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에마 에세이

 

문학이란 무엇인가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문학은 필경 사사의 예술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학을 사상의 예술이라고 할 때, 그 사상이란 작품속에 담겨진 사상의 내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 전달의 방식까지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있다고 치자.
 「의사는 병자의 맥박을 짚었다. 임종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의사의 노리엔 카운트다운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었다. 9,8,7,6,5,4,3……이 동안 병자의 의식은 선명하다. 들창에 달이 걸렸다. 이웃방 라디오가 일기예보를 알리고 있다.
'내일의 날씨 청명합니다.'」

   하나의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만 해도 사실의 전달로선 충분하다. 月光과 라디오는 도리어 사족이다. 그런데도 문학은 들창에 걸린 달을 필요로 하고, 천기 예보를 필요로 한다. 바로 이전달의 방식까지가 사상이란 뜻이다.

   音, 色, 形으로 나타나는 예술은 직접적으로 感官에 호소하기 때문에 그만큼 강력하다. 그러나 그것은 국한적이고 감동의  스팬이 짧다. 이와는 반대로 언어의 徵表로서 제시되는 문학은 선명하진 못하지만 읽은 사람의 협동을 얻어 무궁무진한 이미지로 전개되기도 하여 갖가지 思想의 파도를 일게한다.

   즉, 누구에게나 내일이 없는 그날이 있을 것이란 暗示의 뜻보다도 내일이 없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 내일의 일기 예보가 어떠한 것일까 하는 사고를 사람으로 하여금 유발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상을 흔히 이데올로기로만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있지만, 문학에 있어서의 사상은 그 보다 넓고 깊고 절실해야만 한다.

   이데올로기는 문학에 있어서 이미 경화된 덩치에 불과하다. 생을 그 생명의 흐름에서 파악해야 하는 문학은 필요하다면 경화된 이데올로기의 경화된 所以를 밝혀내어야 한다.  무릇, 경화된 것은 그것을 저작(咀嚼)하고 소화하여 새로운 영양원으로 하지 못할 경우 생명에 유해하다.

   생명에 유해한 것은 무학에도 유해하다. 문학이란 그것이 간혹 절망을 노래하는 그 시간에도 생명에 의한 생명을 위한 생명의 찬가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가 문학에 운학에 유해한 것은 그 강압적이고 독선적인 일반론적 성격 때문이다. 일례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들면, 거개는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이만 있고 부르조어이기에 앞서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사상(捨象)되어 있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혁명론 일 때, 문학은 부르조아이건 프롤레타라아이건 인간을 수단화해서 안된다는 입장에 선다.  그렇다고 해서, 즉 경화된 이데올로기라고 해서 이를 무용(無用)으로 친다는 얘기는 아니다.

   경주의 하늘에서 신라의 하늘을 보고, 그 옛터의 부서진 기왓장에 눈물을 흘리는 것도 문학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고기를 잡기 위해선 경화되고 낡은 이데올로기를 그물로써 이용할 경우도 있다는 얘기다.

   문학과 사상을 이렇게 얘기하게 되면 너무나 광범한 늪 속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 글의 주제를 문학적 인식에 국한하고자 한다. 문학과 사상에 관한 논의란 결국 문학이란 무엇이냐 하는 설문으로 될 것이며, 문학이란 무엇이냐 하는 논의는 문학적 인식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인식이란 무엇인가. 원초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문학적 인식이란, 첫째 사랑에 의한 인식이다. 가슴에 사랑을 안고, 눈빛에 사랑을 띠고 하는 인식이란 뜻이다. 이 山河에, 이 하늘, 이 초목. 이도시, 이 사람, 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배기랴! 슬픔까닭에 사랑하고, 추한 까닭으로도 사랑하고, 아름다운 까닭에 물론 사랑하고……이렇게 사랑이 문학의 원천이며, 그 원천으로서의 인식이 문학적 인식인 것이다.

   둘째, 心性의 질서에 의한 인식이다. 바꿔 말해 심성의 논리에 의한 인식이다. 사랑이 문학의 원천이라고 해도 그로써 문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랑이 문학으로써 가능하려면 그것이 심성의 질서에 따라, 또는 심성의 논리에 의해 그 인식을 精緻化해야 한다.

   심성의 질서는 공인된 사회 질서를 무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평균적인 질서 의식에 반발하는 데서 나타난다. 예컨대 평균된 질서의식은 서울을 하나로 생각한다. 서울 특별시란 명칭을 가진 하나의 도시다. 그런데 심성의 논리에 따르면 서울은 그 인구 8맥만으로 치고 8만개의 서울이 있다고 본다. 아니 여행자의 수가지 합쳐 서울은 수천만개의 서울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구두닦이의 서울, 그리고 구두닦이와 시장 사이에 差等을 두지 않는다. 명문의 규수와 창녀와의 사이에도 차등을 안 둔다.

