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의 문학과 역사의식

 

김  종  회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1. 문학과 역사의 겹쳐보기,  또는 역사소설

 

  "태양이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 선언적이며 고색창연한 보이는 레토릭은 나림 이병주선생의 문학관, 소설관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한줄의 문장은 선생의 널리 알려진 역사소설「산하」의 첫장에 기록된 에페그램이다. 실제적 삶의 집적으로서의 '역사'에 비추어 그 배면에 잠복한 숨은 진실을 들추어 보이는 '문학'의 존재양식, 그렇게 존재하는 문학의 지위에 대한 인식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선생이 타계하기 수년 전, 어느 오후 선생의 고정적인 자리였던 코리아나호텔 커피샵에서 필자는 선생에게 매우 무모하고 무례한 질분을 던진 적이 있었다.

   「건생님,  '역사'란 무엇입니까?」

  역사란 무엇이냐라니!도대체 이 따위 대책없는 선문답류의 질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문학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역사소설의 그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끌어안고 선생을 만난 필자로서는 꼭 내놓아야 할 질문이었다. 선생의 답변은 의외로 짧았고, 역시 선문답적인 것이었다.

   「역사란 믿을 수 없는 것일세.」

   역사란 믿을 수 없는 것이라니!  당시는 '운동개념으로서의 문학'이 한 시대를 풍미하여 민족, 조국, 역사 등등의 언사가 그 이름만으로도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어조는 단호하고 명쾌했으며, 필자는 거기에다 감히 추가의 질문을 덧붙이지 못했다.

  선생이 유명을 달리한 해가 1992년이니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그 말씀은 아직 필자의 귓전에 힘있게 살아있다. 그간의 신통찮은 문학 공부를 통해 필자는 왜 선생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였는가를 부족한 대로나마 깨우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에게 있어 기록된 사실로서의 역사는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실체를 정면에서 파악하는 데 그칠 뿐, 그 정론성의 성근 그물망으로 포획할 수 없는 삶의 가치와 진실에 대해서는 무방비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선생의 답변은 역사의 그물망이 놓지고 지나간 실체적 진실을 소설을 통해 걷어올린다는, 선생의 문학관을 대변한 요지부동의 언표이기도 했다. 역사적 상상력의 운동 범주를 한 껏 확장한, 그 신화문학론적 논리를 필자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 자주 인용하곤 한다.

   더욱이 그 역사적 상상력이 극적인 구조와 방대한 스케일로 우리 문학의 강역에 육박한 마큼, 일찍이 필자의 대선배인 드라마 작가 신봉승선생이 들려주었던,「나림 선생이 TV드라마를 썼으면 우리는 모두 설자리가 없었을 터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결코 한번 웃고 지나갈 만만한 얘기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인식은, 역사소설로서 우리 문학사의 한 시기의 천장을 때린 작가답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선생이 말씀으로는 역사의 위상을 낮추어 문학의 층하에 두었다 할지라도, 그 소설 작품에 있어서는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을 하나의 이야기 구조 아래 일란성 쌍생아처럼 함께 작용시킬 수밖에 없었다. 기실 역사와 문학을 바라보는 겹친꼴 눈길과 변증법적 통합이야말로 역사소설의 운명인 까닭에서이다.

   가장 다양하고 깊이 있는 근대사의 체험, 그 체험의 옹혼하고 활달한 문학적 표현이 선생의 몫이었고 그 점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선생의 문학을 기리며 기념하게 하는 소이이다. 또 있다. 여기 이 산하의 아들이요 그 정예였던 선생이 향토를 아끼고 사랑하며, 그의 문학 처처에 이 향토의 형상을 풀어 펼쳐놓았던 것처럼, 우리도 선생과 그 문학을 뜻깊게 받아들이고 길이 교훈으로 삼는 일이 참으로 마땅하지 않을 수 없다.

