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추모특집

 

작가 이병주 작품세계

-자유주의 지식인의 사상적 흐름을 대변한 거인 이병주를 애도하며-

 

김  윤  식       
<문학평론가>
      

 

[1] 안타까움의 한 표정 - 작가 이병주에게 미처 묻지 못한 질문

      미와자와(宮澤) 일본 수상의 방한을 전후로 하여 정신대 문제가 한·일 두 나라 사이에 크게 논의되었을 때, 작가 이병주 선생이라면 어떤 발언을 할까를 생각해 본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나도 그러한 사람중의 하나이다. 특히 일본의 원로작가 야스오카쇼타로[安岡太郞]의「왠지 모르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다」(아사히 신문 1992. 2. 12)를 읽은 뒤에 더욱 그러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 어려웠다. 작가 이병주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케이오(慶應)대학생이던 야스오카가 징집되어 간 곳은 만주의 어떤 부대였고, 그들은 밤난 훈련에 틈이 없었다. 훈련 도중의 부대 앞엔 아른바 종군위안부가 군속으로 있었지만, 훈련에 지친 졸병인 그들에겐 안중에도 없었다는데, 틈난 나면 잠자기가 아니면 들어누워 쉬는 일이 급했기 때문이다.

   도하작전 연습을 하던 어느날, 그들은 개울가에 나와 송사리를 쫓고 있는 종군위안부들을 보았는데, 스커트 밑에 드러난 종아리의 순백함에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직후 필립핀 전투에 투입되어 거의 전멸한 바 있다. 살아 남아 작가로 되었으며, 예술원 회원이고, 71세의 거장인 이 작가의 회고 속에는 스커트 밑에 드러난 그녀들의 다리의 순백함과 전우의 죽음, 이 두 이미지만이 선명히 떠오른다는 것. 이 때문에 저도 모르게 뜨거운 것이 눈에서 흘러내렸다는 것이다.

   이를 읽으며 나는 그가 문학자의 자리에 서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한 것, 그러기에 그만의 진실이었단 까닭이다. 그것이 가해자 집단의 처지가 아니었던가라고 묻는 일은 문학자의 범주에의 미달이거나 초월함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학병세대의 문학적 발언, 그것이 거기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측 학병세대의 문학적 발언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물었을 때, 작가 이병주 씨를 떠올릴 수 있음은 당연하지 않을까.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일본대학 전문부를 거쳐 와세다 대학 불문과를 다니던 중 학병(1944)으로 동원되어, 중국 전선에 나아갔고, 광복을 맞아 역사의 격동기 속을 교사로, 언론인으로 마침내 작가로 평생을 역사적 감각과 더불어 살아온 71세의 작가 이병주씨가 정신대를 두고 어떤 발언을 한다면, 그것은 엊어도 야스오카의 발언에 맞설 수 있는 무게와 수준을 지닐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망상을 품고, 이병주 시의 발언을 기다린 것은 역사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안타까움이다. 그 때문에 언젠가 만날 기회가 있으면 이 정신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지나가는 투로 물어보리라 나 혼자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이제 영영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다.

 

[2] 몇몇 자리에서 느낀 그의 넉넉한 수용태도

   언젠가 이병주 씨의 장편<비창>이 간행되었을 때, MBC신간 소개 프로에서 이를 문제삼은 바있다. 사회를 맡았던 나는 이 프로가 끝난 뒤에 잠시 환담하는 자리에서, 작품수준이 매우 얕다는 것을 제법 날카롭게 지적한답시고 이런저런 흠을 내세웠다. 가령 주인공인 중년의 술집 마담의 일관성 없고 변덕스러움이라, 문학적으로 실패한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따위. 이병주 씨는 다만 종용히 미소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젊은 비평가로 자처한 터이라 나는 이에 멈추지 않고, 성격의 문제뿐 아니라 구성의 문제까지 언급하였다. 이병주 씨가 연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김 교수, 나이 60이 된 사나이들도 갈팔질팡하며 사는 것이 인생인데, 한갓 아녀자가 그것도 40대의 여인이 변덕스럽지 않고 오떠해야 한단 말인가」

   낮고 부드러운 경상도 억양이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자주 이 대목을 떠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문학사상에서 시행하는 <이상문학상>심사위원의 말석에 자주 앉아 있을 기회가 내게 있었다. 심사위원으로 이병주씨와 마주 대한 것은 1987년도(이문열 씨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와 임철우 씨의 <붉은방>과 한승원 씨의 <해변의 길손>이 막상막하여서 결정이 나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가 두 작품을 공동수상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이병주 씨가 흔쾌히 찬성하는 것이었다. 내가 반대했음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상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것, 어느 한쪽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수상자들도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것, 상금을 반분하기의 문제점 등등을 내세웠다. 이렇게 제법 논리적인 듯한 방식으로 주장하는 나를 이병주 씨가 안경 너머로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아무말도 없이.

