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연극이다

O.HENRY

 

   며칠 전에, 신문기자를 하고 있는 친구가, 요새 인기인 어느 보오드빌의 무료 초대권을 주어서 함께 보러 갔었다.
   바이얼린 독주도 있었다. 연주자는 나이가 아직 얼마 넘어 보이지 않았으나, 머리가 백발이 다된 근엄한 얼굴을 한 사나이었다. 나는 음악에는 조예가 없어 음(音)의 구성 같은 것에는 거의 무관심한 채 연주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실은 두 달쯤 전에 저 사나이는 화제의 인물이 된 적이 있네.」
하고 신문기자가 말하였다.
 「내가 그 사건을 담당했었지. 가벼운 흥미 본위의 읽을거리를 만들 작정이었네. 편집장은 가끔 내가 쓰는 삼면기사(三面記事)의 익살 섞인 문장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사실은 나는 지금 희극 비슷한 걸 하나 쓰고 있지만 말이야……그건 어쨌든, 나는 곧 분장실에 가서 여러 가지 재료를 수집했는데, 그게 도무지 잘 돼먹었어야지. 사(社)에 돌아와 쓰기는 했지만, 전혀 이스트·사이드의 장례식 기사를 뒤섞은 것이 되어 버렸지 뭔가. 왜냐구? 익살 섞인 글만 써온 버릇이 있는 내 펜으로는 잘 매듭질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아마 자네라면 그걸 밑천으로 해서 막간용 비극을 하나쯤 쓸 수 있었을 걸세. 아무튼 나중에 상세한 이야기를 하지.」

  극장에서 나와 포도주를 마시면서, 친구는 그 이야기를 나에게 상세히 들려 주었다.
  「왜 그게,」
하고 그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나는 그에게 말하였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재미있고 즐거운 읽을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건가. 만일 그 세 사람이 실제로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배우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기묘한 연기는 못할 걸세. 아니, 솔직히 말해서 모든 무대는 하나의 사회이며, 거기 나오는 배우들도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나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셰익스피어 선생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인생은 연극이라고 말하고 싶네.」
  「그럼 자네가 하나 써 보지 않겠나?」
하고 신문기자가 말하였다.
  「좋아, 해 보지.」
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면 그 이야기가 신문에 어울리는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될 수 있는가를 그에게 보여 주기 위해 쓰기로 하였는데, 그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애비그돈·스퀘어 근처에 건물 하나가 있다. 그 아래층에 25년 전부터 인형이나 문방구, 그 밖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팔고 있는 조그마한 상점이 있다.
   25년 전의 어느 날 밤, 그 상점 2층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 상점과 건물은 메이요라는 미망인의 소유였다. 이 미망인의 딸인 헬렌이 프랭크· 버리라는 사나이와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둘러리는 존데라니라는 사나이었다. 헬렌은 열여덟 살이며, 전에 어던 조간지가 몽트리오르 베트구(區)의 <여자 살인광>이라는 커다란 활자의 바로 옆에 그녀의 사진을 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독자가 눈과 머리를 움직여, 이 두 관련성을 거부하고 나서, 급히 돋보기 안경을 집어 사진 아래를 보면, 그것은 <시정(市井)의 미인 특집>이라는 연재물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랭크· 버리와 존·데라니는 같은 거리에 살고 있으며, 그 일대에서는 천손꼽히는 미남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다. 막(幕)이 오를 적마다 주먹질을 하는 장면을 기대하고 싶어질 정도로 사이가 좋은 친한 친구였다. 오케스트라의 좌석이나 소설책을 사는 데 돈을 들이는 사람들은 저마다 이와 같은 장면을 기대하기가 일쑤이다. 사실 이 이야기도 그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발상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은 헬렌을 손에 넣기 위해 맹렬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랭크가 승리를 거두자, 존은 사나이답게 그와 악수를 하고 그를 축복하였다.――진심으로 축복하였다.

