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속에 든 사나이」

CHEKHOV  ANTON  PAVLOVICH

  「으흠……인제야 그 덧신과 우산을 집어치울 때가 온 거군요.」
하고 이반 이바누이치가 말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을 치워 버릴  수는 없었어요. 그 후 사나이는 방에 바렌카의 초상화를 모셔 놓고는 틈만 나면 내 방에 건너와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신혼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와, 결혼의 중요성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늘어놓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는 코발렌코네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지만 그의 생활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어요. 어련히 결혼에 대한 결심은 일종의 병적인 영향을 준 것 같았어요. 그는 날이 갈 수록 메말라가고 얼굴이 창백해졌어요.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더욱 깊숙이 상자 속에 들어박히려고 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바렌카가 마음에 들어!>하고 그는 어느날 히죽히 웃으며 나에게 말했어요. <누구나 결혼해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잘알고 있네……그러나 이번 일은 자네도 아다시피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좀 생각해 봐야겠네.
  <생각하고 말고가 어디있나, 결혼해 버리면 그만이지.>
  <아니야.  그래도 결혼은 인생의 대사가 아닌가? 앞날의 책임과 의무를 잘 생각해 봐야지. 그래야 나중에 말성이 없을 테니까. 이 일 때문에 요즘에 나는 잠도 잘 못자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오누이가 두렵네.  그들은 자네도 알다시피 좀 독특한 사고방식을 작고 있지 않나?  무슨 일에 있어서나 남들과 가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성질들도 과격하단 말이야.  그러니 결혼 후에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아.>
  그리하여 사나이는 청혼도 하지 못하고 날짜만 끌었어요. 교장부인과 우리들은 실망했어요. 결국 이 사나이는 앞날의 책임과 의무 같은 것만 밤낮 생각하다가 세월을 다 보낼 판국이니 말에요. 그러면서도 거의 말마다 바렌카의 함게 산책을 하는 거예요.  아마 자기로서는 그것을 하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던가보죠.  그리고 여전히 틈만 있으면 가정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내 방에 건너오는 거예요. 분명히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드디어 청혼을 했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만일 갑자기 그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않았더라면 하나의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은 이 불필요한 결혼이 성립되었을지도 몰라요.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지요.  그녀의 동생 코발렌코가 베리코프를 처음 만난 그날부터 몹시 미워했던 거예요.

  <도무지 저로서는 알고도 모를 일입니다.>하고 코발렌코는 어깨를 치켜올리며 불평을 했어요. < 저 걸레 같은 녀석과 어떻게 함께 지냅니까?  그 구역질나는 낯짝을 보고 잘도 참고 견디시는군요.  여러분 이런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여러분은 용하기도 합니다. 이 분위기는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여러분은 이러고도 교육자요, 또한 스승이라고 자처할 수 있어요?  이곳은 학교가 아니라 경찰서군요. 그리하여 파출소의 그 고리타분한 냄새까지 풍기는군요.  저는  이곳에  좀 더 있다가 시골로 내려가렵니다.  거기에 가서 새우잡이라도 하면서 소러시아의 아이들이나 가르치겠어요. 전 곧 떠날 터이니 그렇게 아시고 여러분이나 저 유다와 함께 지내세요.  그런 녀석은 진작 죽어 없어져야 해요!

 이어서 그는 굵직한 소리로 <하하……>하고 크게 웃고 나서,  두 팔을 벌리며 나에게 말하는 거예요.  <그녀석이 무엇 때문에 내 집에 자주 찾아와서는 우두커니 낮아 있는지 모르겠어요. 제까짓게 나한테 무슨 용건이 있겠어요?  멍하니 앉아서 사람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그는 베리코프더러 <거미>라고 별명을 짓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누이가 베리코프에게 시집을 갈 심산이라는 말을 차마 입밖에 낼 수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교장부인이 코발렌코더러 성실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베리코프에게 누이를 출가시키면 좋을 것이라는 말을 비쳤어요. 그러나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투덜거리는 것이엇어요.
<누이가 그 독사한테 시집을 가건 말건 제가 알게 뭡니까. 저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후 어떤 장난꾸러기가 말예요. 덧신을 신고 바지 가랭이를 걷어올린 베리코프가 우산을 받쳐쓰고 바렌카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만화로 그리고, 그 밑에<사랑에 빠진 안트로포스>라고 적어 넣었는데,  그 표정이 신기할 정도로 잘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만화를 중학교와 여학교 선생들은 물론이고, 신학교 교수, 심지어는 관리들에게까지 한 장식 나누어 주었어요. 아마 어는 만화가가 그 그림을 그리는데 며칠은 소비한 것 같았어요.  베리코프도 그 만화를 받았어요. 그리하여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 주었어요.