   문학이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과학이라든가 학문이라든가 비평과 관련이 조금 있을지 모르나 그런 것보다 윗길에 놓이는 것, 그러니까「마음의 흐름」만큼 자연스럽고 감동적인 것이 어디 따로 있겠느냐. 이런 자리에서 문학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병주 씨가 무언 속에서 나를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智異山이라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다」라는 부제를 단 <지리산>(세대, 1972. 9~1978. 8)은 이병주 씨의 대표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거대하고도 기이한 대하소설을 쓰는 마당에 작가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실패할 각오로 이 작품을 쓴다」라고. 또「나의 문학에의 신념을 지리산에 순교할 각오」라고, <지리산>이 단순한 대하소설이 아니고「실록 대하소설」이라는 것,  <관부연락선>(1972)과 <소설 알렉산드리아>(1965) 따위란 이를 위한 준비작업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니까 <지리산>은 지금까지 자기의 문학적 순교작업이라는 것, 실패할 각오로 쓰기 시작한 작품, 문학적 순교를 각오하고 쓴 소설 <지리산>이 완성되었 때,  나는 내딴엔 매우 비판적 안목으로 <지리산의 사상>(1987)이란 제목의 평론을 쓴 바 있다(이 평론은 졸저<한국문학의 근대성과 이데올로기 비판>(서울대 출판부, 1987)에 수록되어 있다).

   「매우 비판적」이라 했거니와, 이는 <지리산>을 이른바 분단문학의 독법으로 읽었다는 뜻이다. 분단문학의 독법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독법이어야 하는가 제시해 보라면 금방 대답할 수 없는 것이긴 하나, 가령 다음과 같은 사소한 문제제기도 그러한 독법의 버릇 때문이 아니겠는가.

   주인공의 하나인 이규가 경도(京都)3고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규가 文科丙類입학 구두시험에 나아가자 시험관이 불문학자인 구하바라 타케오(桑原武夫)교수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구하바라 교수는 당시 대판고등학교 교수였으며, 경도 3고 교수가 아니었던 까닭이다.(3고 교직원 편람 참조).

   경박스럽게도 나는 어느 사석에서 만나 작가에게 이 점은 어찌된 것인가고 물었다. 작가 이병주 씨의 대답은 여전히 무언의 미소였다. 그러한 것은 서소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작품 전체의 시각애서 보면 그러한 오류랄가 착오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리 아니겠느냐고.  그보다는 이 작품이 지닌 참된 의미, 그러니까 실록족 성격과 허구적 성격을 동시에 바라보는 안목이 <지리산>의 바른 독법이 아니겠느냐라고.

 

[3] 최후작, <별이 차가운 밤이면>의 내면 풍경

   작가 이병주 씨의 마지막 작품은 아마도 아직 연재 도중에 있는 <별이 차가운 밤이면>(문족과문학 연재 제10회분)이 아닐까.  장편집중 분재로 10회분(1992년. 4 현재)까지 나아간 이작품은 노비 출신의 박달세가 자신의 신분과 가난을 극복, 일본 유악에 나아가 고학하며 마침내 출세랄까 문명권에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나는 이 작품을 한 회도 빠뜨리지 않고 읽었는데, 박달세의 성장과정이 1930년대에서 40년대에 걸치는 일본의 학생생활을 다루고 있음에 깊은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 근대문학이란 그 근대성의 근거가 현해탄을 사이에 둔 유학생의 학습과정, 학습분위기, 학습의 방향성에 알게 모르게 관여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상 <관부연락선>의 흥미의 원칙도 여기에 있었으며, <지리산>의 두 주역인 하준규와 이규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이른바 일본 자유지식인 계층을 휩쓴 스페인 <인민전선>의 분위기였던 것이다.

