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묵숨을 받아 태어난다고 하는 것 - 이 자체가 우리들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生을 끝내 버리는 죽음 역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 '생과 사'라는 문제는 종래 모든 종교·철학의 중심 테마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문제는 그 자체의 심각성으로 인해 인간은 누구나 어느 때 어느 순간이든 이와 씨름하게 됩니다. 특히 이같은 죽음에의 번민은 지각이 갖추어지고 감각이 예민을 더하는 청년기의 젊은이에게는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 어떠한 수용테세가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 -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종교도, 여하한 大哲의 정의도 보편적인 진리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가습니다.

   죽음을 하나의 관념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단순한 생의 마감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나서 생을 누린 이래 항상 죽음은 그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근접한 자리에 있는가를 살펴 보십시오. 물리적인 수치로 나타낼 길이 없을 만큼 죽음은 우리에 밀착해 있는 것입니다. 수도없이 많은 생이 지상에 부풀어 올랐다가 이내 쓰러져갔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각인에게 모두 다르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또한 허다한 사람이 그것을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죽음의 습격으로 생을 끝냈을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永生을 배제한 것이 참다운 종교일 수 있습니다. 가장 비 인간적인 사상은 그것이 죽음의 사상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수용자세가 어떠한가는 곧 생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개인에 있어 그 生死觀이 곧 인생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날의 생을 살아가는데 무척이나 바쁩니다. 우리 생의 끄트머리에 예외없이 잇대어 있는 죽음을 우리는 거의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문제는 결국 그 사람의 생의 質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일상은 항상 죽음을 의식하고 있을 만한 여유로움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다」라고도 말했고, 「죽음은 人事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삶에난 열중하라」고도 했습니다. 이 모든 말에는 물론 一理도 있고  二理도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의 성찰

   우리의 생이라는 것은 생각해 보면 죽음을 향한 진행이며,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결국 '생과 사'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안해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생을 자르듯이 마감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서서히 죽어가는 동안에 우리는 어느덧 죽음에 상당히 익숙해지는 셈이 됩니다. 가령 혈육의 죽음을 본다든지 해서 이러한 타인의 죽음을 자꾸 겪는 동안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소 죽음에 익숙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덯게 죽음에 익숙해 있느냐 하는 문제가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언젠가는 죽고 말 것이다」라는 생각을 끊임 없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단적으로 말하면 죽음에 너무 사로잡히다 보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된다거나 카톨릭의 트래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간다든가 하는 양상으로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음을 깡그리 잊어 버린 채 바삐 살아갑니다.

  직장인들은 단 5분의 지각을 모면하기 위해 달리는 버스와 숨차게 경주를 하며, 수험생들은 톤시도 허송치 않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속일 수 없는 일상이며, 생의 연속선을 이루고 잇는 현실 그대로의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을 잊지 말라. 단, 매일 죽음을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한달에 한번쯤은 죽음에 데헤 생각하라」고.