  그날은 5월 초하루 일요일이라 교직원과 학생들이 학교에 일단 모였다가 소품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어요.  바로 그날 아침에 베리코프는 나와 함께 집을 나섰는데,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고, 먹구름이 감도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어요.
<세상엔 별의별 악한이 다 있군>하고 그는 내뱉는 듯이 말하였어요. 그의 입술은 파르르 떨고 있었어요.  그것을 보자 나는 그만 가엾은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일행이 목적지를 향해 반쯤 걸어왓을 때 코발렌코가 자건거로 뒤를 따라왔어요. 그 뒤엔 바렌카가 자전거를 타고 왔어요.  그녀의 검붉은 얼굴은 약간 피로한 듯이 보였지만,  여전히 싱글벌글하며 명랑한 태도를 잃지 않았어요. <저희는 먼저 가 보겠어요!>하고 그녀는 말했어요. <말씨가 어저면 이렇게 좋을까?> 

  이윽고 자전거를 탄 그 오누이는 우리들의 눈에서 멀리 사라졌어요. 창백한 베리코프의 얼굴은 완전히 흰 백지장으로 변하고, 정신을 잃은 것 같았어요. 그는 발길을 먼추고 한참 나를 쳐다보았어요.
<도대체 저것들은 뭐야?>하고 그는 비꼬았어요. <혹시 내가 잘못본 건 아닌가? 소위 중학교 교사가,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쏘다니다니!>
<뭐가 어때?>나는 말했어요. <운동삼아 괜찮지 뭘 그래!>
<뭐 괜찮다구?> 그는 내가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말하자 더욱 화를 내며 외쳤어요.
<그게 될 말인가?>
그는 크게 놀랐어요. 그리고 더는 걸어갈 기력이 없었던지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어요.

  이튿날 그는 종일 신경이 날카로와 두 손을 마주 비벼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기분이 심리 언짢은 것을 곧 알아차렸어요. 그는 이날 생전 처음으로 결근을 했어요. 식사도 별로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녁때가 되자,  여름철인데도 두터운 옷을 걸치고, 코발렌코네 집으로 비실비실 찾아갔어요. 마침 바렌카는 외출하고 집에 없었어요.
<어서 앉으시오.>

  고발렌코는 알굴을 찌푸리며 쌀쌀하게 말했어요.  그는 잠에서 덜깬 얼굴이었어요.  저녁식사를 마치고 한잠 잤던가봐요.  그래서인지 입이 삐죽하니 나와 있었어요. 베리코프는 10분 남짓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어요.
<어늘은 마음을 좀 진정시켜 보려고 들렸죠.  나는 마음이 무척 괴로워요. 어느 짓궂은 놈팽이가 나와 당신 누이를 만화로 그렸는지 워요. 그러나 나는 그 만화가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해야 하겠기에……나는 이런 만화의 재료가 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어요. 나는 어디까지나 예의를 저 버리지 않고 처신해 왔지요.>

   코발렌코는 입술을 삐죽이 내민채 잠자코 있었어요. 이윽고 베리코프는 나지막한 울먹이는 소리로 말을 이었어요.
< 한가지만 더 말하지요. 당신으로 말하면 교편을 잡은지 알마 안되고 나는 어랫동안 교단을지켜왔어요. 이를테면 교직의 선배로서 당신에게 주의를 주겠어요.  이것은 적어도 내 의무라고 생각해요.  다름이 아니라 당신은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잘 다니는데, 그런 취미는 제2세 교육을 담당한 사람으로소는 삼가야 해요.>
<왜요?>코발렌코는 굵직한 목소리로 반문하였어요.
<설명을 더 해야 알겠어요? 그래 몰라서 묻는거요?  교사가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무방하다면 학생들은 거꾸로 서서 다녀도 탓할 수 없지 않아요? 일단 안된다고 공고한 일을 어겨서는 안돼요.  나는 어제 무척 놀랐어요.  당신의 누이를 보고 한심스러워 눈앞이 캄캄했어요. 부녀자가 자전거를 타고 쏘다니다니 될 말입니까?>
<그래 날더러 어쩌란 말이오?>
<앞으로 주의해야죠.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 뿐이요. 당신은 아직 젊으니 앞길이 창창하지 않아요. 신중하게 처신해야지요.  당신은 이 점이 좀 부족해요.  당신은 밤낮 수놓은 샤쓰바람으로 책을 옆에 끼고 다니더니,  이번에는 자전거까지 몰고 다니니 말예요.  사실은 교장이 알게 되면 장학관의 귀에 들어갈 게아녜요.>
<나와 누이가 자전거를 타건 말건 제3자가 무슨 상관이오?> 코발렌코는 버럭 화를 내며 말하였어요. <만일 내 사생활이나 가정생활에 간섭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가지를 분지러 놓을 테다!>

