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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
CHEKHOV ANTON PAVLOVICH
2
오후 다섯 시가 지났다. 중위의 형 알렉세이·이바노비치·크류코프는 잠옷바람으로 슬리퍼를 끌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연신 창밖을 내다보곤 하였다. 그는 이미 허벅다리에 살이찌고 머리가 벗어져 집안에서 잔소리깨나 할 그런 나이가 되었지만, 키가 후리후리하고 검은 구렛나루가 무성한 사나이다운 얼굴을 하며, 유태 여자의 말대로 상당히 미남자였다. 그리고 어엿한 인테리로, 성실하고 원만한 인품을 지녔으며, 교양이 풍부하고, 과학, 예술, 종교에 대해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어느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일이 없는 게으름뱅이기도 하였다. 또한 호식가요, 애주가이기도 하며, 트름프놀이 같은 것을 썩 잘 하였다. 무슨 일에 그를 끌어들이려면, 마음을 움직일 만한 어떤 자극적이고 비범한 일이라야 했다. 그 대신 일단 손 걷고 나서기만 하면 침식을 잃어 버리고 적극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는 격투에 대하여 핏대를 울리며 자기 견해를 토로하는가 하면, 장관에게 긴 진정서도 써 보내며, 온 군대를 분주히 돌아다니기 하고, 수틀리면 남을 비열한 놈이라고 공공연히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을 걸어 남과 다투기도 하였다. 「그런데 왜 사샤는 여태 돌아오지 않는거야?」 하고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아내에게 말하였다. 「저녁을 먹을 때가 다 되었는데……」 크류코프네 식구들은 중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여섯 시가 되어서야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밤이 깊어지고 밤참을 먹을 때가 되었다.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문맊에서, 무슨 발자국 소리나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해서 귀를 기울이다가도, 이상한 일이라는 듯이 어깨를 치켜올리곤 하였다. <웬 일일까?>하고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이 녀석이 아마 소작인 집에 눌러앉아 있는 모양이군> 크류포프는 밤참을 먹고 나서, 잠자리에 들며, 동생이 소작인 집에서 한잔 톡톡이 얻어먹고 자고 오는 줄 생각하였다. 소콜리스키는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는 풀이 죽고 낙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는 형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현제는 서재로 들어갔다. 중위는 문을 닫고 말을 꺼내기 전에 한동안 방안을 왔다갔다하였다. 「형님, 원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요.」 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마 내 이야기를 좀처럼 믿기 어려울 테지만……」 그는 형을 외면한 채 얼굴을 붉히고 어제 당한 일을 더듬거리며 이야기하였다. 크류코프는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고개를 숙이고 동생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아니 그게 정말아냐, 농담이냐?」 「농담이라뇨? 지금 농담할 처지가 됐어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구나!」 크류코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팔을 벌리며,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잘못은 네게 있는거야. 그래 그년이 그 따위 짓을 하는 것을 보고도 너는 그년의 입술을 핧고 있었단 말이냐?」 「그러나 나도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어요!」 중위는 죄송하다는 듯이 눈을 두리번거리며 말하였다.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에요. 나는 생전 처음으로 그런 요물한테 걸렸거든요. 멀쩡한 정신을 갖고 그년에게 반해서 그런 건 결코 아녜요. 하도 몰염치하게 덤벼들기에……」 「몰렴치하게 덤벼들었다고 해서 너한테 책임이 없단 말이냐? 그런 뻔뻔스럽고 치사한 짓을 하다니, 차라리 똥통에서 돼지새끼라도 꺼내어 날로 먹을 일이지…… 이천 삼백 루우불 돈이 아깝다!」 「형님 너무 하세요!」 