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이란 무엇인가
- 부끄러운 삶을 돌아보며 -

 

 

   뿌리없는 우리의 生

   누구나 인생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예외없이 자기의 인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리산 밑에서 나무하는 초부(樵夫)들이 흥얼거리고 있던 노래를 나는 기억합니다.
  「대천지 한바다에 뿌리없는 남구(나무)로다!」
   인생을 이 상으로 멋지에 표현할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 그 무식한 초부도 인생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H. G.웰즈라고 하면 위대한 문학자, 위대한 생물학자, 위대한 역사학자, 위대한 사회사상가… 줄잡아「위대하다」는 형용사를 몇 개씩이나 나열해서 평가해야 할 사람입니다. 이 인물이 쓴 인생론이 있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인간은 不死이지만 個個의 인간은 불사가 아니다.」

   헌데 이것이 인생을 알고 있는 것으로 되는 것일까요. 물론 웰즈는 인생론에서 좋은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내가 그것을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만,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은 명심해둘 만합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또는 대다수의 의지, 이런 따위의 엉터리 같은 문제에 우리들의 이지(理知)와 의지를 조금 할애하자는 主義를 나는 믿지 않는다. 이 세계와 그 장래는 독선적인 민중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무력한 대중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最良의 것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의 최량의 것이 내일엔 평범한 것으로 되겠지만, 가령 내가 얼만가의 사회평등론자라면 그건 네가 愚民들에게도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니라, 널리 일반에게 기회를 주어 능력있는 자가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해주고 싶기 때문이며, 만일 내가 경제적인 변혁을 바란다면 현재의 제도가 터무니 없는 낭비자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그 生長을 돕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 관한 논의는 알쏭달쏭합니다. 말하자면 H. G.웰즈쯤 되는 사람도 인생을 설명하는 덴 서투르다는 것입니다.
   지리산 아래의 무식한 나무꾼도 인생을 알고 있다는 것과, H. G.웰즈의 博識도 인생을 알고 있지 못했지 않느냐는 이 사이의 문제로서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

 

   운명의 공간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등은 인생의 達人들이었습니다. 그 아래에 랭크가 되겠지만 인생론의 選手는 사상가, 종교가의 수만큼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에 관한 說이 본인들에겐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타인에게 있어선 일종의 代數的 표현일 뿐입니다. 그 사상의 바다에 投身하여 익사하는 것으로써 어떤 의미를 부여하면 모르되 스스로의 개성을 발휘하여 그들의 인생론을 활용할 수 있는 경우란 發心한 사람이 석가나, 공자, 스크라테스, 예수만한 총명을 획득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일반론적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5억의 인생은 45억개로 각각 다름니다. 사람은 제각기 스스로의 인생을 살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어머니에 의해 탄생되는 것이지만, 죽을 때는 혼자 죽게 마련입니다. 혼자 죽지 않으려고 옛날의 王者들은 殉死를 제도화하기도 했지만, 같은 때 같은 곳에서 죽는다고 하여 결코 같이 죽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운명을 들먹이며 모든 論議가 거기서 끝난다고 하지만 인생론의 불가능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힘이 운명에 있기 때문에 운명에 대한 어떠한 해명없인 인생론은 겉도는 不毛의 논의가 되고 맙니다.
  「운명은 이에 순종하는 자는 태우고 가고, 이에 거역하는 자는 끌고간다」는 것은 세네카의 말입니다. 태우고 가건, 끌고가건 운명에의해 갈곳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言語道는 거기에서 단절됩니다.
  「운명이라구? 내가 운명을 만들지.」
   나는 이 말 이상으로 영웅적인 말은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데, 이 말 이상으로 비창한 말이 없다는 것은 센트 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의 최후가 증명해 보인 그대로입니다.

   그런 까닭에 종교가 발붙일 곳이 생긴 것이고, 로켓이 토성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교가 그 최선의 의미로서도 인생론에 있어서의 패배현상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말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인생은 이를 논할 것이 아니라, 이를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이것을 말을 바꾸어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운명을 논할 수는 없지만 이를 극복할 순 있다」

 

   겸손과 관용의 지혜

   아닌게아니라 나의 인생도 지금 되돌아보면 운명과의 대결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운명과의 대결 아닌 어떤 인생이 있겠습니까만, 사람은 저마다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하게 되는 폐단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의 운명과의 대결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 이상으로 처참한 운명을 갖고 그 운명과의 대결에 패배한 무수한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는 오히려 행운이 아니었던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만큼 나는 운명과 싸워이겼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운명과의 대결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운명 쪽에서 양보해 주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는지 모릅니다.

   나는 결정적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온 셈인데, 그럴 때마다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하고, 그때 그때의 상황을 간혹 회상해 보는 것이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집니다. 요컨대 나는 지금 間日髮이라고 할 수가 있는 사소한 우연의 힘으로 이런 글도 쓰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경정적인 죽음의 고비를 겪어 온 나의 눈으로서 보면 목에 힘줄을 세워 사람들의 꼴, 당당하게 무언가를 주장하며 뽑내고 있는 모습들이 하나같이 우스꽝스럽습니다.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닐텐데 하고.  
   그러나저러나 아까도 말했듯 사람은 자기의 인생 이외의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남의 인생에 이러쿵 저러쿵 참견할 건덕지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경위로 해서 겸손은 배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개인에 관한 일로선 성을 내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절대적인 힘 앞에선 옴쭉달삭 못하는 주제에 상대방의 힘이 약하다고 보일 땐 성을 낸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대한 이중의 모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은 하긴 하지만 행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관용 대신에 분노가 터져나올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인생이란 슬프기 한량이 없습니다.