 

2. 이병주의 생애와 그 문학의 역사적 의미

   지금 우리가 그 삶의 행적과 뮨학을 추념하고 있는 작가 이병주는, 당대의 한국문학에 보기 드문 면모를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1921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하여 일본 메이지대학 문예과와 와세다대학 불문과에서 수학했으며, 진주 농과대학과 해인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국제신보」주필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이상에서 거론한 이력이 그가 40데에 작가로 입문하기까지 겉으로 드러난 주요한 삶의 행적인 셈인데, 그러나 그 내면적인 인생유전의 실상에 있어서는 결코 한두 마디의 언사로 가볍게 정의할 수 없는 엄청난 근대사의 파고를 밟아왔다. 기실 이 기간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가 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절로부터 해방공간을 거쳐,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및 체제대립과 6.25동란 그리고 남한에서의 단독 정부수립 등 온갖 파란만장한 역사의 굴곡이 융기하고 침몰하던 격동기였다. 그처럼 험악학 세월을 관통하여 지나오면서, 한 사람의 지식인이 이렇다 할 상처 없이 살아남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그의 삶은 몇 편의 장대한 소설로 스여질 만한 것인데, 그러한 객관적 정황을 외면하지 않고 그는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탁발한 글쓰기의 능력을 발동하여, 이른바 우리 근대사에 기반을 둔 역사소재의 소설들을 써 나갔다. 그런 만큼 이러한 성향으로 그가 쓴 소설들은 상당 부분 자전적인 체험과 세계인식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그의 데뷔작「서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여러사람의 글을 볼 수 있으며,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 그 작품을 다시 읽어보아도 한 작가에게서 그만한 재능과 역량이 발견되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겠다라는 감화를 얻을 수 있다.

   산뜻하면서도 품위 있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구조, 낯선 이국적 정서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누구든 쉽사리 접근할 수 있도록 용해하는 힘, 부분부분의 단락들이 전체적인 얼개와 잘 조화되면서도 수미쌍관하게 정리되는 마무리 기법 등이 이 한편의 소설을 편안하게 채우고 있었으니, 작가로서는 아직 무명인 그의 이름을 접한 이들이 놀라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자신의 문학적 초상에 관해 서술한 글에서 이 작품을 두고 '소설의 정형'을 벗어난 것이지만 그로써 소설가로서의 자신이 가진 자질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적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 이후에 계속해서 발표된「마술사」「예낭 풍물지」「쥘부채」등에서 그 소설적 정형을 완연히 갖추면서도 오히려 그것의 고정성을 넘어서는 창작의 방식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작품들에는 문약한 골격에 정신의 부피는 방대한 문학청년이 등장하며, 거의 모든 작품에 소위 '감옥 콤플렉스'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작가의 현실 체험이 반영된 한 범례이며 향후 두고두고 그의 소설을 간섭하는 하나의 원형이 된다.

   이 초기의 단편에서 장편으로 넘어가는 그 마루턱에서 작가는「관부연락선」을 썼다. 일제 말기의 5년과 해방공간의 5년을 소설의 무대로 하고 거기에 숨은 뒷그림을 한 세기에 걸친 한일관계의 팽팽한 긴장을 깔았으며, 무엇보다도 일제 하의 일본 유학과 학병동원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교유관계 등 작가 자신이 걸어온 핍진한 삶의 족적을 함께 담았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장차 그의 문필과 더불어 호방하게 전개될 역사소재 장편소설들의 외양을 짐작하는데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산하」와「지리산」같은 대하장편들이 그 나름의 확고한 입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관부연락선」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사실과 문학의 예술성을 표방하는 미학적 가치가 서로 씨줄과 날줄의 기능으로 교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적 판짜기의 구조를 통하여, 그는 역사를 보는 문학의 시각과 문학 속에 변용된 역사와 역사의 의미를 동시에 걷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역사와 문학의 상관성에 대한 그의 텅찰은 남다른 데가 있어, 역사의 그물로 포획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문학이 표현한다는 확고한 시각을 정립해 놓았다. 이는 앞에서 필자가 그에게 역사적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질문했던 바로 그 문제를 말한다. 표면상의 기록으로 나타난 사실과 통게수치로서는 시대적 삶의 실상이 노정한 질곡과 그 가운데 스며 있는 사람들의 뼈아픈 사연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논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남겨놓은 이와같은 유수의 작품들과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당대 문단에서 그에 대한 인정이 적잖게 인색했으며 또한 그의 작품세계를 정서적인 논의로 평가해주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물론 거기에는 그 나름의 사유가 있다.