   식이 끝나자 헬렌은 모자를 벗고 3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녀는 여행용 드레스를 걸친 채 결혼식에 나갔던 것이다. 그녀와 프랭크는 앞으로 일주일 예정으로 올드·포인트·콤퍼어트 해안으로 신혼 여행을 떠나려는 참이었다. 아래층에서는 떠들어 대기를 좋아하는 아파트 주민들이 낡은 구두나 튀긴 강냉이를 넣은 종이 봉투를 손에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비상용 승강구가 스르르 열리자, 반 미치광이가 된 존·데라니가 마구 흩어진 머리를 하고 그녀의 방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친구의 아내가 된 여자를 향해 심하게 탓하는 듯한 연모의 정을 호소하면서, 자기와 함께, 리비에라나 브롱크스나 혹은 이탈리아의 <하늘>과 <달콤한 꿈>이 있는 어던 옛 고도에라도 도망치거나 말아 버리자고 졸라댔다.

   이것을 거절하는 헬렌의 단호한 태도를 본다면, 비극물에 장기가 있는 브레니 선생일지라도 아마 깜짝 놀란 나머지 눈을 껌벅거렸을 것이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격렬한 태도로, 정숙한 숙녀에 대해 그런 무례할 데가 어디 있느냐고 심하게 책망하여, 그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사나이에게 당장 나가라고 하였다. 그는 평소의 사나이다운 용기를 잃고 고개를 푹 숙이며『충동에 못이겨』하거나, 또는 「당신의 모습은 내가 죽을 때까지 네 가슴에서 자라지지 않을 거요.」하는 따위의 말을 재빨리 뇌까렸다. 그녀는 그저 빨리 나가라고 눈으로 묵묵히 비상구를 기라켰을 뿐이다.
   「나는 지구의 한 끝으로 가요.」
하고 데라니는 말하였다.
   「가장 먼 지구의 한 끝으로 가 버릴  거요. 당신이 다른 사나이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당신 가까이서 눌러 있는다는 건 나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오. 나는 아프리카로 가려고 하오. 이국 땅에서 살며……」
   「부탁이예요. 어서 빨리 나가 주세요.」
하고 핼렌은 말하였다.
  「누가 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헬렌은 그에게 작별의 키스를 시켜 주기 위해 흰 손을 내밀었다.
   세상의 숙녀들이여, 자기가 열렬히 바라던 이상을 손에 넣고 나서, 한편으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 하여금 진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와서 당신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 머나먼 지구의 한 끝에 가야겠다고 말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가슴 속에는 애머랜드(전설에 나오는 시들지 않는 꽃) 영원히 피고 있을 거라고 고백하게 하는, 그런 최고의 은총을, 당신네들은 위대한 사랑의 신 튜유핏으로부터 받은 적이 있는가? 자기가 지닌 미의 힘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알아 차리고, 자기 행복을 황홀한 심정으로 확인하면서――사랑에 패배한 사나이가 당신의 손등에 마지막 입술을 대고 있을 때, 자기 손톱에 아름다운 메니큐어를 하고 있을 것을 기뻐하며, 드디어 이 불행한 사나이는 멀리 이국땅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오, 세상의 숙녀들이여, 감히 말하거니와 그것은 절대로 금물이다. 
   그때 집작한 대로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신부가 모자 끈을 매는 시간이 너무 긴 듯싶어 이상하게 생각한 신랑이 방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헬렌의 손에 작별의 입술을 댄 존·데라니는 창문을 통하여 비상구로 동망치려고 하였다.