  베리코프는 새파랗게 질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당신이 그런 투로 나오면 할 말이 없오>하고 그는 말했어요. <제발 앞으로는 상관에 대해서 말을 삼가요.  내게 말한 식으로 해서는 못써요.  상관을 대할 때에는 존경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해요.>
<그러니 내가 어쨌다는 거요? 상관을 헐뜯었단 말이오?> 코발렌코는 화가 치밀어 증오에 가득 찬 눈초리로 노려보며 따지기 시작했어요. <제발 내 일에 대하여는 간섭말아요. 솔직히 말하지만 난 당신 같은 사람하고 상종하기 싫소. 난 걸레같은 놈은 질색이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베리코프는 안절부절 못하였어요.  아마 이 사나이는 난생 처음으로 이런 모욕을 당했을 거요.
<당신 마대로 하구려>그는 층계 앞을 나서면서 이렇게 덧붙여 말했어요. <한마디만 더 말해야겠어요. 혹시 오리가 주고받은 이야기를 누가 들었을지 몰라요. 말이 퍼지면 시끄 러울테니 교장에게 미리 알려야겠어요.……언쟁을 하게된 동기를 대강 이야기하겠어요.>
<뭐 고고를 해? 맘대로 하시오!>

  코발렌코는 별안간 그의 목덜미를 휘어잡고 휙 밀어 버렸어요.  그러자 베레코프는 덧신과 함께 층계 아래로 딩굴었어요. 이윽고 그는 부시시 몸을 추세우고, 안경이 깨어지지 않았나 해서 코를 만져보는 것이었어요. 그러데 공교롭게도 그가 층계 아래로 굴러떨어졌을 때,  마침 바렌카가 두 분이과 함께 들오는 길이었어요.  베리코프는 이 사실이 무엇보다도 두려웠어요.
<이걸 어째! 큰 웃음거리가 될 테니 말이야, 차라리 죽어 버릴 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읍민들이 다 알게 될 것이 아니야.  그리고 교장과 장학관도 물론 알게 될 거야. 아, 아무 일도 생기기 말아야 할 텐데…… 또 만화가 한 장 더 그려지겠군…… 그리고 결국은 파면이 되고……>
   그가 자리에서 부시시 일어나자 바렌카는 그를 알아보았어요 그리하여 흉한 얼굴과 구겨진 외투와 건신을 바라봤어요.  그녀는 영문을 잘 몰라, 그의 부주의로 층계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라고 속단하고 집이 떠나갈 듯이 웃는 것이었어요. <하하……호호……>

 이 천둥 같은 웃음소리가 청혼은 물론 이 지상에서의 생존까지도 결말을 짓고 말았어요.  그는 집에 돌아오자 바렌카의 초상화를 치워 버리고, 잠자리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사흘이 지나 하인 아파나시가 찾아왔어요.  주인이 아무래도 죽을 것 같으니 의사를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의논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베리코프의 방에 가 보았어요. 그는 휘장 속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가만히 누워있었어요. 내가 혹시 무슨 말을 물으면 그는 다만<아니> 또는 <응>하고 대답할 뿐이었어요.  아파나시가 이 사나이 곁에서 울울한 얼굴을 하고 서성거리며 커다란 한숨을 연방 내쉬는 것이었어요. 그럴 적마다 그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풍겨나왔어요.
   그 후 한달이 지나 베리코프는 죽었어요.  중학교, 여학교, 그리고 신학교의 교직원들이 모여서 그의 장례를 치뤘어요.  영구속에 들어간 그의 얼굴은 평화로와 보이고 명랑해 보이기가지 했어요.  영원히 상자 속에 들어가 다시는밖에 나가지 않게 된 것이 기쁘기나 한 듯이 말에요. 이제 그는 자기 이상을 달성한 셈이지요.

