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방정식

 

 

   그것은 바라지 말라

   무엇인가 기도하는 사람, 목적하는 사람 치고 성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할 때는 예외없이 성공을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공이란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가령, 어떤 목적을 세워서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그 정도의 노력을 지불한 끝에 이룻 것인 만큼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또는 크게 운이 따라 예상했던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거나 횡제를 한 것을 일컬어 성공이라 해야 할 것인가…등등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열심히 공부한 끝에 고등고시에 합격했다면 사람들은 쉬운 말로「그는 성공했다」고들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정력과 재능을 쏟아 넣은 끝에 사업이 번창하여 탄탄한 기반에 올라섰다고 칩시다. 이역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성공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거두어들인 성과, 즉 고등고시 합격이나 사업의 번창에 충분히 값하는 노력과 정성을 기울인 그 결실을 수확했을 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결실은 당연한 몫이라고 보아야지, 그것을 성공이라고 하는 데는 좀 석연찮은 감이 듭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일반 사회 통념으로 보아「성공」이라는 말의 거죽에는 흔히「운이 좋아 그렇게 됐다」거나, 혹은「불로소득을 건졌다」는 식의 부러움과 다소 질시 섞인 감정이 묻어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아인시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을 바라서는 안된다. 성공이란 자기가 치른 값 이상의 못을 받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이 성공을 바라는 것은 일종의 요행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성공을 바란다는 생각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의당 자기가 지불한 만큼의 몫만을 바라야 된다」

   이 말은 성공지향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좋은 警句가 된다고 봅니다.
   冒頭에서도 말했듯이 흔히 성공이란 운을 바라는 말, 운이 좋다고 하는 뜻과 결부되게 마련입니다. 성공 운운한다는 자체가 운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는 뜻과 맞먹는 얘기가 되고 맙니다.

  생각건대 아인시타인이  성공은 바라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가 운을 안 바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운이 닿지 않아 실패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보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곧잘「운이 나빳다」거나「그게 운명이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만사에 있어 이같은 운명이란 말이 머리를 디밀면 모든 논의는 여기서 끝나 버리며, 오직 운명만이 발언권을 갖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운이라든가 운명이라는 말은 항상 최종적으로 말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盡人事待天命이라는 얘기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한 다음에야 운을 운위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인사가 끝나고 천명이 시작되는 그 선에까지 육박해가는 것은 당연히 우리의 선결과제라고 보겠습니다. 또 운이란 언제 올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만큼 항상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에다 하시라도 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오는 운을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가 있고 또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우리가 바랍직하게 생각하는 의미에 있어서의 성공에나 그 반대 의미에 있어서의 성공에 두루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이런 성곡에 대한 논의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우리의 행동에 결부되는 한에 있어서만 유익하다고 봅니다.

 

   운명의 적극적 수용

  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은 자기자신이 타인을 대함에 있어 항상 좋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밝은 얼굴로 상대방에게 유쾌함을 주는 태도와 늘 우울한 표정으로 상대방에게 불쾌함을 주는 태도를 놓고 볼 때 어느 쪽이 과연 더 많은 운을 불러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될 것인가는 자명한 문제입니다.

    또 자신의 뜻한 바 일에 대해 한눈 파는 법 없이 열성으로 임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과연 운이 어느 편에 미소를 지을 것인가도 분명한 일입니다. 부지런히 일하며 땀흘리는 사람에게 보다 않은 운의 계기가 돌아갈 것이 틀립없습니다.

   물론 늘상 빈둥거리는 사람에게 길바닥의 금덩이가 돌아가는 경우도 전혀 없지야 않겠지만, 아인시타인의 말마따나 그런 것을 바라서는 안된다고, 그걸 바라지는 말기로 하자고 우선 스스로 다집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또 길을 건널 때 신호등의 지시에 따른다든가 하는 등으로 철저히 교통법규를 지키는 사람과,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없이 마음태키는 대로 길을 건너는 사라을 비교해 볼 때, 교통사고라는 악운이 따를 확률은 후자에게 압도적으로 높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나 자신이 적극적으로 향운을 불로 들일 뿐만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가 남에게 행운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사람, 누구에게나 만나 기분이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운에 쉽사리 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며, 행운 그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남에게 행운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누구보다도 성공의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사람의 존재가 바로 성공적이라고 보겠습니다.
   자기가 항상 남에게 있어 행운이 되자면 그 또한 보통 노력이 드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첫째 건강해야 하고,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도 갖춰야 하며, 또 자기 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초적인 역량을 갖추고 난 연후에 비로소 성공을 바랄 수 있다고 봅니다.

   뭔가 한 가지 뜻한 바 일을 이루려고 하는 젊은이라면 이러한 기초역량을 기르는데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옛사람들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란 무척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눈빛이 살아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였습니다. 그리고 눈빛이 영롱히 살아 있어야만 사람 취급을 받았고, 흐리멍텅한 눈빛이라면 형편없는 평점을 받게 마련이었습니다.

   이「눈빛이 살아 있다」는 얘기는 곧 무언가 그 사람의 뜻한바가 분명하다는 시사가 되는 것이며, 거기에 매진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조상들은 청운의 꿈을 좋아했고, 입지양명을 즐겨 얘기했습니다.