   「별이 차가운 밤이면」에서 내가 흥미롭게 지켜본 것은「지리산」과의 비교, 곧「지리산」의 주역인 학병세대의 하준규, 이규와「별이 찬가운 밤이면」의 학병세대인 발달세의 비교가 그것, 「별이…」에서는 오직 박달세만 등장하는데, 그러니까 박달세의 일대기인 셈인데,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노비자식이 고학으로 출세해 나갔다는 점에 있다. 박달세가 왜 일본으로 유학해야 하며, 출세해야 하느냐라고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한 것은「원수갚기」였던 것이다.

   공자는 전하를 위해 학문에 뜻을 둔 것이지만 나는 원수를 갚기 위해 공부를 하려는 것이니까, 원수가 누구냐, 첫째가 최순영이고 둘째가 최 진사 부인이고 셌재가 막동이다. 최 진사 부인과 막동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으나 내 원수는 단 하나이다. 그 이름은 최순영.(제3회분 p.246)

   박달세의 신분은 실상은 최 진사의 서자이나, 최씨 집안의 노비의 자식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곧 박달세의 모가 종년이었던 것. 종놈이라든가 상놈의 상전 최 진사의 딸 순영의 미움의 표적이 되어 소학교 시절부터 형언할 수 없는 멸시와 천대 속에서 자리기, 이를 모면하는 길은 일본유학으로 출세하는 길 뿐이었다. 이러한 박달세의 입신출세주의란 <지리산>의 하준규아 이규란, 훌륭한 집안의 핏줄을 타고 났거니와, 적어도 원수갚기 위한 일본유학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학병세대를 작품 중심부로 삼았음에는「별이…」와「지리산」은 상형이 아닐 수 없다. 작자의「마음의 흐름」이 이 지대인 까닭이다. 작가의 붓이 그럴 수 없이 경쾌하고 막힘없음이 그 증거가 아닐 것인가. 그러나「원수갚기」의 학병세대인 박달세란, 부잣집 도령들이 여유있고 거만스럽고 또 그 때문에 가능한 순수한 관념형태인 자유주의에로 치달아「인민전선」에 흥분하고 그 연장선상에 학병에로 나아감의 고민을 문제삼은 것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학병조차도 출세의 도구랄까 방편으로 삼을 수가 있었다.

   박달세가 작품 후편에 와서는 상해의 인본군 특무기관의 엔도 중위로 변신 출세하고, 스스로를 <아리랑의 노래>(님 웨일즈)에 나오는 주인공 김산(본명은 장지략)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자조함이 어찌 이상할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나는 노비의 아들이었다. 세상이야 아떻든 나는 나와 어머니를 지켜야 했다. 인생은 엄격하게 살아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제7회p.141)

   이러한 인물유형의 창조, 그리고 이러한 인물이 학병세대의 한 중심부에 놓여 있음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궁금한 것은 이러한 원수갚기의 학병세대가 해방공간에서는 어떤 삶으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있음은 물온이다. 그는 빨치산 두목이 될 것인가. 경찰 두목이 될 것인가. 장사꾼으로 변모할 것인가. 모리배가 될 것인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인생을 엄격하게 살아갈 것」만은 틀림 없는 일이다.

   작가 비병주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이점에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직 해방도 되기 전, 상해 일본군 특무대의 발달세를 세워둔 채, 작가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누가 이 작품을 완결할 것인가. 이 물음은 참으로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다.

 

[4] 학병세대가 낳은 대형작가의 빈자리

   학병세대가 낳은 대형작가, 그러니까 이 땅, 이 나라의 지배층의 연령의 정신적 바탕에 관련된 마음의 흐름을 정확히 대변하던 이 거인의 자리를 메울 자가 있을 것인가. 그의 빈자리는 그대로 빈자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소리를 내가 할 처지가 아닐 터이다. 한ㄱㄱ 문학사가 이러한 평가를 내릴 권한을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가지 뿐인데, 하나는 개인적인 감회이고, 다른 하나는 조금 역사적인 것이다.

   앞에서 나는「지리산」의 이규를 조금 언급한 바 있다. 구하바라 교수가 3고 교수가 아니라 대판고등학교 교수라는 사실에 관한 것.「별이 차가운…」에서 작가는 주인공 박달세를 대판에서 고학하게 하고, 마침내 대판고등학교 문과에 입학시키고 있지 않겠는가.