  원한다면 여기서 잠깐 나직한 음악소리를 들려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서글픈 바이올린의 애조와 클라리넷과 첼로를 곁들였으면 한다. 어쨌든 방안의 광경을 생각해 보라.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받은 프랭크는 완전히 넋을 잃고 창백한 얼굴로 뭐라고 떠들어대었다. 헬렌은 그에게 매달려 사정을 설명하려고 애섰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어깨에 기댄 그녀를 이리저리 밀어제치며――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자세한 내막은 무대감독에게 물어보라――드디어 그녀는 무자비하게 방바닥 위에 쓰러져 몸을 뒤치면서 흐느껴 울었다. 사나이는, 두 번 다시 네 얼굴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고함을 자르면서, 아연실색하여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손님들 앞을 지나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런데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므로, 다음 막이 열리기까지의 20년 동안에는, 관객들 중에는 결혼한 사람도 있고, 죽어간 사람,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사람, 부자가 된 사람, 가난뱅이가 된 사람, 행복하게 된 사람, 불행하게 된 사람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버리 부인은 그 건물과 상점을 상속받았다. 이미 38세가 되었지만, 지금이라도 미인대회에 나가면, 열여덟쯤 된 젊은 아가씨들을 상대로 겨루어도 단연 회고이라라 생각될 정도였다. 그녀의 결혼식의 희극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녀는 결코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장뇌(樟腦)나 나프탈린 속에 숨겨 두려고 하지 않는 대신, 그것을 잡지에 팔지도 않았다.
   어느날, 돈벌이에 능한 중년 변호사가 그녀의 상점에 법률 용지와 잉크를 서러 와서 카운터 너머로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하였다.
   「저는 퍽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하고 헬렌은 상냥스럽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저는 20년 전에 어떤 사람과 결혼한 적이 있어요. 상대자는 사나이답다기보다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한 인간이었지만, 저는 아직도 그 살마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긴 그 사람하고 함께 있는 것은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3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앗지만 말에요. 저, 필요한 잉크는 등사용 잉크에요, 아니면 필기용 잉크에요?」
   변호사는 옛 풍속에 따라 카운터 너머로 고개를 숙이고 헬렌의 손등에 젊잖게 키스하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헬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별의 키스는 낭만적으로 보여도 수선스럽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지금 그녀의 나이 38세지만 아직 충분히 아름다워 누구나 존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구애자로부터 받은 것은 으레 비난이 아니면 작별의 인사뿐이었다.그나마 고약하게도 이마지막 구애자의 경우는 단골 한 사람을 잃은 격이 되었다.
   헬렌은 장사가 시원치 않아 셋집이라는 딱지를 내다붙였다. 3층의 커다란 방 두 개를 남에게 세주려고 한 것이다. 세를 들려는 사람은 계속해서 찾아와서는 탐을 내고 돌아갔다. 부인의 집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고, 쾌적하며, 전망도 좋은 집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바이올리니스트인 라몬티라는 사나이가 3층 앞쪽 방에 세들겠다고 계약을 하였다. 소란스러운 산골짜기의 거리는 이 음악가의 섬세한 귀가 감당할 수 없으므로, 한 친구가 이 소란스러운 사막의 오아시스에 그를 보냈던 것이다.
  라몬티는 그 짙은 눈썹과, 아직 싱싱한 얼굴과, 끝이 삐죽하고 짧막한 이국풍의 턱수염과, 특징 있는 잿빛 머리칼과,  명랑하고 쾌활하고 정다운 태도에 나타나는 예술가다운 기질로 말마암아, 이 애비그돈·스케어의 낡은 집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사람이었다. 헬렌은 상점 2층에 살고 있었다. 이 집 건축 양식은 다소 색다른 데가 있었다. 커다란 홀이 거의 정사각형을 이루고, 그 한쪽 끝을 지나 3층에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그녀는 이 홀을 거실겸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어울리는 가정도구를 마련해 놓았다. 책상을 놓고 거기서 거래체에 편지를 쓰고, 밤에는 따뜻한 따뜻한 난로의 밝은 등불 밑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라몬티는 이방의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으모로,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그가 사사한 적이 있는 유명한, 그러나 잔소리가 심한 바이올리니스트와 함께 생활한 파리 시절을 버리 부인에게 들려 주기도 하였다.
   다음에 세들러 온 사람은, 40세에 막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우울한 얼굴을 한 미남으로, 신비적인 밥색 턱수염을 기르고, 이상하게 상대방에게 무슨 호소라도 하는 듯 싶은 눈초리를 던지는 사나이었다. 그도 헬렌의 사교장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로미오의 눈과 오셀로의 혀를 갖고 먼 이국의 이야기를 하며 헬렌을 황홀하게 하였으며, 기품 있는 말로 은근히 그녀의 마음을 끌어보기도 하였다.