  그가 활발하게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역사소재의 소설들과는 다른 맥락으로 현대사회의 애정문제를 다룬 소설들을 도 하나의 중심축으로 삼게 되었는데, 이 부분에서 발생한 부정적 작용이 결국은 다른 부분의 남득할 만한 성과마저 중화시켜 버리는 현상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지나치게 대중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문학자품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양식의 수위를 무너뜨리는 경우를 유발하면서, 순수문학에의 지구력 및 자기절제를 방기하는 사태에 이른 감이 약여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구체적인 예증으로 열거할 만한 작품이 너무 많기까지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측면을 제하여놓고 살펴보자면, 우리는 여전히 그에게 부여되었던 '학구의 발자크'라는 별호가 결코 허명이 아니었음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그는 자신의 책상앞에 "나폴레옹 앞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엔 발자크가 있다"라고 써붙여 주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 오연한 기개는 나중에 극적인 재미와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의 구성, 등장인물의 생동력과 장쾌한 스케일, 그리고 그의 소설 처처에서 드러나는 세계 해석의 논리와 사상성 등에 의해 뒷받침된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그는 우리 문학사가 배태한 유별난 면모의 작가였으며, 누보로망의 작가이자 이론가인 로브그리예가 토로한 바「소설을 쓴다고 하는 행위는 문학사가 포용하고 있는 초상화 전시장에 몇 개의 새로운 초상을 부가하는 것이다」라는 명제의 수사에 여실히 부합하는 작가라 할 수 있겠다.

 

3. 작품세계의 전개와 다양성, 평가의 명암

   이병주의 첫 작품은 대체로 1965년에 발표된「소설 알렉산드리아」로 알려져 있다. 작가 자신도 이 작품을 데뷔작으로 치부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첫 작품은 1954년「부산일보」에 연재 되었던「내일 없는 그날」이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심중에 품어왔던 작가로서의 길이 합당한지 어떨지를 시험해 본 것 같다. 물론 그 시험에 대한 자평이 어떤 결과였든지 간에, 그 이후의 작품활동 전개로 보아 그의 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문학에의 열망을 사그러뜨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참으로 많은 분량의 작품을 썼다. 문학창작을 기업경영의 차원으로 확장한 일본의 마쓰모도 세이쪼 같은 작가와는 경우가 다르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작가 가운데 그에 가장 유사한 사례를 찾는다면 아마도 이병주가 아닐까 싶다.

   그런 만큼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주제의식도 그야말로 백화난만한 화원처럼 다양하게 평쳐저 있다.「예낭 풍물지」나「철학적 살인」같은 창작집에 수록되어 있는 초기 작품의 지적 실험성이 짙은 분위기와 관념적 탐색의 정신, 앞서 언금한 바와 마찬가지로 시대성과 역사소재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숨겨진 사실들의 진정성에 대한 추적과 문학적 변용, 현대사회 속에서의 다기한 삶의 절목들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의 형상력 부가 등속을 금방이라도 나열할 수 있다.

  더욱이 현대사회의 여러 현상을 주된 바탕으로 하는 작품들에서는,「행복어사전」「무지개 연구」등 그 사회의 성격에 대한 주인물의 반응을 부각시킨 경우「미완의 극」과 같이 추리소설의 기법을 도입하여 시사성 잇는 사건에 접근한 경우,「허상과 장미」「풀설」「배신의 강」「황백의 문」「서울 버마재비」「여로의 끝」등 애정문제와 사회윤리의 상관성에 초점을 둔 경우,「여인의 백야」「낙엽」「인과의 화원」「꽃의 이르을 물었더니」등 여인의 정서와 의지 및 애정의 균형감각을 살펴보는 경우,「전 은하에 내 별이」「지오콘다의 미소」등 젊은 세대의 의식구조를 추적한 경우,「니르바나의 꽃」과 같이 해외에까지 연장된 삶의 고난과 맞서는 경우 등 천차만별의 창작 유형들을 만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에는「허망의 정열」「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등의 창작집에서 역사적 사건과 현실 생활을 연계시킨 중편이나 함축성 있는 단편들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까지 이르면 이미 그의 작품에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원숙한 관점과 잡다한 일상사에서 초탈한 달관의 의식이 깃들여 있다.

   그런가 하면「청사에 얽힌 홍사」「성―그 빛과 그늘」「사랑을 위한 독백」「나 모두 용서하리라」「바람소리 발소리 목소리」「사상의 빛과 그늘」등의 수필집을 통해, 소설에서 다 기술하지 못한 직정적인 담화들을 표현해놓기도 했다.

