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李 炳 注와 나

 

남 재 희       

 

   지난 4월 7일 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한 지 알마 되지 않은 나는 서울대학병원 영안실 강당에서 있는 소설가 이병주 씨의 영결식에서 조금은 어색한 추도사를 하였다. 이병주 씨는 그래도 당대의 소설가이다. 그런데 문인도 나닌, 연령도 열살 엄어 아래인, 낙선 국회의원이 추도사를 하다니……그래서 조금은 어색했던 것이다.
   그 후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 내가 오히려 주도사를 하기에 가장 적격이 아닌가 하는 결론도 나온다.

   이병주 씨와 내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65년, 그러니까 27년 전이다. 그때<조선일보>의 문화부장(스스로는 야만주장이라고 자처하였다)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동향으로 친하게 지내는 신동문 시인이 찾아와서<세대>잡지에 실린 이병주 씨의「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추천하며 그의 처녀작인데 작품이 너무 좋으니 잘 소개해 달라다. 이병주씨는 부산에 있는 <국제신보>의 편집구장 주필도 지냈고, 5·16 후 혁신계로 몰려 한3년 옥고도 치루었는데 그 옥중에서 집필한 것이 이 소설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경력에 흥미가 끌려 읽어보니 괜찮은 작품이었다. 스페인 내란이 일어났던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풍겨나는 것이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누구를 위하여 종은 물리나」와 동시대적 사상분위기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스페인 내란이 1930년대의 일인데 1960년대에 그런 사상적 분위기의 소설을 쓰는 것을 보니 20년쯤의 시차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사상적인 지체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가혹한 일제 때에 그런 사상적 분위기에 젖어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해방 후의 기간도 잠간이고 이어 피비린내 나는 6·25를 당하지 아나했는가. 그러다 보니 이병주씨가 매우 지각하여 옛날의 낭만적 분위기로 돌아가 그런 작품을 낸 것도 자연스럽다고 이해할 만하다. 10년쯤의 연령차는 있지만 나도 그런 사상적인 지체현상을 겸험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그 작품을 문학평론가 유종호 씨에게 보내어 그의 판단을 구했다. 그리고 소설평을 얻어 그들을<조선일보>문화면의 톱기사로 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와 처녀작을 발표한 40대 중반의 지각문인으로서는 화려한 중앙진출이 된 셈이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그 취급태도는 옳았다는 느낌이다. 야만부장이라고 자처했지만 옳게 문화부장 일을 한 셈이다.

   그 후 이병주 씨와 나는 매우 친해졌다. 둘 다 호주가인데 이씨의 술 마시는 태도는 호방하였고 대화는 수준 높은 내용에 재치가 넘쳤다. 사상적인 지체인들끼리 호홉이 맞아 좋아라고 어울렸다.  <조선일보>가 오랜만에「일사일언」난을 부활하게 되었을 때에 심연섭, 나영균 씨와 이병주 씨를 집필진에 넣었다. 중앙언론에 칼럼을 쓰기 시작한 첫 기회였을 것이다. 그는 그 후 칼럼리스트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67~68년 미국 하버드대학의 니만 언론연구원으로 공부하다 돌아 올 때 나는 아낀 돈으로 몬땅 책을 사왔다. 5백 권쯤 되었을까, 미국의 어느 소개문에는 내가 작은 도서관을 갖고 돌아간다고 씌어지기까지 하였다.  돌아왔으니 이병주 씨와 술자리가 비번할 수 밖에.  임재경, 손세일 씨 등이 그의 꼭 끼는 술친구다. 그러던 하루 나는 일차 술자리를 마치고 이씨를 나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내가 사온 책들 가운데 원하는 것 한 권남 골라 가지라 했다. 모든 책을 차근차근 살펴본 이씨는 사무엘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를 뽑아드는 게 아닌가. 그것은 페이퍼 백으로 2달러쯤밖에 하지 않는 싼 책이다. 그래 더 비싼 책을 선택하라고 하였더니 그것이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영문학자들 사이에서는 물라도 일반에게는「고도를 기다리며」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때이다. 나도 보스턴의 한 공원에 서있던 대학생들의 반전소인극(反戰素人劇)을 구경하다가 대사에「고도를 기다리며」에서의 인용이 나오기에 한권 사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병주 씨가 외국 신문, 잡지를 계속 읽으며 외국 문화의 흐름을 지켜봤다는 것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내 집에서 이씨가 그 책을 얻어간 지 반년쯤 후에 사무엘 베케트는 바로 그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무슨 놀라운 일치인가. 임재경 씨는 그 무렵 내 서재에서 프란츠 파농의「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역시 싼 책이다)을 뽑아갔다.

   이병주 씨의 아호는 나림(那林)이다. 일제 때 학병으로 중국대륙에 보내어진 때의 체험과 관계가 있지 않나 하고 혼자 짐작하면서 그 유래를 물어보지는 못했다.
   나림이 나에게 감동을 준 작품은 <세대>에 연재한「지리산」이다. 탈냉전의 사회 분위기인 지금 생각해도 대담하고도 신선한 기도이다. 그리고 그때로서는 매우 용기 있는 선각자적인 시도였음에 틀림없다.

   <공비>를 <인간>으로 그리다니……
   그리고 그때 <조선일보>의 대 선배인 인론인이고 나와 술자리를 기분좋게 자주 하던 소설가 선우휘 씨는 <신동아>에「사도행전」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선우씨와 이씨는 비슷한 연배로 재미있는 비교가 되는 인물들이다. 선우씨는 평안도에서 해방 후를 잠깐 경험하고 서울로 왔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소설가이다.  이씨는 경상도에서 해방 후 오랫동안을 몸으로 아프게 경험하고 아주 늦게 서울로 왔다. 똑 같이 언론인이자 소설가이다.