   헬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사나이 앞에 나가면 이상하게 이끌리는 듯한 스릴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그녀를 청춘의 낭만시절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감정은 점점 발전하여 드디어 그 속에 빠져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가 젊었을 때 낭만 속의 중심인물의 한사람이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여성다운 논리에 의해(그렇지, 여자란 그런 것이니까)일반 삼단논법이나 정리나 논리를 껑충 뛰어넘어 버렸다. 즉 남편이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헬렌은 그의 눈동자속에, 여자라면 결코 놓치지 않는 사랑의 징후와 엄청난 회한과 비탄을 엿볼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들은, 사랑을 얻으려면 그것이 가장 가까운 길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강한 동정심을 그녀 마음에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어쨋든 <잭크가 세운 집> 같은 데서는 알맞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20년 동안이나 근처를 헤매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남편이, 곧 신을 수 있는 슬리퍼가 현관에 나란히 놓이거나, 언제나 담뱃불에 불을 붙일 수 있도록 성냔을 준비해 놓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는 설명이나 해명쯤은 있어야 할 것이며, 이쪽에서도 원망스러운 말 한마디쯤은 있어야 할 것이다.  한동안 속죄의 괴로움을 겪고 나서 진심으로 뉘우친다고 말한다면,제금(提琴)과 왕관을 맡겨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거나, 적어도 느끼고 있다는 시늉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친구인 신문기자는 이 이야기 속에 우스꽝스러운 대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무척 통쾌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쓰라는 주문인데, 그런 맛을 전혀 모르겠다고 한다면――아니 나는 친구를 깎아 내리는 생각은 전혀 없다.――이야기를 더 계속해야겠다.