   이병주는 분량이 크지 않은 작품을 정교한 짜임새로 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가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인식되기로는 부피가 창대한 대하소설을 유연하게 펼쳐나가는 데 탇월한 작가라는 점이다. 일찍이 그가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을 일고 그 마력에 자로잡혔다고 고백한 것도 이점에 견주어 볼 때 자못 의미심장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산하」「행복어사전」「바람과 구름과 비」「지리산」등이 그 구체적인 사례에 속하는 작품들인데, 이는 단순히 잠품의 분량이 엄청나다는 외형적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도도히 흐르는 시대적·역사적 현실과 그것에 총체적인 형상력을 부여할 때 얻어지는 사상성이나 철학적 개안의 차원에까지 이른 면모를 보인다.

   「산하」는 남한에서의 단독 정부수립으로 이승만정권이 들어서고 3·15 부정선거와 4·19 학생혁명에 의해 그 정권이 끝날 때까지, 이와 더불어 부침한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했다. 우리는 이종문이라는 그 흥미 있는 인물의 행적을 통하여, 한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가능태에의 목도와, 당대의 세태풍속 및 시대사적 풍향의 의미를 가늠하는 일을 함께 달설할 수 있다.

   「행복어사전」은 우등생의 모범답안을 추구하여 그것으로 세상의 갖가지 생존경쟁에 이기려는 사람들의 한가운데에, 그러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도 내면적 충일함으로 삶을 채우려 시도하는 한 젊은이를 그렸다. 신문사의 교열기자에서 작가로 길을 바꾸어나가는 서재필이라는 이름의 매우 유다른 주인공을 통해서, 우리는 범상한 삶이 배면에 응결되어 있는 여러 형태의 인식을, 예컨대 '가두철학'이라 호명해도 좋을 만한 정신적 성숙의 단계에서 해석하는 세련된 교양을 접하게 된다. 어쩌면 이는 우등생의 삶의 방식을 추단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작업일지 모르며, H. E. 노사크가「문학과 사회」에서 주장한 바 "등장인물은 작가에게 자기자신의 행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고 한 그 인물 형상화의 어려움이 어떻게 자연스러운 형태로 소설적 구조와 악수하는가를 짐작하게도 한다.

  「바람과 그름과 비」는 구 한말의 내우외환 속에서 중인 신분의 한 야심가가 어떻게 세상의 경열을 꿈꾸는가라는 대단히 의욕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그를 위한 주도면밀한 계획과 추진 및 그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루었다. 일견 부사불능하게 여겨질 만큼 치밀하고 치열한 최천중이라는 인물의 행위규범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부피 있게 기획하고 이를 극채색으로 치장해나가는 작가의 배포와 기량을 읽을 수 있다.

   「지리산」은 어느 모로 보나 이병주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남북간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면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집단생활을 한 좌익 파르티잔의 특이한 성격을 조면한 소설의 내용에서도 그렇거니와, 모두 7권의 분량에 달하여 실록 대하소설의 명호를 달고 있는 소설의 규모에서도 그러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 작가가 특별한 애정을 갖고 그 성격을 묘사하고 있는 박태영이나 하준규 같은 인물, 그리고 해설자인 이규 같은 인물은 일제 말기의 학병과 연관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치욕스런 신상'과 한반도의 걷잡을 수 없는 풍운이 마주쳤을 때, 이들의 삶이 어떤 궤적을 그려나갈 수밖에 없었는가를 뒤쫓고 있는 형국이다.

   이병주의 역사소재 소설들을 통들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하나의 요체는「지리산」에서의 이규와 같은 해설자의 존재다. 그 해설자는 이름만 바꾸었다 뿐이지 다른 작품들에서도 거의 유사한 존재양식을 갖고 내타난다. 예컨대「관부연락선」에서 이군 또는 이선생으로 불리는 인물,「산하」에서 이동식으로 불리느 인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서「쥘부채」같은 초기 작품에 나오는 대학생 동식이라는 인물도 모두 본질이 동일한 '이 선생'이다.

   작가는 이 해설자에게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자기자신의 시각을 투영했으며, 그런 만큼 그 해설자의 작중 지위는 작가의 전기적 행적과 상당히 일치되는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만약에 그 해설자가 불학무식하거나 당대의 한반도 현실에 대해 사상적이며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면, 작가는 애초부터 스스로의 심중에 맺혀서 울혈이 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불학무식한 부역자를 주인공으로한 조정래의「불놀이」와 좌파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한 같은 작가의「태백산맥」이 동일한 작가의 작품이면서도 역사와 현실을 읽는 시각의 수준에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여기에 좋은 보기가 됨직하다.