   나는 무난히 대판고등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 나는 대판고등학교가 일고(一高)와 삼고(三高)에 비하면 통념에 따른 격이 약간 떨어지지만 내실에 있어선 결코 손생이 없는 학교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입학시험에 합격한 것만으로 이렇게 융숭한 치하를 받을 수 잇는 높은 성가를 지닌 학교란 것까진 알 지 못했다. 사실을 말하면 대판시민들은 늦게 개교한 이 학교가 동경에 있는 일고나 경도에 잇는 삼고를 능가할 수 있도록 염원하는 마음으로 각별히 대판공등학교를 소중히 여기고 있엇던 것이다.(제4회 p.185)

   이 대판고등학교 교수가 구하바라였던 것. 어째서 작가는 <지리산>에서의 착오를 여기서는 범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박달세를 경도3고로 보내지 않고 격이 떨어지는 대판고등학교에 입학시켰을까. 이 점이 내 개인적인 감회다.

   그렇다면 조금 역사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지리산」의 주인공 하준규에 관한 것이 이 범주의 하나이다.「지리산」에서의 중심인물, 그러니까 진짜 주인공이란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명쾌히 주어질 수 있는데, 하준규가 그다. 이규란 실상 작가 이병주 자신이며 따라서 이유를 표준으로 보면 남재희·이병주의 대담에서 남재희가 지적했듯「반자전적」소설이겠지만(<회색군상의 논리>세대, 1974. 5), 그는 하준규를 빛내기 위한 방편 몫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준규로 말해지는「실록」이라는 점이「지리산」을 낳은 원동력이다. 만일 한준규의 실록이 없었더라면 결코「지리산」은 씌어질 수도 없었고 설사 씌어졌더라도「지리산」만큼의 높이와 무게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5] 실록 때문에 빛난「지리산」의 중심인물-하준수와 하준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역인 이규, 박태영, 하영근 등이 하준규에 도출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인물들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터이다. 말하자면 하준규는 발광체였다. 발광체가 실록의 수준에 있엇다는 사실이야말로 작품「지리산」이 씌어질 수 잇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 실록 부분을 뺀, 나머지는 모두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 실록 부분 때문에 허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지리산」자체가 실록이란 뜻이 아니고「지리산」에 이르는 통로로서 실록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하준규란 누구인가. 이 물음의 해답은 작품「지리산」에 있지 않고 그 바깥에 있고, 그 이전에 있다. 사람들은「신판 임꺽정-학병고부자의 수기」(신천지, 1946, 4~6)를 기억할 것이다.

  아직 나이 어리고 세상풍파에 부닥기지 못한 그들이 학병되기를 거부하고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여 장차 몇 해가 걸릴는지 알 수 없는 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은 자못 비참한 일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왜 학병되기를 거부하였던가. 목숨이 아까와서였던가. 그렇다면 왜 목숨을 걸어놓고 피해다녔을까. 이글은 순직하고도 굳세인 조선의 젋은 장정이 열과 피로써 얽어 놓은 산 하나의 인간기록이다.(신천지 1권 3호 p.20)

   이 글을 실으면서 편집자가 해설해 놓은 문구이거니와, 주목되는 것은 학병거부가 목숨 건 도피행위였다는 지적이다. 이 수기의 필자가 바로 하준규의 모델인 하준수(河準洙)이다. 3회에 걸쳐 연재된 이수기(실록)에서 누구나 다음 세 가지 점을 손쉽게 알아 차릴 수 있다.

   첫째, 이 글 소제목에도 나와 있듯 1943년 8월 20일 관련된 것. 조선인 징병제 실시의 앞단계로 조선인 학생 지원을 강요하는 날짜가 바로 이것이다. 당시 하준수는 일본 중앙대학 법학부 졸업반이었다. 학병에 나갈 것인가 도피할 것인가에 관한 유학생끼리릐 논의와 각자의 내면갈등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둘째, 현해탄을 건너 귀국하고 고향에 들르고, 덕유산에 은신하기까지에 관한것. 거기에는 같은 유학생 노 동지와 합류하고 있다. 13ㅁ병의 친구 중 오직 하준수와 노 동지만 도피한 것이다.

   셋째, 덕유산에서 괘관산(지리산)에 이르는 과정과 보광당(普光黨)을 조직하여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에 관한 것.

