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KHOV ANTON PAVLOVICH
2
새벽 두 시경애 나쟈는 눈을 떴다. 동이 터 오를 무렵이었다. 멀리서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더 자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자리레 누워 있으모로 몸은 편안했으나 마음은 뒤숭숭했다. 5월이면 으레 그렇듯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에 잠기었다. 어젯밤의 색각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어찌하여 그이는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청혼까지 해왔을까? 그리고 어찌하여 자기는 그 청혼을 받아들이고 그 친절하고 총명한 남자를 날이 갈 수록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그녀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꾸준히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결혼식 날짜는 이제 달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녀는 막연하나마 어떤 압박감에 눌려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똗딱, 똑딱……>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가 느릿느릿하게 들려왔다. <똑딱!>
커다란 낡은 찬문을 통하여 정원을 내다조았다. 저쪽에는 추위로 맥을 못써 시들어 버린 듯 한 라일락 꽃들이 보였다. 짙은 안개가 살며시 그 꽃나무 숲으로 스며들어 뒤덮어 버리려는 기세였다. 먼 나뭇가지에서 까치 소리가 들려왔다. 졸린 듯한 울음소리였다.
<아, 어찌하여 마음이 이다지도 괴로운가! 처녀들은 결혼을 앞두고 누구나 이런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인가? 모를 일이야! 혹시 사샤 때문이 나닐까? 그는 몇 해 전부터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 왔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할 때에는 우습게만 생각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까?>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가 멎어 버린지 꽤 오래 되었다. 정원과 들창 밑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어느새 안개는 정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봄을 맞아 방긋이 웃는 듯이 빛나고 있었다. 정원은 따뜻한 태양의 애무를 받아 소생한 듯하고, 나뭇잎에 내린 이슬방울들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려서, 오랫동안 손질을 하지 않고 배 버려 둔 낡은 정원도 오늘 아침에는 우난히 싱싱하고 화려하게 보였다. 할머니는 벌서 자리에서 일어나 계셨다. 사샤의 거칠고 짤막한 기침소리에 뒤이어, 아래층에서 사모바를 준비하여 걸상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가는 것이 무척 지루하였다. 나쟈는 이미 오래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을 한참 동안 거닐고 난 뒤였으나, 여전히 아침이었다.
니나는 탄산수가 든 컵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강신술(降神術)과 동종요법(同種療法)에 흥미를 갖고 여러 가지 책을 뒤적거렸다. 그리하여 그 문제가 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하여 즐겨 이야기를 꺼내곤 하였다. 나쟈에게는 거기 어떤 신비로운 취미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 왜 우셨우?」
하고 나쟈는 물었다.
「언제부터 어떤 할아버지와 딸 이야기를 쓴 소설을 읽기 시작했지 뭐냐. 할아버지가 근무하고 잇는 직장의 상관이 할아버지의 딸을 사랑하게 됐어. 아직 마지막까지 다 읽지는 않았지만, 그 한 장면은 도저히 눈물을 흘리지 않고서는 읽어나갈 수가 없고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탄산수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아침에는 그걸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나는구나.」
「전 요새 마음이 몹시 우울해요.」
하고 나쟈는 말을 이었다.
「왜 저는 잠을 통 잘 수 없을까요?」
「글쎄, 왜 그럴까, 나는 잠이 안 오면 눈을 꼭 감고 방안을 걸어다니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자기가 안나·카레니나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옛날 역사에 쓰여있는 어떤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한단다.……」
나쟈는 어머니가 자기 암을 모르며 또 알리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두려운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감춰 두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오후 2시가 되자 모두들 점심 식탁에 둘러앉았다. 수요일이라 정진일(精進日)이어서 야채국과 생선이 든 모리죽만이 할머니 앞에 놓였다.
사샤는 할머니를 놀려 주기 위해 야채 수우프와 함께 자기의 고기 수우프도 마셨다. 그는 점심 식사를 하면서 사뭇 익살만 부렸다. 그 익살은 고의적으로 하는 것으로, 어떤 정신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어쩐지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그리하여 굳이 재치있는 말을 하려고 핏기없는 여윈 손가락을 쳐들곤 하였지만, 도무지 우스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럴 적마다 그의 병이 점점 더쳐가서 알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나도록 측은해지는 것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나서 할머니는 자기 방에 가서 쉬고, 니나는 한동안 피아노를 치다가 자기방으로 가 버렸다.