   어느 날 밤, 라몬티는 헬렌의 거실겸 사무실에 들어와, 황홀감에 젖은 예술가다운 우아한 정열에 넘치는 사랑을 고백하였다. 그말은 몽상가와 실천가가 동거하고 있는 사나이 마음에 불타오르는 성화의 불길이었다.
  「당신의 답변을 듣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요.」
   라몬티는 헬렌의 그 당돌한 제의를 탓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말을 계속하였다.
  「라몬티는 당신 앞에서 말하는 나의 유일한 이름입니다. 내 매니저가 지어 주었지요.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어디 출신인지 전혀 물라요. 어느 병원에서 눈을 떳을 때가 대 최초의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나는 그때 이미 청년이 되었지만 그 후로, 몇 주일 동안 그 병원에서 지냈어요. 그 이전의 생활은 완전히 공백상태에 놓여 있지요. 사람들이 구급차에 실어 병원에 왔다지 뭡니까. 내가 쓰러졌을 때 길에 깐 돌에 머리를 깨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정의 신분을 밝힐 만한 게 전혀 없었으며, 과거의 일은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어요. 병원에서 퇴원한 나는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하여 연주가로서 성공하였어요. 버리 부인――나는 당신의 이름밖에는 아는 것이 없어요――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이야말로 내가 한평생 찾아 헤맨 세계이며, 유일한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는 이러한 말을 쭉 늘어놓았다.
  헬렌은 다시 마음이 괴로워 졌다. 처음에는 여성으로서의 자랑스러운 물결이 가슴 속에서 이는 것을 마음 속에서 느끼고, 이어서 허영의 달콤한 몸부림이 온 몸에 밀어닥쳐왔다. 그녀는 라몬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금새 가슴이 고동쳤다. 이 고동은 그녀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이 음악가가 이미 그녀의 일생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라몬티씨, 대단히 미안하지만 전 결혼한 여자에요.」
하고 그녀는 서글픈 듯이 말하였다.(여기는 무대가 아니라 애그비돈·스퀘어의 낡은 집 속이라는 것을 참고로 말해 두고자 한다)
   그리고 헬렌은 비극의 주인공이 조만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자기의 슬픈 신상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라몬티는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굽혀 키스를 하더니 위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헬렌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자기 손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도 무리가 아니다. 세 사람의 구혼자가 저마다 이 손에 키스하고서는 붉은 말을 잡아타고 도망쳐 버렸으니까.
   한 시간쯤 지나서, 저 몽롱한 눈을 가진 신비로운 신원불명의 사나이가 들어왔다. 헬렌은 등의자에 앉아, 털실로 긴히 필요치도 않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계단을 뛰어 내려와 이야기를 하기위해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테이블 맞은편에 앉자마자 대뜸 그녀에게 사랑을 호소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헬렌, 당신은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아요? 나는 당신의 눈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날의 일은 흘려 버리고, 20년 동안이나 간직해 온 내 사랑을 상기해 주지 않으려오? 나는 당신에게 못할 짓을 했소. 그래서 당신의 곀에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소. 그러나 사랑은 이성보다 더 강하오. 나를 용서해 줄 수 없겠소?」
   헬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원 불명의 사나이는 떨면서 그녀의 한쪽 손을 꽉 잡았다.
   그녀는 그대로 서 있었다. 이처럼 멋진 장면을, 그리고 그녀의 마음의 고통을 아무도 무대에서 표현하지 못한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실은 그녀의 마음은 두쪽이 나 있었다. 신랑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신성한 처녀의 사라은 분명히 그녀의 것이며, 최초에 택한 남자에게의 숨은, 그리고 정겨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그녀 마음의 절반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그 순수한 감정에 빠져들어갔다. 존경과 정절, 그리고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 감미로운 낭만이 그녀를 거기 매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과 연혼의 다른 반면은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현재의, 보다 더 충실한, 그리고 절실한 감동에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낡은 것과 새것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녀가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 위층방에서 부드러운, 가슴을 재리누르는 듯한, 애원하는 듯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 왔다. 음악이라는 마녀는 임금의 마음도 움직이는 법이다. 심장이 옷소매 위에 나와 있는 인간이라면 그것을 까마귀가 쪼아먹어도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을 테지만, 심장이 고막 위에 있는 인간에게는 음악이 굉장한 효과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음악과 음악가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동시에 체면과 옛사랑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날 용서해 주오.」
하고 그는 애원하였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과 떨어져 살기에는 20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나 긴 것이 나니었을꺄요?」
하고 그녀는 원망스럽게 말하였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하고 그는 애원하였다.
   「그렇지, 모든 걸 고백하겠소. 그날 밤 그가 이 집에서 뛰쳐나갔을 때, 나는 그의 뒤를 밟았소. 나는 질투로 미칠 것 같았소. 어두컴컴한 한길에서 나는 그를 때려눕혔소. 그 후로 그는 일어나지 못하였소. 살펴봤더니, 그는 돌에 부딪쳐 머리가 깨어져 있었소. 그를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소. 다만 사랑과 질투에 미쳐 있었던 거요. 나는 그 근처에 몸을 숨기고 그가 구급차에 실려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소. 헬렌, 당신은 그와 결혼하고 있소. 그러나……」
   「어머! 당신은 대체 누구에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가 잡은 손을 뿌리치고 나서 외쳤다.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나요, 헬렌? 언제나 당신을 가장 깊이 사랑한 이 나를? 존·데라니요. 만일 당신이 나를 용서한다면……나는……」
   그러나 그때 그녀는 벌써 거기 있지 않았다. 그녀는 뛰면서, 곤두박질하면서, 껑충거리면서 계단을 올라가 음악가 사나이――이미 그녀를 잊어 버렸지만, 그 두 번째 인생에서 그녀를 유일한 여성이라고 생각한――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그앞에 쓰러지면서 울고불고, 노래부르듯이 외쳤다.
  「프랭크, 오, 프랭크, 나의 프랭크!」

   이와같이 세 영혼은 세 개의 당구공처럼 세월에 농락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친구인 신문기자가 이 이야기 속에 조금도 우스꽝스러운 면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어떻게 된 영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