중의는 이마를 찌푸리며 대꾸하였다. 「내 그 이천 삼백 루우불 갚아 드릴께요!」 「돈만 갚으면 그만이냐? 돈이 문제가 아니다. 그까짓 돈, 돈은 없어도 살어! 네 얼빠진 그 어리석은 행동이 한심스럽단 말이다. 그래 약혼까지 한 녀석이 약혼자를 둬 두고……」 「형님, 진정하세요……」 중위는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저도 얼마나 자기자신이 원망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정말이지 땅속으로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어요……큰 어머니한테 가서 돈 오천 루우불을 해 내라고 졸라야 할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히는 군요……」 크류코프는 좀처럼 화가 풀리지 않는지 한참 뭐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마음이 좀 진정되자 그는 소파에 주저앉아 동생을 바라보고 혼자서 입을 실룩거리며 웃고 있었다. <육군 중위가……> 그는 경멸에 찬 어조로 비꼬았다. <약혼까지 한 녀석이!> 그는 별안간 무엇에 찔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을 쾅쾅 구르며 방안을 섭급히 왔다갔다 하였다. 「안될 말이야. 그냥 둘 수는 없어!」 그는 두 주먹을 휘두르며 떠들어대었다. 「내가 가서 수표를 찾아와야겠다. 내가 가서 그년을 족쳐야지. 여자에게 손을 대서는 못쓰지만 그런 년은 아주 병신을 만들어 놔야 해. 나는 육군중위와는 달라! 아무리 뻔뻔스러럽게 덤벼들어도 나한테는 어림도 없지! 암 나한테는 안되고 말고. 나한테야 백을 못쓰지! 그런 계집년은 그냥 능지처첨을 해야 돼!」 하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거기 누가 없느냐! 빨리 마차를 준비하라고 일러라!」 크류코프는 중위가 한사코 만류하는 것을 들은체도 하지 않고, 급히 옷을 갈아입고는 마차에 올랐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산나·모이세예브나의 집으로 달려갔다. 중위는 우두커니 서서 창문을 통하여 달려가는 마차 뒤에서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느어지게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하고 나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15분 후에는 벌써 깊이 잠들어버렸다. 여섯 시가 되자 저녁을 먹으라고 그를 깨워 일으켰다. 「그이는 아무튼 친절도 하지!」 식당에서 형수는 시동생을 보고 이렇게 남편의 불평을 늘어놓았다. 「저녁 상을 차려놓고 이렇게 기다리게 한답!」 「그래 형님은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았어요?」 중위는 하품을 하며 말하였다. 「아마 소작인 집에 들리신 모양이죠.」 그러나 크류코프는 밤참 때가 다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아내와 소클리스키는 그가 트럼프에 미쳐서 소작인 집에서 자고 오나보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추측과는 전혀 동떨어진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크류코프는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으나, 아무말 없이 저재에 들어가버렸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에요?」 중위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현에게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크류코프는 코웃음만 치며 손을 내저었다. 「대체 어떻게 되었길래 웃기만 하십니까?」 크류코프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얼굴을 틀어박고 웃음을 참느라고 어깨만 들먹거렸다. 그는 한참 후에 얼굴을 들었다. 눈에는 누물까지 어려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옆에 서 있는 중위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거 문 좀 닫아라. 내 너한태 그 계집 이야기를 할께……」 「수표는 어떻게 되었어요?」 크류코프는 손을 내저으며 다시 너털웃음을 쳤다. 「글세 이야기를 들으라니까. 그 이만저만한 년이 아니더라!」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하여튼 고맙구나. 네 덕분에 그런 계집을 알게 됐으니……그건 치마를 두른 악마야. 그년 집에 들어서자 내깐에는 마음의 무장을 든든히 하고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무슨 큰 일이라도 치르려는 듯이 주먹을 불끈 귀고 말이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나하고는 농을 걸 생각은 아예 마시오!