    백운산에서 겨울을 난 우리들은 1945년 3월에 괘관산으로 들어가 그곳에다 큰 집을 짓고 화전을 시작하는 한편 동지 73명으로 보광당을 조직하고 일본이 전쟁을 계속 못하도록 될 수 있는대로 방해할 것과 당원을 훈련하여 연합군 남선 상륙시에 응할 수 있도록 제반태세를 갖추는 것이 우리들의 행동 목표였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화전을 일어서 우리의 식량 문제를 해결코자,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나머지 시간을 전부 군사 훈련에 충당시켰다. 우리는 무기를 매입하였고 일방으로 염초, 황, 제렵 등으로 엽총제조도 하였다.[……] 우리들은 간혹 나래 동리로 몸날샌 당원들로 작패하여 가지고 내려가선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래서 얻은 총이 대여섯 자루는 되었는데 7월달에 들어서 산천군 경관대 10여 명이 괘관산으로 습격왔다가 우리들의 우세함과 산길이 험해서 저희들 수효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신천지 1권 4호, p.165)

   이와 같은 <학병거부자의 수기>에서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학병문제를 둘러싼 당시의 지적·정신적 분위기와 그것의 역사 속에서의 진행 경과이다. 그들이 처음 동경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하준수를 포함한 13명의 학도들이 박 동무만 빼고도 모두 귀국하였고 박 동무 역시 고향에서 온 부친과 경찰서 간부에 이끌려 귀국, 학병으로 갔다. 일본 이곳저곳에 도피처를 찾던 하준수도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 동지와 함께 귀국한 하준수가 덕유산으로 도피하기까지의 학병 입대를 둘러싼 분위기가 매우 절박하게 묘사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덕유산에 들어간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을 잘 알기 때문이다. 토호급에 속하는 부친의 사냥터였던 까닭. 어릴적부터 부친을 따라 덕유산을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덕유산 화전민에 의락한 하준수와 노 동무는, 각각 정도령, 이도령의 변성명으로 살며 화전민 처녀 순이와 친해진다. 학병 도피자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경찰의 추적이 생기자 괘관산으로 옮겼다. 1945년 3월 드디어 보광당을 조직, 무기를 가진 73명의 조직체로 성장한 것이다.

   이 보광당의 두목이 바로 이 수기를 쓴 하준수이다. 그는 과연 어떤 임물인가. 그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인된다. 앞에서 보았듯 중앙대학 법학부 졸업반이었고 동경에 6년간 있었고, 친척 동생이 일본의 야마나시(山梨縣)에서 농사짓고 있었고, 공수(空手, 카라데)4단이었다. 공수 4단이란 대단한 것이어서 일본대학을 비롯 여러 도장에서 지도급이었으며 야마다(山田)란 여교사를 제자로 둔 바도 있다. 뿐만 아니라 고향인 함양경찰서에서도 공수 시범을 한 바 있어 형사들도 그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조혼하여 아내도 있었다. 덕유산에 있으면서 그는 집으로 몰래 잠입, 엽총을 가져와 사냥으로 시량 보충도 한 바 있다. 중학3년때 이미 유단자였고, 유도, 검도, 권투에도 통달, 정도령 행세를 하면서, 화전민 김서방 딸 순이를 돌보고 사귀는 덕유산 생활에서 지리산으로 이동했을 때 동지는 17명이었다. 당시 지리산에 수백명의 징용, 징병, 기타의 도피자들이 있었다는 것. 그중 학병거부자 중심으로 뭉친 보광당이 73명이었다는 것.
   소설「지리산」의 작가 이병주의 눈에 비친 하준수라는 이 걸출한 인물은 어떠했던가.

   하준규는 키가 작고 몸집도 작은, 그리고 하얀 피부빛깔하며, 가느다란 눈껍, 예쁘장한 코하며, 어느 모로 보나 여장을 하면 영락없이 여자로 보일 수 있는 그런 인상을 가진 청년이었다. 숙자는 속으로 태영이 선배라고 불렀는데 선배라도 한두 살의 차이밖엔 없을 것이라 집작했다.(기린사판, 제2권,p.95~96)

   한준수(규)의 인상이 이러하다면, 그가 행동인이기보다는 이기적인 인간임을 암시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키와 몸집이 작고 하얀 피부를 가진 이 사나이가 공수 4단이며 날카로운 눈빛 속에 치밀한 계산을 감추고 있음을 범속한 여인 김숙자가 알아차릴 이치가 없었다. 이런 사나이가 압도적인 모습을 띠고 지리산 위에 군리하는 장면은 다음과 같은 계기에서 말미암는다.