   둘은 모두 자유주의자, 리버럴리스트이다. 남쪽에서 해방 후를 경험한리버럴은 얼마간 진보적이고, 북쪽에서 해방 후를 경험한 리버럴은 얼마간 보수적이다. 그리고 그 둘이 체험한 사상문제를「지리산」과「사도행전」에 각각 담는다. 참 재미있는 관찰, 분석거리이다.

   나는 이들 둘의 비교론을 당시<신아일보>의 문화면에 썼다. 편집자가 끝부분을 잘라내어 이상한 글이 되었지만 그 글은 어울리지 않게 어느 문학평론의 목록에도 올라 있다. 그리고 그 글을 좀 확대한 것이 나림의「예낭 풍물지」의 권말에 이병주론으로 수록되어 있다.

   얼마간 보수적인 리버럴 선우휘 씨는 그 후 매우 보수적으로 기운다. 월남파병을 크게 긍정하여「물결은 메콩 강까지」라는 신문 연재 소설을 쓴다. 나는 그때 그의 지나친 보수화를 막아보려고 아설픈 설득을 하였다. 월남파병 찬양 소설 집필을 저지하려고도 노력해 보았다. 허사였다. 그리고 그는 더욱더욱 보수화되어 갔다.

   시차만 있을 뿐 이병주 씨도 종당엔 보수화되기 시작하였다. 선우휘 씨보다 10여 년 후의 뱡화인 것 같다. 그런 변화가 소련 등 공산국의 지각변동보다 앞서왔으니 그래도 작가의 감각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번은 미국에 갔다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던 나림과 호텔의 같은 방에서 며칠간을 지낸 일이 있다. 서로 바빠서 아침식사만 함께 하였는데 식사 후 뉴스 스탠드에 들를 때는 내가 움츠러드는 때이다. 그는 우선<아사히 신문>을 집는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을 주워든다. 거기가지는 나도 비슷하다. 그런데 그 다음 그는 <르 몽드>를 추가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럴 수가없어 열등감마저 느꼈다. 그의 어학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통달한다고나 할까.

   70년대 서울 관철동에 잇던 <낭만>과<사슴>이란 맥주집은 문화인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나림, 우인 송지영, 조덕송, 박맹호 씨 등등이 단골이었고 많은 이야기를 생산하였다. 나림의「낙엽」을 연극으로 연출하던 일류 여배우 겸 연출가가 나림과 함께 나타나 관심을 끌던 곳도 <사슴>이다.

   거기서 나는 나림을 다음과 같이 칭찬하며 부러워하였다.
   <이선생은「국제신보」의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낸 대단한 언론인이다. 둘째로 대단히 성공하고 있는 소설가이다. 셋째로 박대통령,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현옥 서울시장 등등 유력한 정치인에게 영향력이 있는 정치인이다. 넷째로 지금 사업도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나림이 주택관계사업도 한 것은 일반인이 잘 모를 것이다) 그리고 마자막으로 술 마시는 풍류도 일류이다.

   나는 신문사 편집국장, 주필을 지내고 있으니 언론인 한 가지와 그리고 술 마시는 일 정도만 겨우 이선생을 따라갈 수 있다고 하겠으니 이 선생은 당대의 재사입니다. 그러던 나도 언론을 떠나 정치에 빠져들었으니 한가지는 더 추가하게 된 셈이다.

   1978년 말 내가 정치에 손을 대게 될 때 나림 이병주, 창정 이영근, 우인 송지영, 경심 송남헌, 동주 박진목 씨 등 선배들이 많이 걱정헤 주었다. 그런데 우인이 먼저 가더니 창정도 별세하고 나림마저 타게하니 이제 선배들도 몇 분 안남아 허전하게 되었다.

  작년에 나림이 부산에서 칠순잔치를 하였기에 못가보고 서울에서 간단히 모임이라도 가지려 하였으나 그는 미국으로 훌쩍 가 버렸다. 그리고 작년말에 또 갑자기 돌아와 나를 신동문, 이형기, 이광훈 씨등과 함께 그의 전집의 편집위원이 되어달라고 술을 산다. 그것이 선생과의 마지막 풍류 있는 대작이었다.

   그는, 대문호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훌륭한 소설가였다. 어느 문인의 말마따나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었다. 그리고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가 현대판 계몽사상가라는 점이다. 추종을 불허하는 독서의 양과 박식, 체계 잡힌 역사적 안목, 문학인이기에 얼마간의 퇴폐미가 있는 진보적 리버럴리즘.

  생전에 나는 그에게 너무 다작을 하지 말고 우리 문학에 남을 작품을 쓰기 위해 정력을 집중해 보라고 자주 권고하였다. 그럴 때면 그는「50대까지는 서달라는 대로 쓰고 60대가 되념 그렇게 하지」하고 미루어왔었다. 그런데 70대에 들어서까지 신문, 잡지 등에서 브탁만 하면 모두 쓰려하였으니……그 점이 몹시 아쉽다. 역시 씀씀이가 많고 헤퍼서 그랬을 것이다.

   그와 그렇게 친했던 것을 보면 나도 어떤 유사점이 있어 그랬을 것 같은데 내가 그를 어떻게 닮았는지 앞으로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한강」1992년 가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