>――이런 식으로 나가며 땅을 울러댔더니, 그년 처음에는 눈물을 짜며 말하는 거야. 너에겐 정말 농으로 그랬노라고……그러면서 돈을 내 주겠다는 거야. 그리고는 그 이상한 궤짝 있는 데로 나를 데려가더니 너도 들었을 테지만 유럽의 운명은 러시아인과 프랑스인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부터 시작하여, 여자들에 대한 공격을 퍼붓는 거야.……그년이 나더리 아주 미남이라고 한참 치켜세우드니, 얼마나 기운이 센가 보자고 하면서 팔뚝을 꼬집어뜯기도 하고……, 그리고는…… , 또……, 그 다음에는 너도 잘알테지. 그리하여 겨우 이제 이렇게 빠져나왔다. 하하하……너한테 흠뻑 반한 모양이더라!」 「참 잘도 하십니다!」 중위도 따라 웃으며 형을 비꼬아 주었다. 「버젓이 아내를 가진 분이……남의 존경을 받는 명사가……그래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런데 말예요. 이건 농담이 아녜요. 그러니까 이 고장에는 타마라 여왕님이 생로 한분 생긴 셈이군요……」 「뭐가 생겼다고? 그런 카멜레온 같은 년은 아마 러시아 전국을 뒤져보아도 찾아내지 못할게다. 그 방면에는 나도 풋내기가 아닌데, 그런 여자는 생전 처음 보았다. 아마도 귀신도 그 여자를 당하지 못할게다. 네 말 마따나 그야말로 염치불구하고 덤벼드는 데는 안넘어갈 재간이 없더라. 그년의 말과 행동이 어떻게 야단스러운지 그냥 녹아 떨어질 수밖에 없더구나……. 이이고……, 수표를 어떻게 했냐고?……휘이치, 페프시(깨끗이 날아가 버렸지). 네나 내나 둘 다 죄짓기는 매일반이었으니 손해는 반반씩 나누기로 하자. 너는 1150루우불만 변상하면 돼. 그리고 아주머니에게는 절대로 비밀로 해. 소작인 집에 갔었다고 말할 테니까……」 크류코프와 중위는 얼굴을 소파에 틀어밖고 한참 배꼽을 빼었다. 고개를 들고 서로 바라보다가는 다시 웃음보가 터져나와 다시 얼굴을 파문곤 하였다. <약혼까지 한 녀석이!> 크류코프가 먼저 중위를 놀려대었다. <육군 중위가!> <아내를 가진 사람이!> 소콜리스키도지지 않았다. <남의 존경을 받는 명사가! 한 집안의 가장이!> 그들은 점심상을 받고서도, 연방 서로 눈짓을 하며, 암시에 찬 말을 주고 받는 것이었다. 연달아 웃음이 터져나오는 바람에 내프킨에 음식이 떨어져 곁에 섰는 하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점심이 끝나자, 그들은 명랑한 기분으로 엽총을 가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어린 애들에게 전쟁놀이를 구경시켜 주었다. 저녁때 두 형제는 오랫동안 논쟁을 하였다. 중위는 주장하기를 결혼할 때 여자는 지참금을 되도록 적게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설사 열렬한 연애결혼이라 할지라도 여자가 많은 돈이나 재산을 갖고 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크류코프는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그런 당치않은 말이 어디 있느냐고 중위의 견해를 반박하였다. 즉 아내가 자기 몫으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꺼리는 남편은 이기주의자로, 전제군주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형제가 다 흥분하여 체면도 잊어 버리고 고함을 지르며 야단법석을 쳤다. 이윽고 그들은 잠옷을 들고 자기 침실로 가서 금새 깊이 잠들어버렸다. 다시금 태평스러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대지 위에는 짙은 그림자가 덮여 있었다. 구름속에서 천둥 소리가 울려오고 때때로 바람이 무슨 호소라고 하는 것처럼 윙윙거리며 스쳐갔다. 그것은 마치 자연도 소리를 내어 물 수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일한 생활에 젖어버린 이들에게는아무리 험상궂은 자연현상도 불안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수산나나 수표에 대해서도 다시 입밖에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은 웬일인지 창피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은 수산나와 저지른 일을 각각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회상해 보는 것이엇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에서 우연히 당한 한 토막 커다란 웃음꺼리로서, 두고두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 일이 있은 후 한 주일 쯤 지난 어느날 아침에 크류코프는 서재에 앉아서 큰 어머니에게 문안편지를 쓰고 있었다. 