   이병주가 너무 많은 작품을 간단없이 제작해 낸 관계로 곳곳에 비슷한 정황이 중첩되거나 중·단편의 내용이 장편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어 있는 양상도 적잖이 발견된다. 이러한 측면은 정작 한 사람의 작가로서 그를 아끼고 그와 더불어 가능할 수도 있었던 한국의 '발자크적 신화'를 아쉬워하는 이들에게 만만치 않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라는 작품을 보면 노 독립투사 정람 선생에게서 작가 이선생이 '재능의 낭비가 아닌가'라고 회의하는 대목이 나온다. 정람이 동서고금을 섭렵하는 박랍강기한 지식을 자랑하면서 곰, 사자, 호랑이에 이르기까지 수준 이상의 박식을 피력하자 그러한 감상을 내보이는 것인데,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작가 자신을 두고 그러한 감회를 가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못하지 않았나 싶다.

   그가 보다 미학적 가치와 사회사적 의의를 갖는 주제를 택하여 힘을 분산하지 아니하고 집중했더라면, 빼어난 문필력과 비슷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극적인 체험들로써, 그 자신이 마력적이라고 언급한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같은 웅장한 작품을 생산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인 것이다.

   이병주의 타계 후 그는「월간 조선」1994년 6월호에서 박윤규라는 소장 문필가의 글을 통해, 그 자신이 빨치산이었다는 충격적이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자 곧바로 그 다음달의 7월호에서 작가의 외아들인 이권기 교수가 이를 반박하는 내용을 인터뷰하여, 앞의 불을 진화하는 사건이 있었다.

   근본적으로 그가 교전 중 피접해 있던 해인사에서 납치되어 지리산에서 부역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낭설인지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다. 또한 오늘날에 와서 그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사실이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온전한 이성을 가지고 이땅에 살았던 한 지식인이 피치 못하게 당면할 수밖에 없었던 사태, 광란하듯 춤추던 역사의 회오리바람과 어떻게 대응해야 했는가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를 제대로 설명해보기 위하여 이병주는 1972년부터 15년에 걸쳐 대표작「지리산」을 썼고, 그보다 한 단계 앞선 시대를 배경으로 그의 장편시대 개화를 예고하는 문제작「관부연락선」을 썼다고 할 수 있겠다.

 

4. 소설「관부연락선」에 비추어 본 역사의식

   「지리산」이 그러한 것처럼「관부연락선」또한 거대한 좌절의 기록이다. 유태림이라고 하는 한 전형적 인물 일제시대에서 해방공간에 걸쳐 살았던 당대 젊은 지식인의 전형성을 갖는 그 인물만의 좌절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대 대표하는 바 이성적인 사유체계를 가진 젊은 지식인 일반과 그 배경에 있는 우리민족 전체의 좌절을 기록한 것이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소설의 시간적 무대는 1945년 해방을 전후한 5년간, 도합 10년간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파장이 뻩어 있는 내포적 공간은 한일관계사 절반을 조망하는 1백여 년간에 걸쳐져 있다. 작가는 이넓은 공간적 환경을 자유롭게 할용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문학적시각으로 조망하는 직무를 수행한다.

   중학고 역사책에 보면 의병을 기록한 부분은 두세 줄밖에 되지 않는다.
   그 두세 줄의 행간에 수만 명의 고통과 임리한 피가 응결되어 있는 것이다.

   「관부연락선」의 주인공 유태림이 의병대장 이인영의 기록을 읽으며 역사의 무게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대목이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정신, 역사의 행간을 생동하는 인물들의 사고와 행동, 살과 피로 메우는 정신으로 이 소설을 썼다. 그것은 곧 그가 독특한 표식으로 네세운 역사와 문학의 상관관계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동경 유학생 시절에 유태림이 관부연락선에 대한 조사를 벌이면서 직접 작성한 기록과, 해방공간에서 교사생활을 함께하며 해설자인 이선생이 유태림의 삶을 관찬한 기록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두 기록이 교차하면서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의 장이 이 선생인 '나'의 기록이면 다음 장은 유태림인 '나'의 기록으로 되는 것이다.