   첫째, 1945년 8월 14일 자정의 일. 일제 패망을 알았을 때 하준규가 이그는 보광당을 공산당에 가입시키고자 설득하는 이현상에 대해, 이를 하준규가 정중히 거절했다는 점. 그만큼 그는 이지적이었다. 이현상에서 사상과 역사에의 열정과 논리를 보았고 권창혁에서 사상의 허무주의를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 해방 일년 뒤 다시 지리산으로 도피해야 했던 하준규의 내면의 변화과정. 그는 자신이 당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보광당원 35명이 함께 당에 들어갔는데, 이미 그는 당의 조직력에 비판적이었다. 곧 권력에의 의지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셋째, 하준규의 내적 갈등. 곧 당을 떠나느냐 깊이 개입하느냐로 1947년 9월 서울행을 감행하기. 작가 이병주는 치밀하고도 적절하게, 하준규의 입당과 그 회의과정, 그리고 다시 당에 깊이 관여하여 마침내 김삼룡의 결단으로 경남도당과 독립된 빨치산 특수부대로 인정받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소영웅주의에서 벗어난 하준규가 1948년 8월 16일 덕유산을 떠나 육로로 양양을 거쳐 해주에 도착(20일)한다. 그는 남한에 파견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백 60명중 한사람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작품「지리산」의 중심부인 제5권까지의 내용이다. 실록 대하소설이라고 했으니까, 하준규 아닌 하준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6] 하준규와 남도부 - <나라만들기> 주역들의 내면탐구

   역사 속에 드러난 하준수는 과연 어떠했던가. 그의 삶과 죽음은 이러하였다. 남도부란 이름의 하준수

   (A)「제3병단은 49년 8월 초 김달삼을 사령관으로, 부사령관 남도부, 나훈, 성동구 등 3백여 명이 경북 안동, 영덕 경계선에서 갖은 만행을 자행했다. 이때의 제3병단 부사령관 남도부는 6·25때 동해안 주문진으로 상륙한 766부대의 부대장이었다. 그의 본명은 하준수로 준주중학을 거쳐 일본의 중앙대학 법학부 3년 중퇴, 학병을 피하여 지리산에 입산했었다. 해방 뒤 함양 건준위원과 공산당 간부로 있었다. 48년 8월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 대의원으로는 선출되지 못하고 강동정치학원에 입교, 이학원의 군사교관으로 있다가 인민유격대 제3병단 부사령관으로 남한에 침투했다.」(김남식, <남로당연구>돌베개, 1984. p.413)

   (B)「김달삼과 남도부가 지휘하던 인민유격대 제3병단은 50년 3월 20일께 월북하여 4월 3일께 양양에 도착한 바 있다. [……] 김달삼과 남도부는 평양에 가서 이승엽을 만나고 박헌영 서덕원 [……]등과 어울려 남한에서의 유격투쟁 전개에 대한 토의를 했다. 그뒤 남도부는 4월 15일부터 5월까지 맹장수술 때문에 금화적십자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박헌영과 이승엽은 그를 중앙당으로소환하여 14호실에서 남한유격대총책의 임무를 주었다.[……] 7백66명으로 구성된 남도부 부대는 1950년 6월 25일 아침 9시께 강원도 주문진에 상륙하였다.(위 책,p.443)」

   (C)「남도부 부대는 51년 11월 30일 3시경 중앙당으로부터 부산지구 공작 사명을 띠고 남하한 정지림과 합작하여 부산 종병창 방화를 했는데, 이 방화 공작에 성공했다 하여 당시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의에서 52년 2월 8일 남도부에 자유독립훈장 1급을 수여했다」(위책,p.467)

   신불산을 거점으로 한 남도부(南道富)가 체포된 것은 1953년 1월 15일이었다. 대구에서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 바 있다.
   자품「지리산」제7권 그러니까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은 남도부의 체포를 알리는 김 서방(덕유산 화전민)의 딸 순이의 울음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남도부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두령님이 서울로 압송되는 것을 보고 박도령을 찾았어요. 지난 겨울 두령님의 말슴이 있었거던예. 해동하면 순이는 지리산에가서 박도령을 데리고 오라고예. 그런데 이젠 박도령을 데리고 갈 수도 없어예. 두령님은 서울로 가고 그곳 유격대는 해체되어 버렸구요.(제7권 p.354)

  이렇게 보았을 때 작품「지리산」은「실록」으로서의 면모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음이 판명된다. 학병 출신의 하준수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이 소설의 중심부에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소설「지리산」에 등장하는 하준규는 어디까지나 학병 출신의 책임성 강하고 얼굴이 희고 눈썹이 가느다란 공수 4단의 청년이며, 결코 빨치산 두목인 이승엽의 부하이며 남조선 빨치산 부사령관 남도부는 아니었다.