책상머리에서는 소콜리스키가 말없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지난밤에 잠을 잘못 자서 기분이 개이지 못하고 마음이 우울하였던 것이다. 그는 방안을 서성거리며 휴가의 기한이 인제 끝나간다는 생각이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약혼자의 생각, 그리고 이 시골 사람들은 쓸쓸하고 따분해서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하고 있었다. 그는 들창가에 가서 밖의 나무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담배를 세 대씩이나 연거퍼 피웠다. 그는 별안간 형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현님, 청이 하나 있어요. 형 오늘 형의 말을 좀 빌려 주세요.」 크류코프는 동생의 눈치를 살피려는 듯 힐끔 쳐다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계속해서 편지만 쓰고 있었다. 「빌려 주시죠?」 그는 거듭 물었다. 크류코프는 다시 한번 그를 쳐다보더니 책상 서랍을 열고 두툼한 돈 뭉치를 동생에게 주었다. 「자, 5천 루우불이야……」하고 그는 말하였다. 「 이건 내 돈이 아니지만 네 마음대로 쓰도록 해. 누구 돈이건 결국 마찬가지니까. 역마차가 집에 들려 가도록 곧 연락하고, 오늘 중으로 떠나도록 하여라 부탁이야. 알겠지?」 이번에는 중위가 형의 눈치를 살피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형님, 내 속을 빤히 들여다 보았구려!」 하고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실은 그 여자한테 가고 싶었어요. 내가 저번에 그집에 입고 갔던 그 여름 제복을 어제 저녁에 세탁해 왔는데, 아직도 쟈스민 냄새가 풍기더군요. 그 냄새를 맡고 나니 그 만 마음이 또 그리로 끌리는 군요!」 「떠나도록 하여라!」 「네, 떠나야겠어요. 휴가도 이제 끝났으니가요. 어늘 중으로 떠나도록 하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곡 떠나겠어요.」 점심 전에 역마차가 도착하였다. 중위는 형의 집안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전송을 받으며 떠났다.
다시 한 주일이 지났다. 숨이 막힐 듯이 음산하고 무더운 날이었다. 크류코프는 이른 아침부터 괜히 이방에서 저방으로 돌아다니며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이미 거들떠보기도 싫은 사진첩을 뒤적거리기도 하였다. 마누라와 아이들을 보기가 무섭게 마구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날은 웬 일인지 아이들도 자기를 슬슬 피하는 눈치같고, 마누라가 하녀들에게 지출이 많다고 짜증을 내는 것도 일부러 자기더러 들어라는 소리처럼 생각되었다. 이것은 가장인 그가 마음이 들떠 있는 징조였다. 그는 점심을 넉었으나, 수우프도 군고기도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그는 마차를 타고 천천히 문밖에 나가 한 마장쯤 가서 멈추었다. <데체 어디로 가면 좋을까?>하고 그는 찌푸린 하늘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온종일 가지가 생각하고 바라던 것이 무엇인가를 이제야 분명히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리하여 얼굴에 웃음까지 빙그레 떠올랐다. 그의 가슴은 한결 후련해지고 게슴츠레하던 눈은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는 말에 채찍질을 하였다. 그는 마차에 흔들리면서 줄곧 공상에 잠겨 있었다.――<그 유대 여자는 내가 찾아간 것을 얼마나 놀랄가. 그녀와 흥겹게 놀다가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야지……. 적어도 한달에 한번쯤은 무슨 방법으로든지 기분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어……, 좀 색다른 것으로……>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침체된 몸과 마음에 청신한 자극이 필요하단 말이야……가령 술을 마신다든지 아니면 수산나라도 만나본다든지……어쨋든 그런 자극적이 있어야 해……> 그가 양조장 뜰안에 드러섰을 때는 날이 벌써 어두워가고 있었다. 열어젖힌 창문으로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새어나왔다. <번개보다 더 밝고, 불길보ㄱ다 더 뜨겁게……> 누가 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쳇, 손님들이 와 있군 그래!> 크류코프에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집으로 되돌아갈가?