   여기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라는 말은 곧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熟考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죽음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 본다 하더라도 죽음 그 자체를 파악하기란 어려운 노릇입니다. 에피규로스의 말에「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죽고 나면 더더구나 죽음을 모른다. 그러므로 어차피 모를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주음이란 문제는 일단 덮어두자」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충분히 음미해 볼 만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게 좋다는 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너무 그렇게 해도 곤란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한달에 한번쯤, 일주일에 한 번쯤「나도 죽을 수 있는 인간이다. 언젠가 나도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라틴어로 말하면 memento mori(Remember that you must die)라고 하는데 이런 생각을 가끔 조용한 시간에 해 보는 것이 자신의 생활을 컨트롤하는 데 퍽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우리 주위를 한번 둘러보면, 자기는 마치 결코 죽지 않을 듯한 기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허다히 보게 되는데, 그래서 살아가는 방식들이 거칠고 무자비하고 각박하고, 뒤엉켜 부딪치며 돌아가게 됨도 모두 이같은 죽음에 대한 의식을 전혀 망각해 버린 데서 비롯되는 현상이라고 보아지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은 영원히 살 것처럼 남을 괴롭히고 짓밟으며 악착같이 덤벼드는 사람들이 만약「나도 언젠가는 국을 것이다. 가을 아피리 처럼 한번 생에서 떨어져 버리고 나면 내 인생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라는 생각을 때때로 하게 된다면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게 될 것이며, 보다 나은 삶의 방법을 찾게 될 것이며, 보다 푸근한 인정의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의 실존적 의미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죽음이란 것은 기막힌 점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에 익숙해 있지 않다면 어머니의 죽음이라 든가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현제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무엇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내가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는 명제가 설정된다면 그 이별의 슬픔이란 엄청난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마음의 바탕에 깔려 있는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생각이 역설적으로 그러한 슬픔을 경감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보는 우리의 자세는 극단적인 절박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것이 곧 죽음에 대한 일종의 諦觀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봅시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라면 이또한 엄청난 사태가 될 것입니다. 인생이란 생각해보면 기쁨보다도 슬픔이 많은 것이고, 悅樂보다는 고통이 깊은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이 끝날줄 모르고 영우너히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잘망만을 안겨줄 것입니다. 나도 때가 되면 죽는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크나큰 위안이 되는 국면도 살다 보면 겪에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살아 있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에도 누구나 몇 번식 죽음의 고비를 겪게 됩니다. 그러한 고비 중에 어떤 것은 우리의 五感을 경악케 하기에 충분한 것도 있고, 또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스치듯이 지나가 버리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내 삶의 노정을 돌아다보면 나의 뇌리에 확연히 남아 있는 죽음의 고비는 딱 세 번 있었습니다. 가장 어렸을 때 겪은 것으로는 일곱 살 때 시골의 龍沼에 빠졌던 일인데, 다행이 수영을 잘하는 사람의 눈에 띄어 살아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두 번째의 고비는 중국대륙에서 맞은 거였습니다. 蘇州에서 2백리쯤 떨어진 常熟이라는 곳이었는데, 학병으로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아주 더운 날 혼자 크리크 - 옛날 진시황때 만들어진 운하 -에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앉아 있던 판자쪽이 무너져 내리면서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때 나를 구해준 사람은 한 열 살쯤 돼뵈는 중국 소년이었는데, 그 소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꼼짝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 크리크라고 하는 것은 바닥이 두꺼운 뻘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번 빠져들면 물 위로 떠오를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나는 전혀 헤엄을 못치는 형편이었고 보니, 자칫 이국땅에서 불명예스런 학병으로 안전사고를 당할 뻔 했습니다.

  최근에 죽을 뻔한 일을 또 한번 겪게 되었는데, 재작년 파라과이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나라의 수도 아순시은에서 차도를 건너러 할 때, 한쪽에서 풀스피드로 달려오는 차를 보았습니다. 나는 그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차도로 내리섰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홱 낚아채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내 코앞으로 또 한 대의 차가 맹속으로 휙 지나갔고, 나는 길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한 발짝만 더 내디뎠더라도 나는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그처럼 10분의 1초, 백분의 1초 사이에 결정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아찔한 순간을 당하고 나니 세상이 온통 다르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의 하늘과 병반 다를 것 없던 그 아순시은의 하늘이 그처럼 샛파랗게 보일 수가 없고, 길 양켠의 가로수가 일제히 나를 주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꽉 응어리져 있던 대기가 마치 바위에 부딪쳐 깨어지는 파도처럼 일순에 확 풀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촉각이나 시각이나 청각에 들어오는 모든 상황들이 그렇게 달라지는 거였습니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극한 상황이란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실존즈의란 무엇인가 하면, 앞서 1초의 시간과, 지금의 순간 순간이 전부 다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통 살아갈 때는 그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아 도저히 그 분간이 잘 서지가 않고, 어제와 오늘의 다른 의미를 모르는데, 우리가 시간의 의미를 아는 것은 극한상황에 처해졌을 때이며, 바로 그러한 순간에 실존이 나타나 보인다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문학이 극한 상황을 잘 그리는 것은 극한 상황을 통해서 인간의 시간의 의미가 나타나는 때문입니다. 즉, 극한 상황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 의미로서밖에 우리는 시간의 의미를 알 수 없다는 얘기지만, 사실 우리의 생이란 그 일체가 이러한 극한 상황의 연속이라는 뜻입니다.