   나는 가끔 노예로서 살면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슬기롭게 살려고 애쓴 이솝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솝은 세상에 관한 자기의 견식을 동물에 비유하야 얘기하고, 자기의 불행과 슬픔을 동물의 입을 통해 말하게 했습니다. 풍부하기 짝이 없는 인생의 事象을 두고 동물의 감정을 빌어 자기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이솝의 운명과의 대결을 보는 것입니다.
 「비굴기와 같은 눈과 배암과 같은 지혜」
  이는 성서에 나타난 지혜입니다.  나는 그 화신을 이솝에게 봅니다.  인생을 배우기 위해 이솝을 배워라.  누구에게라고 하기 보다 내가 내게 타이르는 말입니다.

 

   성심은 행운을 부른다

   행복한 인생을 기획해 볼 수 없는 일일까? 나는 현재로선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네 주변 이곳 저곳에 숱한 불행이 비참의 양상을 대고 범람한 가운데에선 나 하나만의 행복은 설혹 그것이 허용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腐屍를 꽃으로 장식했대서 아름답게 필 까닭이 없고, 독이 미만해 있는 공기 속에 한두 방울의 향수가 보람을 다할 까닭이 없습니다. 기껏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오늘의 나의 평온을 내 노력으로써 마련했다는 자각,  그리고 그것의 실천 뿐입니다. 좀더 말을 보테면 인류의 평화, 또는 행복에 적극적인 기여는 하지 못할망정,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해독이 되어선 안되겠다는 다소곳한 결심만은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런 결심을 통해서 우리는 혹시 행운을 만들어볼 수도 있는 일입니다.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 성실한 인간에게 행운이 없다면 그 따위 행운은 이편에서 거절해 버려도 무방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나 네 주변을 둘러보면 성실한 인간이 그 성실에 대한 보상을 받기는커녕 억울한 처우만을 받고 생명을 끝낸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내 친구 가운데 50세를 채우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수두록한데, 모두들 아쉬운 인물들이었다는 것은 인생을 비관적으로 보게 하는 충분한 증거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꼭 지녀야 할 태도로서 성실을 제외하곤 달리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혹독한 운명에 희롱당한 자를 제외하곤 성실한 사람으로서 인생에 낙오한 자가 그다지 없는 것을 보면 최저한의 교훈이 이런 곳에서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입니다.

 

   상극의 모순율

   이처럼 인생론을 불가능하다고 해도 인생에 관한 감회는 무궁합니다.
   노봐리스의「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하는 말은 특히 감동적입니다.  노봐리스는 어떤 인간이라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인간이 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인간이 될 것이냐 되느냐하는 것은 각자의 문제입니다. 아무튼 괴테만한, 베토벤만한, 아인슈타인만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예술 이상의 예술이 이니겠습니까?

   그러나 전원의 한 농부의 자기가 뿐린 씨앗, 자기가 흘린 땀에 응해 자연에서 보상을 받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정도의 살생으로 죄를 한정하고 일생을 안은 속에 보낸 인생도 작가미상으로 남는 시나 音曲처럼 아름다운 예술이 아닐까요?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죽거든 눈물을 흘리지 말라.
   눈물을 흘리는 척만 해라!
   내가 죽거든 슬퍼하지 말라.
   슬픈 척만 하라!
   예술가란 원래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은 척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장 꼭또의 유언입니다.
 「어찌 에술가 뿐이랴. 사람이란 원래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은 착만 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인생엔 죽음이란 게 없는 것입니다. 따지고 말하면 자의에 의한 죽음이란 없고, 타의에 의해 죽은 척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죽음을 모른다」고 한 것은 에피큐로스만이 아닙니다. 공자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이젠 나는 좀 자야겠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말이었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해서 不可解한 것으로 되는 운명으로 해서 토론의 대상으로선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숙명적으로 말하면 인간이란「죄와 벌」이라고 생각합니다.윤리적 의미로서의 죄와 벌도 아니고, 종교적인 뜻에서의 죄와 벌도 아니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어느 소설의 제목으로서 내건 바로 그 뜻에 있어서의 죄와 벌인 것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를 짓습니다. 무언가를 살생하지 않곤 그의 생명을 지탱해 나가지 못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죄엔 필연적으로 벌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벌이란 곧 죽음입니다. 그가 살기 위해 거듭한 살생은 결국 말하면 죽기 위한 준비인 것입니다.

   남을 죽이면 자기도 죽는다. - 어저면 상극의 법칙, 矛盾律이 인생을 관통하는 원칙일지 모르는데, 인간의 숙명은 바로 이 원칙에 잉태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죄짓지 않곤 살 수 없는 존재! 이런 일반론으로써 캄프라지 하기엔 너무나 엄청남 죄인이란 걸 자각할 때 니는 벌에 대한 공포에 앞서 어쩔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내게 있어서 인생이란 아직도 부끄러움의 나날입니다.
   아아, 언제 이 부끄러움을 씻고 떳떳이 살아볼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