> 그는 초인종에 손을 대고 잠시 망서렸으나, 역시 종은 울리고 낯익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는 현관에서 발을 멈추고 홀을 들여다 보았다. 남자들이 대여섯 명 손님으로 와 있었다. 그가 잘아는 이고장의 유지인 관리와 지주들이었다. 깡마른 키다리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키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사뭇 흥겨운 듯이 이죽히 입을 벌린채 듣고 있었다. 크류코프는 한동안 거울 앞에 섰다가 홀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수산나·모이세예브가즐거운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몸에는 전날에 입은 그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크류코프를 보자 놀란 듯이 멈칫하고 섰다가 매우 반가운 듯이 앞으로 달려왔다. 「어머, 전 또 누구시라구……」 그녀는 남자의 손을 잡으면서 말하였다. 「정말 뜻밖이에요……」 「당신이 보고 싶어서……」 크류코프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 구라파의 운명이 러시아인과 프랑스인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더 들으려구요.」 「정말 반가와요!」 그녀는 남자의 팔에서 살그머니 몸을 빼면서 생쭉 웃으며 말하였다. 「그럼, 홀에 들어가세요. 다들 아시는 분이니까……전 가서 차를 가져오라 할게요. 참, 알렉세이라 하셨죠? 어서 들어가세요, 곧 나오겠어요…….」 그녀는 달콤한 쟈스민 향기를 풍기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크류코프는 얼굴을 쳐들고 홀에 들어섰다. 동석한 사람들은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었지만, 그는 머리만 끄떡여 보였을 뿐이다. 그들도 마지못해 아는 체를 하였다. 마치 그 자리가 매우 불결하기나 한 것처럼, 아니면 피차에 모른 체 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묵계라도 있었던 것처럼. 크류코프는 홀을 지나 응접실을 거쳐서, 또 다른 객실로 가는 길에 역시 2, 3명의 안면 있는 친구들과 지나쳤다. 그러나 그들은 크류코프를 잘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으며, 어굴은 술에 취해 흥겨워 보였다. 그는 그들을 곁눈질하여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엇하러, 처자가 있고, 인생체험이 풍부한 사회의 명사들이 이런 천하고 더러운 곳에서 즐거울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였다. 그는 어개를 한번 으쓱 치켜올리고, 코웃음을 치면서 다른 방으로 갔다.<정신이 멀쩡한 사람에게 구역질이 나도, 술이 거나한 자들에게는 즐거운 장소가 될 수 있을테지. 하긴 나도 저속한 오페레타나 집시 여자한테 갈 때에는 으레 술을 마시고 가지 않았는가……> 그는 수산나의 서재 앞에까지 와서 갑자기 못에 박힌 듯이 문틀을 붙잡고 우뚝 멈춰섰다. 그녀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동생이 아닌가! 그는 몸집이 뚱뚱하고 주름살 투성이인 어떤 유태인과 무엇인가 수근러리고 있었다. 자기 형이 거기 서 있는 것을 보자 별안간 얼굴이 홍당무가 되며 앞에 놓인 사진첩으로 눈을 돌렸다. 순간 크류코프는 양식(良識)을 되찾아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렸다. 그는 놀라움과 수치와 분노로 하여, 얼빠진 사람처럼 말없이 책상 옆으로 다가았다. 소콜리스키는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말할 수 없는 수치심 때문에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보였다. 「아, 형님이세요!」 그는 눈을 들어 애써 미소를 지어려고 하면서 입을 열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려고 왔어요. 내일은 꼭 떠나겠어요.」 <그렇지만 이제와서 내가 동생에게 뭐라고 할 수 있나?> 하고 크류코프는 생각하였다.<나 자신도 여기 발을 들여놓은 이상 내 입으로 동생을 어떻게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는 잠자코 마른 침만 꿀떡 삼키고 나서 천천히 밖으로 나옸다. <누가 그대를 천사라 부르느냐……땅 위에서 그대를 놓아주지 않으니……> 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에 크류코프의 마차는 먼지투성이의 한길을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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