  작품「지리산」은 빨치산 소설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도 等身大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어떤 대목 가령 빨치산들의 생활모습 묘사에서 작가 이병주는 <이 태의 수기에서>라는 단서까지 삽입해 놓고 있다.(이태 씨의「남부군」이 출간되었을 때, 저널리즘에서 이런저런 시비가 이태·이병주 두 분 사이에서 오고 갔으나, 이병주가 수기도용했다는 것은 이로 볼 때 일종의 조그만 오해가 아닐 것인가. 지병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씨의 수기를 이용 또는 인용한 것은 사실이나…사전에 승낙을 구했고 나 자신 이씨집이 있는 봉천동에가지 가서 승낙을 얻었다.' 동아일보, 1988. 8. 16). 그러나 만일「지리산」을 빨치산소설 범주에만 유폐시킨다면, 「남부군」이라든가「태백산맥」그리고「빨치산의 딸」등이 씌어진 이 마당에서 그것은 무슨 의미를 띠는 것일까.

 반공이 국시로 엄존하던 시절, 작가 이병주가「지리산」을 쓴 것은 용기이기에 앞서 일종의 운명이고 필연이 아니었을까. 그 때문에 나는 작품「지리산」을 빨치산 소설(무협지)범주에서 해방시켜 학병소설이라 규정한다. 그것은 곧 이병주의「반 자전적 소설」인 까닭이다. 이규라는 이물이 실상 작가 이병주 자신이었으리라. 「별이 차가운 밤이면」에서의 박달세가 바로 이규의 참모습인 까닭이다. 부호이자 괴짜인 허수아비 하영근이 만들어낸 허수아비격인 박태영과 이규가 실상은 학병세대의 내면풍경 속의 인물이엇던 것. 하영근으로 말해지는 사상적 분위기바로 그것이 학병세대적 멘탈리티가 하준규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준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작가 이병주를 보고「이게 어째 하준수일가보냐, 이 인물이 너지」(세대, 1974. 5. p.245)라고 말했음을 작가자신이 실토하고 있음은 인상적이라 할 것이다.

  2/3는 허구이고, 1/3만이 실록 자체라고 작가가「지리산」을 두고 거침없이 말할 정도로 이 작품은 학병세대만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탐구이다. 그것은 작가 이병주,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자질이자 역량이다. 그것이 우리 근대화의 재보가 아닐 수 없는데, 왜냐면 우리 근대사란 <나라찾기>에서 <나라만들기>의 과정에서 그들이 주역을 맡았던 까닭이다.

 

[7] 스페인 인민전선 - 회색의 사상

   학병세대,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근대성에 관련되는 과제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관부연락선」을 비롯, 최후작「별이……」에 이르기까지 그의 대표작은 한결같이 학교와 관련되었음이 이 사실을 증거하는 터이다. 일제강점기에 있어 한국인의 출세의 길또는 신분상승의 기회란 상급학교가기가 아니었던가. 가난하나 머리만 좋고 열심이면 바늘 구멍만한 출세의 길이 있었다.  관비로 되어 있는 사법학교도 있었고, 육군사관학교도 있었다. 고학도 할 수 있었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그 정결성을 보장받는 사회적 풍토가 만연한 시대, 이른바 大正시대의 교양주의 교육이 지배하던 시대, 젊은이가 나갈 수 있는 이 길에 들어선 자들이 바로 학병세대였다. 임화는 이 세대의 이념을 두고 이렇게 읊지 않았던가.

   비록 청춘의 즐거움과 희망을
   모두다 땅속 깊이 파묻는
   비통한 매장의 날일지라도
   한번 현해탄은 청년들의 눈앞에
   검은 상장을 내린 일은 없었다.
   [……]

    청년들아!
    그대들은 조약돌보다 가볍게
    현해찬의 큰 물결을 걷어찾다.
    [……]

    오오! 어느날,
    먼 먼 앞의 어느 날,
    우리들의 괴로운 생애와 숨은 이름이
    커다랗게 기록될 것을 나는 안다.
    [……]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폐허의 거칠고 큰 비석 위
    새벽별이 그대들의 이름을 비칠 때
    현해탄의 물결은
    우리들이 어려서
    고기떼를 쫓던 실내처럼
    그대들의 일생을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속삭이리라(시집「현해탄」, 동광당 서점, 1938. pp.222~224)

   학병세대를 두고, 현해탄의 사상에 관련지우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해탄 저쪽에 출세의 도구로서의 사상이 손짓하고 있었던 것. 그 사상이란 근대성을 내포하고 근대성을 끊임없이 묻고 있었던 것으로 요약된다.「지리산」에서 이규를 내료하고 있는 사상의 실체란 바로 스페인 인민전선이 아니었던가. 그 때문에 나는「지리산」속에서 작가 이병주가 내세운 다음 대목을  사랑한다. 이병주의 시인 까닭이다.