   유태림의 조사를 통해 관부연락선의 상징적 의미는 물론 중세 이래 한일 양국의 관계가 드러나기도 하고, 이 선생의 회고를 통해 유태림의 가계와 고향에서의 교직생활을 포함하여 만주에서 학병생활을 하던 지점에까지 관찰이 확장되기도 한다.

   때에 따라 관찰자인 이 선생의 시점이 관찰자의 수준을 넘어서는 전지적 시점으로 과도히 진입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유태림에게서 들은 얘기를 종합했다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실상은 유태림 자신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간간이 눈에 띈다. 또한 이야기의 내용에 있어서도 진행되는 사건은 픽션인데 각주를 달고 각주의 문면은 실제 그대로여서 소설의 지위 자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대목도 있다.

   이는 아마도 이 소설의 대부분이 작가 자신의 사고요 자전적 기록인 까닭으로, 사실과 픽션에 대한 구분 자체가 모호해져 버린 결과가 아닌가 싶으며, 어쩌면 작가는 소설의 전체적인 메시지 외의 그러한 구체적 세부를 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가가 시종일관 이 소설을 통해 추구한 중심적인 메시지는, 그 자신이 소설의 본문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당시의 답답한 정세 속에서 가능한 한 양심적이며 학구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한 진지한 한국 청념ㅁ의 모습"이다.  능력과 의욕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하기로는 유태림이나 우익의 이광열, 좌익의 박창학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일제시대를 지나 해방공간의 좌우의 갈등 속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옳았으며, 신탁통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으며, 좌우의 양쪽 모두의 권력에서 적대시될 때 어떻게 처신해야 옳았겠는가를 작가가 질문하는셈인데, 거기에 이론 없이 적절한 답변은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다만 이를 당대 젊은 지식인들의 비극적인 삶의 마감―유태림의 실종 및 다른 인물들의 죽음을 통해 제시할 뿐이다.

   "한국의 지식인이 그 당시 그렇게살려고 애썻을 경우, 월등하게 좋은 환경에 있지 않는 한 거개 유태림과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나 "유태림의 비극은 6·25동란에 휩쓸려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비극과 통분되는 부분도 있지만, 일본에서 식민지 교육을 받은 식민지 청년의 하나의 유형"이라는 기술들은 곧 상황논리의 거대한 물결에 불가항력적으로 침몰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인식과 소통된다.

   유태림이 동경 유학시절에 열심을 내었던 관부연락선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 상황논리의 발생론적 구조에 대한 탐색이었으며, 제국주의 통치국과 식민지 피지배국을 잇는 연락선이 그것을 극명하게 상징하고 있다는 인식의 바탕위에 놓여 있다 할 것이다.

   유태림이 관부연락선을 도버와 칼레 간의 배, 즉 사삼프톤과 르아브르 간의 배에 비할 때 영락없는 수인선이라고 해도 관언이 아니라고 적으면서도 이를 맹목적 국수주의의 차원으로 몰아가지 아니하고 그 중 80%는 조선의 책임이라고 수긍하는 것은, 을사보호조약에서 한일합방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의 민족적 과오의 반성을 병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관점의 정립과 더불어 작가는 매우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어조로 당대의, 특히 좌익 이데올로기의 허실을 다루어 나간다. 아마도 이분야에 관한 한 논의의 전문성이나 구체성에 있어 우리문학에 이병주만한 작가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여순반란사건이 대한민국 정부를 위해서는 꼭 필요했던 시련"이라는 언술이 있는데, 이와 같은 수사는 여간한 확신과 논리적인 자기정리 없이는 쓸 수 없을 터이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만일 그런 반란사건이 없었고 그러한 반란분자들이 정체를 감춘 채 국군속에 끼여 그 세위를 확장해가고 있었다면, 6·25동란 중에 국군가운데서 반란을 방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세워진다.

   동시에 그는 남한에서 단독정부 수립과 이승만정권의 제1공화국 성립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고 변호하고 그럴 만한 이상적인 논리를 앞세워 이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이 험난한 이데올로기 문제에 이만한 토론의 수준을 마련한 작가가 우리 문학에 쇱지 않다는 감상과 더불어, 우리는 그의 주장이 단순한 보수우익의 기득권 보호의지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그는 한국문학의 지평 위에서 소설을 통해 심도 있는 정치 토론을 유발한 거의 유일한 작가이다.