  가끔 어떤 젊은이들이 나를 찾아와 부탁을 합니다.「선생님, 취직을 좀 시켜주십시오, 아무거나 밥만 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라고. 이래서는 얘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학부를 졸업했다는 젊은 사내의 꿈이 고작 밥먹고 사는 것 뿐이라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고작 그런 정도의 꿈을 가진 친구가 대학에 뭣하러 다녔으며, 무엇 때문에 전공이란 걸 붙들고 4년세월을 허송했느냐는 질책부터 내 쏟고 싶습니다.

   모름지기 자기 전공에 대해서만은 학교 성적이야 어떠하는간에 나름대로의 견식과 자신을 갖추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밥만 먹으면 된다는 식의 얘기는 도저히 성공을 바라는 사람의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공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성공의 대기자세는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성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되 정작 성공을 바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나 자신의 예를 들어보자면, 내 주변에 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돈을 벌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가운데 지끔까지 돈을 벌었다고 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경우에는 사실 돈을 벌어보겠다고 생각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벌겠다는 생각만으로 애쓰던 사람들이 장년기에 들어서자 나에게 돈을 꾸러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를 볼 때 성공이란 것도 구호나 무모한 추진만으로는 쟁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앙드레 모로와라는 사람은 그의 저서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돈을 저는 일보다 쉬운 일은 없다. 다만 사람들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만을 할 뿐 그 방법적인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어렵다고만 생각되는 것이다」
   퍽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의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방법적인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은 나에게 돈을 꾸로 오는 아이러니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역전승의 감동을

   어떠한 성공을 꿈꾸더라도 그 성공의 바탕을 마련함이 없이 덤빈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또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많은 사람이 성공을 바라며 땀을 흘립니다. 그들 중 소기의 성공을 이룩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성공자보다 실패자의 수가 앞도적으로 많게 마련입니다. 실패의 유형도 물론 허다할 것입니다.

   어떤 영역에서든 실패자는 슬픕니다. 그러나 그 슬픔의 강도 역시 실패의 유형에 따라 다를 것은 분명합니다. 정치가의 실패는 그가 참된 애국자라면 보답받지 못한 至誠을 프라이드로 전환해서 慷慨의 생을 지탱할 수 있고, 그가 모험가였더라면 미리 100분의 99의 실패를 예상하고 있었을 터이니 그다지 억울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예술가의 실패는 그 실패를 통해 스스로의 성장을 이룩하고 불우한 예술의식을 철학의 지혜로 심화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가 성공보다 더욱 빛날 메파모르포오제의 기적도 이영역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업가의 경우는 퍽 다릅니다. 실업가가 모든 요욕을 잃어 버릴  정도로 실패하면 그는 인생으로서의 완전한 실패가 됩니다. 돈에의 向日性과 돈의 가치와 돈의 작용으로밖에 세상과 인생을 해석할 수밖에 없는 실업가에겐 정치가의 프라이드나 체념도 있을 수 없고, 불우한 예술가의 지혜를 모방해볼 수도 없습니다. 파산한 실업가는 그의 파산과 동시에 세계를 향한 열쇠를 잃어 버린 셈이며, 세계를 판별하는 빛깔을 잃어 버린 셈이며, 또한 세계속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遠近法을 상실한 것과 같습니다.

   정치가의 절망엔 거친 노호가 있을 수 있고, 예술가의 절망엔 지혜의 詩가 있을 수 있지만, 실업가의 절망은 그가 求道者서의 轉身이 불가능한 한 일체의 빛을 거부하는 흑색의 절망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에서 처럼 자신이 추구하는 바 목적에만 全生의 승부를 건다는 게 참으로 위험한 노릇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정공적인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평생을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고 또 자기성장을 기해나갈 수 있는 인생이라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본다면 나의 인생도 그다지 실패한 인생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하고 때로는 자위도 해봅니다.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아 한점의 후회도 없다고 생각되는 인생…이러한 인생이야말로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봐야겠지만 그런 인생이, 삶이 과연 우리에게 가능하기나 할 것인가라는 점에는 의문이 갑니다. 단 한번의 시행착오도 없이 성공적인 인생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가운 일일뿐더러, 어쩌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 못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첩첩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부절(不絶)한 노력으로 자기의 생을 버티어가는 데서 얻는 보람과 감동이 더 큰 때문입니다.

   감동없는 삶, 시련도, 그것의 극복도 없는 생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감동을 창조하고 보람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成長率에 맞는 적당량의 시련과 그의 극복은 필수적인 생의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어느 축구경기에서, 계속 몰리고 있던 한 팀이 타임아웃을 얼마 남갸좋지 않은 상황에서 역전골을 성공시키고는 전 선수가 환호작약하며 눈물을 글성거리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일방적인 경기를 이끌어나간 끝에 슬리했다면 그처럼 감동스러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인생이란 축구경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리얼한 것이며, 광범하고 가치로운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공자가 되기 위해서는 뜻한 바 목표에 육박할 수 있는 기초적인 역량을 기르는데 마땅히 전력투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