   우리는, 문학에 종사하는 우리는 모두 도스토예프스키의 제자들이다. 스승 도스토예프스키는 창녀 소냐에게서 神性을 보았다. 기라성 같은 명문 여성을 다 젖혀놓고 창녀 소냐에게 여성이 지니고 있는 최고의 稟性을 부여한 것이다. 갖가지 의견은 달리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러한 심성의 논리에만은 충실한 제자이다.

   문학적 인식이 어떠한 인식보다도 상위에 있다는 것은 犯人을 査問하고 재판하는 판사나 검사를 비롯해서 어떠한 권력자도 우리 문학의 法廷에 피의자로서 출두 시킬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거한다.  우리는 사회의 서열과는 확연히 다른 서열로써 우리의 문학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셋째, 문학적 인식은 진실의 탐구만을 유일 지상의 목적으로하는 인식이다. 권력, 돈, 건강, 가정 등, 세속적인 가치를 골고루 승인하면서도 그것만 가지고는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그러니까 이러한 것이 행복에의 계기가 될 수 있게 하게 하는 그 무엇의 탐구가 문학의 역할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에 의해 고급차가 지옥을 운반하고 있고 리어카에 천국이 실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도 한다.

   넷째, 문학적 인식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주축으로 한 비판적 인식일 수밖에 없다. 정치비판, 경제비판, 과학비판, 일반 문화비판, 도덕비판, 풍속비판 등 무릇 인간에 관계되는 제반사로서 문학의 비판에 면책권을 가진 것이라곤 없다. 그리고 이 비판은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감상적이어야 하고, 본질적일 뿐 아니라 묘사적이어야 하고, 전문적일 뿐만 아니라 통상적이어야 한다. 문학의 사명이 설득력에 있기 때문이다.

  문학자에게 크고 깊은 재능과 자질을 요구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대농장의 다각적 경영 같은 문학과 동시에 분재를 가꾸는 원예사적인 문학도 가능한 것이니, 비판으로서의 문학은 각자의 기질과 능력에 따라 그 대상을 선택할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허위와 위선에 대해선 민감해야 하는 것이며, 악한 善人와 선한 惡人을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

  世俗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범인이 무죄선고를 받을 수 잇는 것은 오로지 문학의 법정이며, 이미 동상으로 화한 권력자에게 유죄선고를 내릴 수 있는 것도 문학의 법정이다. 모든 사람이 갈채를 보내는 자연과학의 성과를 행복에 공헌하는 그 척도로 따져 비판하는 역할에 문학의 깊은 의미가 있기도 한 것이다.

   다섯째, 문학적 인식은 劇的인 인식이다. 무풍지대에 조용히 서있는 한 그루 나무도 그 조용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내부에선 엄청난 드라마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동화작용은 일광과 공기, 또는 땅속의 양분을 흡수해서 악착같이 살려고 하고, 이화작용은 이에 반대해서 죽음을 지향한다. 이처럼 생과 사의 갈등이 일순도 쉬지 않고 작용, 반작용하고 있는 것이 식물이라고 할 때, 하물며 인생이랴, 사회이랴…….

   문학은 그 가운데서 드라마를 건져내기도 하고, 자기가 꾸민 드라마의 메카니즘을 통해서 인생을, 사회를 생동적 사회를 생동적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것이 그러하니 심리의 드라마일 수도 있고, 사랑과 사랑의 드라마, 사랑과 미움의 드라마, 個와 전체와의 상충에 의한 드라마일 수도 있다.