   그러기에 그가 계속해서 내보이는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 당대정치 지도자에 대한 인물평에는 우리 시대의 정치사에 대한 새로운 개안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다. 특히 그는 여운형의 암살 사건에 대하여, 몽양의 좌절은 아나라 지식인의 좌절이며 몽양과 더불어 상정해볼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의 말살이라고 개탄했다.

   이 모든 혼돈하는 세태 속에서 유태림과 그의 동류들은, 역사의 파고가 높고 험한 만큼 가혹한 운명적 시련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유태림이 실종되기 전에 그가 죄익기관에도 잡히고 대한민국 겸찰에도 걸려들고 한 사실 자체에 적잖은 충격을 받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실로 당대의 이 나라 젊은 지식인들이 회피할 수 없었던 구조적 질곡을 실감있게 드러내 준다.
  이 소설의 마지막, '유태림의 수시(5)'끝부분은 이렇게 막음되어 있다.

         운명……그 이름 아래서만이 사람은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소설들에서 '운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토론은 종결이라고 하던 작가가 유태림의 비극을 운명의 이름으로 결론을 내렸을 때, 거기에는 도도한 역사의 유량에 밀려 부서져 버린 한 개인의 삶에 대한 깊은 조상이 함유되어 있다. 운명의 작용을 인식하고서 그 비극의 답안을 발견했다는 어투도 된다.

   작가는「작자부기」에서 "소설이라는 각도에서 볼 때「관부연락선」은 다시 달리 씌어져야 하는 것이다"라고 적었고, 송지영 씨가「발문」에서 "어떠한 '소설 관부연락선'도 그 규모에 있어서 그 내용의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 이처럼 감동적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반박했다. 소설의 순문학적 형틀이 완숙해야 한다는 축면에서 작가의 말은 틀리지 않으며, 소설 전체의 박진감과 감동에 있어서의 송지영 씨의 표현 또한 틀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우리 역사에는, 너무도 많은 유태림이 있으며 그들의 아픔과 비극이 오늘날 우리 삶의 뿌리에 맞닿아 있다. 이 명료한 사실을 구체적 실상으로 확인하게 해준 것은, 오로지 이 작가의 공로이다.

 

5. 이병주 문학의 재조명과 기림을 위하여

   나림 이병주 선생의 10주기에 즈음하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고 문학강연회가 개최되는 등, 긴 겨울 끝의 화신(花信)처럼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출중한 재능과 극적인 체험을 조합하여 우리 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보인 이작가에 대해, 이제는 참으로 체계적인 재 조명이 필요한 때이다. 유례없는 문학적 역사의식에 대한 정당한 평가, 대중적 통속성을 가진 작품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모두 포괄하여, 격동의 근대사를 온 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던 한 지시인 작가를 새롭게 되돌아보아야 할 시기에 이른 터이다.

   일찍이「모비딕」을 쓴 허만 멜빌에 대한 재평가가 그의 탄신1백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새로이 시작된 바 있으되,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한가하고 여유롭지 못하다. 우선 이 자리에 마음을 모은 선생의 동배(同輩)와 후진이, 모두 선생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깊이 경도되어 있는 형편이그러하다.

  그 뿐 아니다. 지난 해 평사리의「토지」기념 행사가 그러했듯이, 선생과 그 문학은 이 지방자치 시대에 있어 한 지역의 대표적 정신운동으로 떠오를 만한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 선생을 지속적으로 기림으로써 지역사회는 문화적 활동의 큰 걸음을 연이어 내딛게 될 것이며, 그것은 향토를 사랑하는 일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일임을 증명해 줄 것이다.

   선생의 대표작「지리산」과 그 이야기릐 흐름을 면밀히 상고하여, 그를 따라 지역사회에서「지리산」관광코스를 개발해 본면 어떨까? 필요한 지점에 설명문을 세우고 더 필요한 지점에 주기적으로 강연을 개설하며, 이 문화 이벤트에의 참여가 일상 속에 등산이나 레저에 접목되도록 하는 '생활문화'를 개발할 수 없을까?

  미상불 이러한 논의는 선생과 관련한 사업 및 행사를 준비하는 분들에게 매우 주제넘게 보일 지 모르지만 이 또한 선생을 존중하는 한 후학의 충정이며, 동시에 선생의 문학적 업적이 결코 세월의 갈피 속에 쉽사리 묻혀 버려서는 안되겠다는 경각심의 일단임을 밝혀 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