   실존주의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이 지금의 이 시간과 자나간 시간,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이 전부 다른 무게와 결연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보통 사람은 평소에 잘 알 수가 없으며, 극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모든 시간이 기실은 본질적으로 다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문학이 극한 상황에 처헌 인간의 실존을 즐겨 다루는 것은 모두 이러한 시간의 의미를 드러내 부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약한 존재로서의 자각

   나에게 있어 지금의 삶이란 2차대전과 6·25동란을 지나오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쳐갔을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비켜온 결과일 따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굳이 내 생존의 의미랄까 이유 같은 것을 들자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사실보다 그 무수한 포탄의 탄착지점을 간신히 피해 왔다는 의미로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겁니다. 또 내가 그 치욕스런 학병으로 전장에 끌려나갈 때, 병력의 전선배치를 계획하는 일본 참모본부의 한 장교도 내 운명을 결정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명단을 앞에 펼쳐놓고 이놈은 남방으로, 이놈은 중국으로 하는 식의 병력배치를 하는 그자의 연필끝에서 내 생의 전체가 요동한 셈이다.

   우리의 생의 구조라는 것은 그 근저를 살펴보면 이렇듯 취약합니다. 그러니까 생각나는 말이 있지요. 파슽칼은 <팡세>속에 있는「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보통 해석하기를「인간은 갈대처럼 생각해야 된다. 한 줄기의 바람도 흔들리는 민감하고 취약한 존재로서 자신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갈대처럼 약한 존재로서 스스로를 생각하라는 얘기인데, 과연 명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의 실날 같은 우연이 지금의 내 생을 버티어주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입니다. 앞으로도 또 그런 고비가 언제 닥칠지도 모를 일이고 보면 우리의 생이란 취약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강함, 그 강하다는 것도 스스로를 약한 존재로서 생각하며, 약함을 딛고 일어서는 가운데 지혜를 얻어 강해지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진정한 강함이란 그처럼 약한 속에서 일어서는 무엇이라고 나는 믿습니다.「나는 하늘의 점지를 받아 태어나면서부터 강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사람의 자유이겠습니다만, 그러한 강함이 한갓 허장성세에 불과하며, 단일격에 주체할 바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마는 사례를 우리는 허다히 보아왔습니다.

   나폴리옹을 보면, 한때 유럽대륙을 석권한 그였지만 역시 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최후가 그것을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쉰 둘이라는 한창 나이에 유배지에서 간암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한없이 약한 존재라는 자각을 가지고, 이 약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며 어디까지나 약하다는 그 바탕 위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만이 그 인간이 커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커지는 것이 진실로 커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가 의미하는 것

  이러한 관점에서 서서 다시 우리의 인생이란 것을 살펴볼 때, 우리가 너무 죽음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와 반대로 전혀 이같은 생의 취약성을 잊어 버린 채, 목표 제일주의로만 생을 운영한다는 것도 퍽 위태로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끔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러한 극단에 적절한 제동을 거는 작용이며, 생의 진종한 위미에 보다 육박할 수 있는 교두보를 구축하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자신의 어느 한계점을 설정하고 의식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을 좀 야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게 되며, 자연 우리의 생을 보다 아름답고 알차게 재단할 수 있는 안목과 계산 능력을 얻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계산만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이지만 전혀 계산없이도 살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헤밍웨이의「바다와 노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던 노인이 어쩌다가 엄청나게 큰 고기 한 마리를 잡아 뱃전에 묶어서 돌아오는데, 그 사이에 상어떼들이 덤벼들어 고기의 살점을 마구 떼어갑니다. 노인은 죽을 힘을 다해 상어떼와 싸우면서 항구까지 돌아와 보니 그큰 고기는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아 있더라는 얘기 아닙니까? 이 얘기에 대해 헤밍웨이는 한 노인이 바라는 대자연 속에서 大魚와 더불어 투쟁한 그 현장 자체의 묘사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읽는 우리로서는 그 속에서 인생의 교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전생애를 기울여 수단과 방법을 가림이 없이 한 목적을 이루어 놓고 나니 그 목적이 이루어진 순간에 돌연 無로 돌아가 버린다는 얘깁니다.