  어디서 죽고 싶으냐고 물으면 카타로니아서 죽고 싶다고 말할밖에 없다.

 어느 때 죽고 깊으냐고 물으면 별들만이 노래하고 지상엔 모든 음향이 일제히 정지했을 때라고 대답할밖에 없다.

유언이 없느냐고 물으면 나의 무덤에 꽃을 심지 말라고 부탁할밖에 없다(제6권, p.39)

   이를 두고 스페인 내란 때 죽은 시인 로르카(Garcia Lorca)의 시라고 할 필요가 없다. 작가 이병주의 창작시라 보아야 될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학병세대, 그 내면의 순수성이란 무엇인가. 자유주의 지식인이 그것. 이상주의에 불타는 서구 자유주의 지식인의 방향성이란 무엇이었겠는가. 스페인의 인민전선(Pront Populaire)의 이념이 가장 잘 말해 주는 것이 아닐가. 작가 이병주는 이를 두고<회색의 사상>이라 불렀다. 자유주위 지식이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 묻고 스스로 그는 <회색군상>이라 불렀던 것.

   우리가 15~16세 때 스페인 내란이 일어났다가 종식되었는데 당시 앙드레 지드, 토마스 만 등 세계적 작가들은 그 내란에 대해 뭔가 행동을 했으며 [……] 그리고 그것이 이리에게 온 느낌은 세계의 사조에는 좌우익의 흐름이 있구나, 그중에서도 죄익에는 여러 각도의 흐름이 내재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은 스페인의 인민전선 구성을 보고 느끼게 된거죠. 그래서 그 영향으로 우리에게 기존했던 가치 체계에 뭔가 여러 갈래의 방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우리 세대의 내부의식 속에 가치관의 혼란이 오게 되는 문제가 생겨났습니다.(세대 1974. 5. p.240)

    가치체계의 내부혼란, 그것이 학병세대의 내면풍경의 중심부이다. 그서은「흑백논리」와 정면대결된다. 희색의 논리인 까닭이다. 지리산에서의 죽음은 흑백논리의 소산이라 할 수 없을까라고 작가 이병주가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지리산」의 대작을 썼지 않았을까.「회색의 사상으 가진 사람이 어던 행위를 하여 그 결과가 처참한 것이 되거나 또는 보람된 결과가 되거나 하는 측며을 구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여 나는 그것을<지리산>을 통해 꼭 표현하여야 되겠다」(위 책, p.242)라고 그가 단호히 말한 것이 그 증거일 터이다.

   그렇다면 이 회색의 사상이란, 달리는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인민전선에서 체득한 학병세대의 사상이 아니었겠는가. 또 그것은 자유주의 지식의 고유한 사상적 존립방식이라 할 수 없을까.
  지리산 기슭 하동에서 태어나, 진주중학을 다니며 밤낮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면서 세게로 향한 야망을 키우던 한 소년이 있었다. 이 이병주 소녀이 드디어 이규가 되어, 박태영이 되어, 한준규가 되어, 그리고 박달세가 되어 현해탄을 건넜고, 마침내 학병으로 그꿈이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체득한 인민전선에의 사상의 씨앗은 항시 자라 흑백논리가 가져오는 온갖 죽음의 질곡과 맞서고자 하였다.

   그는 지리산을 바라보면서, 지리산을 두고, <회생이 되라> <회색이 되라>라고 쉴새없이 외쳤던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소설「지리산」이 이루어졌다. 나는 그가 지리산 청왕봉에 등산복 차람으로 올라 있는 모습을 어느 날 TV에서 보았다. 베낭을 메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혹시 헬리콥터로 오르지 않았겠느냐고 내 멋대로 생각하였다.

   만나면 물어보리라 다짐하면서, 경제학의 원서로 가득 채워진 그의 서재를 구경하는 일도, 헬리콥터에 관한 질문도 이제 영영 불가능 하게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창조해낸 가장 소중한 것을 나의 것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소설「지리산」이 그것이다.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