   장례식 날은, 마치 그의 명예를 존중하는 듯이 날씨도 잔뜩 찌푸리고 있어, 우리 일행은 덧신을 신고 우산을 썼어요.  바렌카도 장레식에 나왔어요.  무덤 속에 영구가 놓이자, 그녀는 울ㅇ므을 터뜨렸어요.  소러시아의 여자들은 웃지 않으면 우는 두가지의 감정만 갖고 있을뿐, 그 중간의 기분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솔직히 말해서 베리코프와 같은 사람이 죽어서 장례를 치�풔募� 것은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일행은 묘지에서 돌아오면서 저마다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었어요.  아무도 자기 감정을 충분히밖에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집을 비우고 나간 뒤에,  마음대로 한두 시간 뛰어놀던 때의 표정과 비슷한 것이었어요.

 아아, 자유, 자유, 자유를 누릴 수 잇다는 그 암시는 설사 보잘 것 없는 희망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에 활기를 주는 거예요. 안그래요?
 우리는 묘지에서 돌아오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나 한 주일도 못 가서 우리의 생활은 종전과 다름없이 추하고, 무의미하고, 지루한 것이 되어 버렸어요. 그렇다고 무슨 공고로써 금지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유는 보장되지 않았어요.  그것은 요컨대 전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생활이었어요.  우리는 베리코프 한 사람을 땅에 묻었지만,  아직도 그와 같이 상자속에 들어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아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사나이들이 얼마나 많이 생기겠어요!」

  「옳은 말이요.」
하고 이반 이바누이치는 말하고 나서, 담배대에 불을 당겼다.
  「아무튼 앞으로도 많이 나타날 거예요.」
하고 불킨은 다시금 장조했다.
  그리고 이 중학교 교사는 헛간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는 키가 잘달막하고 몸이 뚱뚱하며, 대머리에다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덕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두 마리의 사냥개가 그를 따라나섰다.
  「저 달을 좀 보시오!」
  그는 달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밤이 깊었다. 오른편으로 멀리 십리나 뻗은 마을이 한눈에 보였다.  삼라만상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무 음직임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연계에 이런 고요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달이 밝은 밤에 농가며 벼낟가리가 잠들어 있는 넓은 마을을 내다보니, 마음도 한결 적적하였다.  이 세상에 괴로움과 번민과 슬픔도 다시 어두움의 적막속에 잠겨 버렸다. 이 정막 속에서는 거리도 한결 평화로와 보였다. 그리고 애수에 잠겨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었다. 별들도 다정한 눈초리로 이 거리를 내려다보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아무런 악의도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보였다. 왼쪽으로는 마을 한 끝에서 멀리 지평선까지 넒은 벌판이 내다보였다. 달빛을 가득 받은 벌판에는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래요.」
  이반 이바누이치가 말하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숨막힐 듯한 거리에서 살아가며, 무의미한 서류를 작성하거나, 카아드 놀이를 하는 것도 역시 상자 속의 생활과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게으르고 수다스럽고, 우매하고 주책없는 마누라 들과 평생을 같이 살며 쓸데없이 지껄이는 것도 일종의 상자 속의 생활이 아니겠어요?  혹시 원한다면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까요?」
  「아뇨, 이제 그만 자야겠어요.」
  불키은 말하였다.
 「그럼 내일 또 뵙겠오요!」
  두 사람은 헌간 속으로 드어가 마른 풀 위에 드러누워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려고 하였다.
  그러자 별안간 바삭바삭하는 벌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헛간을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그 발길 소리는 얼머 언가소 한참 멈췄다가 다시 들려왔다.
 「도둑인가보죠.」
  하고 불킨은 말하였다. 발길 소리는 다시 멎어 버렸다.
  이반 이바누이치는 옆으로 드러누우며 말하였다.
 「사람들은 허튼  소리를 듣거나 모욕과 멸시를 당하고도 꾹 참기 때문에 바보라는 말을 듣는 수가 많아요. 그리고 자기자신은 정직한 자유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혹은 자기자신을 기만하고 비웃기도 하지요. 이것은 다 한 조각의 빵과, 몸둘 거처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지위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앞으로 이렇게 살고 살고 싶지는 않아요!」
 이윽고 불킨은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반 이바누이치는 자리에서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연신 한숨을 내쉬더니, 벌덕 일어나 문앞에 나와앉아 담백데에 불을 켜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