  그 소설을 읽고 생각나는 게 고등고시를 준비하던 한청년의 애틋한 사연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상당한 두뇌와 실력을 갖춘 청년이었지만 시험운이 없었든지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어느 해엔가 나는 합격자 명당에서 그 청년의 이름을 발견하고 축하하러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그 전날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연인즉 합격자 명단에 자기의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공교롭게도 이 이름이 동명이인의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까운 나이에 죽었다는 정말 애통하기 짝이 없는 사연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이렇게 목적제일주의로 인생을 경영하는 데 부수되는 파탄의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생에 목적이 없이 사는 것 역시 재미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세우되 그 목적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는 이런 미묘한 사이에 인생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목적을 성취한 후에도 그 목적을 위해 지나친 중점투자를 한 나머지 그 성취된 목적을 온전히 향유하지 못하는 예도 우리는 흔히 보게 됩니다. 오로지 돈만 벌겠다는 일념에서 안할 짓 못할 짓 대해가며 살아가는 사람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인생의 어느 과정에 이르면 어느 정도의 돈을 움켜쥐고 있을 것이지만, 그밖의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정도 떠났을 것이며, 사랑도, 인격도 이미 거덜난 뒷일일 것입니다. 

   하물며, 여러 가난과 더불어 오면서도 후회없는 생을 꾸려 온 사람만이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따지고 보면 극히 적은 몫에 불과합니다. 그가 돈은 반쯤만 벌고 인생의 모든 그밖의 중요한 것들을 도닥거리며 살아왔더라면 보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을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그의 경우는 마치 헤밍웨이의 그 노인처럼 죽을 힘을 다해 잡은 고기를 끌고 와 보니 남은 것은 뼈다귀뿐이더라는 꼴과 흡사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바로 존 듀이 같은 철학자가「교육은 생활이다. 생활은 교육이다」라는 학설을 제창하게 된 근거도 결국 여기 있는 것입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 6년제, 4년제 등등의 교육과정을 세워두고 그 끝에 목적을 흭득케 하는 교육방법은 파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보다 학교 다니는 교육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생활이 되어 그 나름대로 충분히 즐거운며서 그결과 어느 목표에 접근해 가는 그런 교육이라야 되지, 수단으로서의 교육, 즉 목적주의 교육은 안된다는 얘깁니다.  말하자면 全人敎育-전인교육이란 폴 캐란디가「全體人間을 위한 교육」이라 표현했습니다-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다시 죽음을 생각해볼 때, 죽음은 언제 우리를 이곳에서부터 더려가 버릴지 모르는 판국인데, 인생을 어떤 목적만을 향해 기울이다가 뜻하지 않게 죽어 버린다면 그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무 목표달성 일변도로만 추구하며 생활을 규제해 버리고 나면 정작 그 목표에 도달했을 때는 아까 헤밍웨이의「바다와 노인」에서 본 그 물고기의 뼈다귀 같은 形骸만 거머쥐게 되는 경우가 되고마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자신의 생활을 조절하고 충족시키면서 목표에 도달했을 때는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역량도 커져 있겠지만, 자연 다른 면으로도 인간이 커져 있음으로 해서 그 목표를 충분히 감당하며 향유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커다란 진실에 접하게 되는데, 우리 생의 전체에 값할 만한 목표가 세상에는 그리 흔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써 다시 한번 말하겠거니와「때때로 죽음을 생각하라. 그리고 그 위에서 당신의 생을 설계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스로의 생활을 컨트롤할 수 있게 하며, 언제 죽더라도 후회없는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이 되며, 그래서 자신의 생을 보다 열심히 살 수 있게 되며, 보다 나은 삶의 방법을 찾아줄 것이며, 우리 자신의 생의 質을 높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