批評的 素描
李炳注·崔仁浩·吳貞姬    

 

이  태  동        
                    (문학평론가)서강대교수
       

 

수집가의 생활에는 질서와 무질서의 양극관계에 존재하는 변증법적 긴장이 있다.

- 발트 벤자민 -            

   

   「魔術師」가 다른 작품과 다른 것은 격자소설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작가가 하나의 작품구성을 두 개의 스토리, 즉「이야기 중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이유는 소설 가운데 두 개의 시점을 사용하여 작가와 제2 스토리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시킴으로서 사건묘사에 객관성을 최대한으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작중인물인 마술사가 인도에서의 그의 경험을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고 작가가 직접 했었다면 아마 독자들은 작품의 박진감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격자소서이 가진 특징을 모두 다 가지고 있지만 소설이 지닌 도덕성을 독특한 드라마를 통해서 전달했다는 점에 있어서 소설가로서 李炳注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하겠다.

  첫 번째의 이야기를 작가가「지리산 산록의 S」라는 小邑에서 곡마단 무리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마술사를 돈을 주고 구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고, 두 번째 이야기는 마술사가 어떻게해서 그 직업을 가지게 되었나 하는 것을 첫쩨번 스토리의 나레이터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스토리의 나레이터인 송인규가 마술사가 된 것은 우리들이 표면적으로 생각하는 마술사와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가 성인에 가까운 인도 마술사를 발견한 것과 그 스승이 그에게 마술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어려운 시련과 시험을 거쳐서 얻어진 것이다.

   인도 미술사 크란파니는 일반 사람들의 위안이나 자신의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마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인도 사회가 지니고 있는 카스트 제도를 비롯한 수많은 병폐를 고치고, 조국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운동에 가담하기 위해서 배운 것이다. 그래서 마술은 곧 그의 의지를 환각으로 변용시켜 일반 대중들에게 보여서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송인규가 마술을 배운 마술사는 어떠한 이려움과 수련에 부닥쳐도 자기의 마술을, 자기가 옳다고 약속한 목적 이외에는 결코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승에게 마술을 배우게 된 송인규는 제2의 스토리 속에서는 마술을 배우게 될 때까지 건전하고 옳은 일을 위해서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위인이었으나 그 실천과정에서 마술을배울 때의 의지를 굽히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초래한 타락에 대한 業苦를 무섭게 치르고 있는 인간형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제2의 스토리의 나레이터가 제1의 스토리의 나레이터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자신이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또 어쩌면 마술사의 본래의 모랄과 그 기능을 성명해 주기 위한 몸짓인지도 모른다. 어쨋든 이 작품이 크게 성공한 것은 작가가 마술의 화술과 일치시켜 소설의 사명과 기능이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밝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소설이란 문자로 쓰여진 화술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소설가가 되려면 얼마나 어려운 시련을 거쳐야만 하는 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소설가가 된 후에 몸가짐을 바로 가지지 못하고 자기가 소설을 쓰는 목적마저 흐려지게 만들어 지금까지 쌓아올린 노력을 스스로 붕괴시켜 버리는 것을 여기저기서 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가의 모랄리티를 담은 이 작품에 적지아니 호감이 간다.

   소설은 작가가 상상력으로 써 놓은 허구적인 이야기지만, 우리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소설가의 인품과 소설가가 구축한 상상적 세계가 우리들이 이상적으로 希願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마술이 마술로서, 또 소설이 소설로서 존재하려면 청중이나 독자들에게 전해줄 이미지가 선명하고 건전해야만 한다는 것은 여기서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겠다.

   「小說」을 창조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소설에서의「魔術」과 소설의 의미는 거의 동일성을 띠고 있다. 이 소설에서 마술은 ①닭→달걀→닭 ②씨앗→떡잎→줄기→잎→꽃 ③아래로부터 위로, 위로부터 아래로 로프타기 등 세가지로 나타난다.

   ①은 생명의 근원 캐기, ②는 꽃피우기 과정을 생명화 작용으로서 모두 현실에 나타나는 생명창조의 행위(마술행위)와 연관되고 있다.
   ③은 地上과 天上을 왕래하는 것, 창조자적인 것, 神적인 것의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청조의 의미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데, ①②는 생명의 세계, 현실의 세계, 육체적인 可視의 세계와 연관되고 ③은 천상적인 세계, 즉 죽음 뒤의 영혼의 세계를 왕래할 수 있는 신적인 세계, 생명을 초월한 不可視의 세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좀더 높은 차원을 나타낸다. 이 세가지의 능력을 가진 자로서의 마술사란 곧 창조자의 의미를 갖는다.

  크란파니는 이 세가지가 모두 가능하고, 송인규는 세 번째의 마술이 불가능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송인규는 아직 불완전한 범상한 인간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은 또한 송인규와 인레가 性的 접촉을 가졌다는 사실과 크란파니와 인레가 성적 접촉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과 대비되어 송인규란 인물이 육체적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진실(정신적 신적인 단계)의 세계에 이르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이 소설에서 神的인 행위, 마음은 바로 진실을 뜻한다. 반대로 신적인 상태를 벗어난 상태, 육체적인 용망을 버리지 못한 상태는 죄악·고통·파멸을 의미한다. 이 소설은 한 마술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마술이 가능한 때가 진실한 마음을 가질 때인 것처럼 인간은 진실을 지닐 때만이 동물적이고 노예적인 고통의 상태를 벗어나 진정한 인간적인 행복의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그려 주고 있다.

   즉, 이 소설은 완전한 진실을 지닐 때만「마술」도 창조도 가능하다는 것을 마술사 송인규란 인물을 통해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소설이 독자에게 공감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소설이 허구인 줄 알면서 믿게 되는 것은 마술사와 같이 소설가가 진실을 가졌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도 아울러 의미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