 곧 알아차릴 터이다. 극히 자연스러운, 더구나 불가피한 결과인 것이다.

   <나는 이야기의 결과를 생각지도 않고 써 나가는 일이 가끔 있다. 때로는 마자막까지 완전히 줄거리를 세우고 써 나가는 일도 있고, 또 때로는 미리 생각해 놓은 결말에 맞추어 이야기를 만드는 수도 있다>하고  O·헨리는 말하고 있다. 아무튼, 불필요한 과장이나, 번거로운 재담 같은 것이 다소 섞여 있기는 하지만, 인물의 情狀, 인간성 문제 등을 항시 일관하게 잘 파악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이것이 지금도 아직 많은 독자를 잃지 않는 까닭이라 하겠다.

   1907년에는 뉴유욕 생활에 취재한 또 하나의 단편집 <손질이 잘된 램프>가 풀판되었고, 같은 해에 텍사스에서 체험을 본체로 한 단편집 <서부의 마음>이 나왔다. 이어 1908년에는 <도회의 소리>와 <친절한 接木師>가,  그리고 다음 해인 1909년에는 <운명의 길>과 <選擇權>의 두 권이 나왔다. 또 1910년에는 <꼼꼼한 장사>가 출판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생존중에 나온 마지막 단편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