   문학이 대중과 깊은 결연을 맺는 장소가 바로 드라마틱한 인식의 무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으로서의 문학은 과학의 태도와 방식과는 달리, 싸늘한 분석에 의한 냉정한 객관적 비판일 순 없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분석, 개성적인 분석이어야 한다는 것은 문학은 어디까지나 예술이어야 한다는 자각에 의한 것이다. 주관적ㅇ인 분석이 독자에게 전달되어 객관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과의 문제이지 창작과정의 문제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문학적 인식은 기록과 묘사를 통한 인식이다. 사랑에 의한 인식, 드라마틱한 인식등은 정도의 廣狹, 深淺은 있을망정 문학인 이외의 사람들도 하고 있고 할 수도 있는 인식이다. 그런데 문학인과 비문학인을 결정짓는 곳이 바로 이 기록과 묘사에 의한 인식의 장소이다. 문학은 만인이 느끼고 있으면서도 정착시키지 못하는 것을 기록과 묘사로서 정착시키는 기능으로서 성립되는 것이다. 秀拔한 감각적 발견 탁월한 이론적 방살이 있어도 적절한 표현을 얻지 못하면 그 것은 문학일 수 없다. 보다도 문학일 수 없는 수발한 감각적 발견, 탁월한 이론적 발상은 아예 존재 하지 않는 것으로 치는 것이 믄학인의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문학적 인식이 철학적 인식, 과학적 인식, 종교적 인식, 역사적 인식과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유관한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철학은 문학이어야 하고 문학은 철학이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발언이 성립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外延과 內包가 완전 일치를 볼 수는 없다. 철학의 목적은 진리의 정립, 가치의 정립, 권위의 정립에 있다. 문학은 이와 같은 철학의 지향에 일단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그 성과를 섭취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문학은 이와 같은 지향에 회의를 표명한다. 극단하게 말하면 무릇 일반론은 성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문학이다. 부드럽게 말하면 일반론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나 그 일반론의 보람에 그다지 기대할 것이 없다고 문학은 회의하는 것이다.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은 파산했다는 것이 현대 철학자들의 통념이다. 唯心論의 각분파, 유물론의 각분파, 거기에다 본질론자, 현상론자, 실증주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등 철학은 언제나와 같이 지금도 군웅할거의 상황에 있다. 철학이 각각 어떤 지도원리를 내새우긴 하지만 그것이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문학은 원리적 노력과 추상적 작용으로선 현실을 일반론적으로 감당하지 못한다고 보고「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事象을 파악하려고 한다. 어느 작가는 큰 그물로, 어느 작가는 작은 그물을 쳐서 진실의 片片을 건져 올리려는 것이다.  인류의 슬픔을 말하는 대신 어버이를 잃은 소녀의 눈물에 着目하고, 여성 일반을 논하기에 앞서 미망인의 고독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는 등의 작업으로 된다.

  과학적 인식은 비정한 논리적 분석이며 정리작업이다. 그런데 문학은 비정한 논리만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보고 논리와 더불어 情理에 중점을 둔다. 하나의 음식물이 있을 때 과학은 그 영양분을 분석할 수 있으나 맛을 분석하고 검출할 순 없다. 문학은 맛을 만들어냄으로써 인생과 세계를 情理的으로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과학과 一線을 劃하고 있다. 물론 과학의 성과에 등한하다는 뜻은 아니다.

   종교적 인식은 인간의 주제를 지향하는 인식이다. 당연히 神, 또는 佛이 그 중심 문제로 된다. 문학은 이러한 인간의 주제 문제에 무관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문학적 인식은 어디까지나 常識에 의한 인식이며, 상식인을 대표하는 인식이다. 그런 만큼 20세기적 지식, 또는 교양의 檢證에 합격할 수 있는 종교가 과연 가능할까를 따지는 심정으로 있는 것이 문학인이다.

   종교적 精進에 경의를 표하고 그 정진의 성과를 겸허하게 섭취하기도 하지만, 종교적 정진을 위해 애인을 버리고 처를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입산 수련의 길로, 또는 수도원의 문으로 들어서진 못하는 것이다.  종교를 승인한다면 그곳에까지 가야 한다고 믿는 것이 문학인이기 때문에 천국을 바라보기보다 범속한 무리와 함께 지옥에 남고자 한다.

   물론 종교적 문학이 가능하겠지만 혁명적 문학의 경우처럼 한계가 있을 것이다.  진정한 문학이 혁명문학일 수 없다는 것은 문학적 인식의 근본에 있는 정치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종교 문학을 진정한 문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종교가 요구하는 신앙이 새명의 의욕을 제약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보다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면 문학이 종교를 대신할 수 있다는 자부가 문학인에겐 있다.

  거창한 구원을 내세우지 않고 취약한 생의 실상을 진지한 눈으로 더듬어 나가며 다소곳한 대화를 통해 우리의 병든 마음을 치유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문학은 겸손하게 종교가 못다한 구원을 은밀한 가운데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인식과 문학적 인식은 혼동할 수 있는 부분과 구별해야 할 부분을 가지고 있다.  혼동할 수 있는 부분은 둘다 문자에 의한 기록이란 사실이고, 구별해야 하는 부분은 역사는 결과에 중점을 두는데 반하여 문학은 과정에 중점을 둔다는 점이다.

   역사가는 정치가를 그 治積으로써 평가하고 기록한다.  문학인은 그 동기로써 정치가를 평가하는 것을 잊지 못한다. 역사가는 성공자와 승리자에게 중점을 두지만 문학은 좌절한 자 패배한 자를 중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역사가는 나폴레옹을 기록하지만 문학인은 잔발잔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믿기 때문에 내 자신을 문학인으로서 자처할 수 있는 사실에 커다란 자랑을 느낀다. 동시에 이 자랑이 자랑일 수 있자면 이상과 같은 문학적 인식을 보다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自覺또한 잊지 않는다. 최후의 승리자는 기록자에게 있다. 이것이 나의 신앙이며 신념이다.

   이 신앙과 신념이야말로, 그로 인해 결연 殉節할 만한 신앙이고 신념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