「아, 나쟈!」하고 사샤는 여느때처럼 이야기를 꺼내었다.
「당신이 내 말만 들어 준다면 좋을 텐데!」
나쟈는 낡은 안락의자에 푹 파문ㄷ힌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사샤는 방안 이 구석에서 저구석으로 서서히 오고 가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대학에 갈 생각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은 고상한 교양이 있어야 해요. 또 사실 그런 사람이 필요하고요.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위에 빨리 이루어지니까요. 그때에는 이 거리에 돌맹이 하나도 남지 않아요. 삼라만상은 송두리째 파괴되어 버리지요. 그것은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돌변해 버릴 거예요. 그리고 나서, 거기에는 장엄하고 화려한 저택들이 새로 들어서고 아름다운 정원이 마련되며, 훌륭한 분수가 물을 뿜는 가운데,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될 테지요.……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저속한 사람들이 그때 가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요. 그때엔 사람들이 저마다 믿음이 두터워, 자기가 살고 있는 목적을 잘 인식하고 저속한 무리들과 상종하지 않을 테니까요. 나쟈, 이곳을 떠나요. 당신이 얼마나 이처럼 숨막힐 듯한 죄에 물든 생활을 중오하고 있는가를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줘야 해요. 그렇지 못하겠거든 하다 못해 자기자신에게라도 그것을 보여 주도록 해요!」
「사샤, 그건 않돼요. 저는 곧 결혼해야 할 테니까요.」
「뭐, 결혼요? 그건 뭣하러 하는 거요?」
두 사람은밖에 나가 정원을 걷기 시작하였다.
「어쨋든 잘 생각해 봐요. 당신들의 이 노라리 생활이 얼마나 더럽고, 또 얼마나 도리에 어긋나 있는가를 깨달아야 해요.」
하고 사샤는 말을 이었다.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느 누군가 당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해요. 그러나까 당신들은 남이 벌어주는 것으로 사는 편이지요. 이런 생활을 깨끗하다고 말 수 있어요?」
<거건 그래요.>하고 나쟈는 말하고 싶었다. 그것쯤 자기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앞을 가려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는 전신이 바짝 조여드는 듯한 마음을 억제하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저녁때에 안드레이·안드리이치가 찾아와서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바이얼린을 켜고 있었다. 그는 말이 적었다. 악기를 만자는 동안은 자연히 입을 다물 수 있었기 때문에 바이언린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열한 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어가려고 외투를 몸에 걸치고 별안간 나쟈를 껴안더니, 얼굴, 어깨, 손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키쓰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이뿐이!」하고 그는 속삭였다.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오! 나는 기뻐서 미칠 것만 같소!」
나자는 전에도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혹은 어쩌면 그말은 이미 옛날에 동댕이친 어느 소설에서 읽은 세리프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식당에서는 사샤가 탁자에 앉아 그 길다란 다섯 손가락으로 컵을 들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할머니는 화투로 재수를 떠보고, 니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성상앞에 켜 놓은 등불이 가물거릴 뿐, 모든 일이 순조롭고 평화로운 듯이 보였다. 나쟈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자리에 눕자 곧 잠이 들었다. 그러나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동이 틀 때쯤 해서 깨어났다. 그녀는 더 잘 수가 없었다. 무거운 불안에 잠겨 가슴이 설레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일어나 낮아, 무릎에 얼굴을 얹고 자기의 결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이어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지금에 와서는 재산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고 있는 그녀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어머니를 지금까지 훌륭한 여자라고만 생각해 왓을 뿐, 외롭고 쓸쓸하고 불행한 여자임을 미쳐 깨닫지 못한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아래층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사샤도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나쟈는 그가 좀 괴짜기는 하지만 순진한 청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어제 그가 아름다운 정원이니, 훌륭한 분수니, 하고 떠든 여러 가지 공상은 어리석은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순진하고 어리석은 공상 속에는, 대학에 다니고 싶다는 자기의 꿈과 같은 마음을 싸늘하게 전율케 하는 어떤 아름다운 것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이것이 그녀를 기쁨과 환희 속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생각하지 말아야지. 생각해서는 않되……」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똑딱!>
멀리서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가 들려왔다.
<똑딱……똑딱!>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