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 說

遲刻作家의 다섯 가지 기둥
- 李 炳 注 의 文學 -

 

李  炯  基       

 

   李炳注는 1921년생이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의 하나이자 데뷔작인 [소설·알렉산드리아]는 1965년에 발표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40이 넘어서 문단에 첫선을 보인 것이다. 그의 이 40대의 등단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극히 예가 드문 지각 등단이다. 드문 것은 全無한 것과는 다르니까 찾아보면 몇 사람의 비슷한 케이스가 없지도 않겠지만 그 몇 사람의 예외자들 중에서도 이병주의 경우는 특이하다.

  왜냐하면 그는 데뷔 하자마자 곧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소설·알렉산드리아]가 발표되었을 때 국내의 유력지들이 일제히 찬탄의 글을 실었던 사실은 그것을 웅변했다. 한편의 소살, 그나마도 처음으로 문단에 소개되는 미지의 신인의 작품이 그처럼 수많은 평론가들로부터 또 그처럼 열렬한 찬사를 받은 것은 그야 말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의 이례적인 지각 데뷔는 동시에 가장 화려한 데뷔이기도 했다.

   가장 화려한 데뷔라 했지만 이런 경우엔 작가에게 부담이 크다. 데뷔작의 성가(聲價)에 상응하는 후속타를 연거푸 치지 못하면 거기에 따르는 실망이 이번에는 데뷔 당시의 화려함을 거꾸로 뒤집어 놓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려한 데뷔는 실상 그 때문에 도리어 뒷탈이 나기 쉬운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병주의 경우는 아무런 뒷탈도 생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데뷔작 이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여타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한결같이 뜨거운 박수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는 한국 문단에서 가장 많이 쓰고 도 가장 많이 팔리는 작가로 되어 있다. 40여년 동안 축적된 힘이 마치 영화<자이안트>에 있어서의 유전의 분출처럼 끊임없이 세차게 솟아나고 있다 할까.

   이병주의 소설에는 대충 다섯가지 쯤으로 손꼽아 볼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첫째는 그가 소설의 기본 조건인<이야기>의 재미를 만끽케 해준다는 점이다.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 또는 흔미진진한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그의 작품에는 가득 차 있다. 純文學 작가의 소설은 대체로 재미가 없고 따분하다는 것이 일반적 통설이다.

   순문학 소설이 광범위한 독자층을 갖지 못하는 까닭,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수의 문학청년들만을 상대하는 듯이 보이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 귀착되는 현상이라 하겠다. 재미가 없다해서 독자들이 외면하는 소설은 필경 고립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소설의 고립화 경향이 날로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소설이 그만큼 저질화했거나 시시해진 탓이라한다면 속단이다. 독자의 수의 多寡와 작품의 문학적 가치는 혼동해선 안될 별개의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독자가 소설에서 얻고자하는 것도 반드시 이야기의 재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점을 십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야기는 E·M·포스터가 말한 것 처럼 그것 없이는 소설이 성립되지 않는 소설의 기본 조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뜻에서 독자의 외면으로 초래된 현대소설의 고립은 자세한 이유는 어떻게 되었든 일차 반성의 대상이 된다고 보아야 할 일이다.

  이병주는 현대소설이 직면한 이러한 고립의 벽을 깨뜨리고 우리에게 풍성한 이야기의 재미를 제공해 준다. 그래서 한번 그의 작품을 펴든 독자는 그것을 끝까지 다 읽지 않고는 도저히 책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이야기의 재미라면 그것은 아무래도 단편이 아닌 장편의 것이지만 이병주의 경우는 그 단편도 웬만한 장편 못지 않게 재미가 있다. [예낭 風物誌]와 [魔術師]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처럼 풍성한 이야기의 재미는 자칫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손상하는 오인이 되기 쉽다. 대중소설의 경우에서 우리는 그 치명적인 예를 본다. 그러나 이병주는 이러한 함정을 극복하고 있다. 그리하여 재미는 재미대로 멋보게 하면서 또 작품의 문학적 가치는 그것대로 흠없이 살려 나간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만일 그의 소설이 제공하는 재미가 문학적 가치를 훼손한 대가라면 그때는 그 재미 자체도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로 지적해야 할 그의 특성은 강렬한 사상성에 있다. 각기 農談의 차이는 있지만 데뷔작[小說·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하여[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칸나·X·타나토스],[예낭 風物誌], [질부채]등은 그의 사상성을 엿보기에 족한 작품들이다. 그의 사상은 모든 가치와 질서에 우선하는 존재로서 아니 그 가지와 질서의 근간이 되는 존재로서 인간을 내세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존엄성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리버럴리스트이 절규와 그러한 사상 땨문에 박해를 받는 고독한 지식의 모습을 그린다.

   이러한 그의 후매니즘은 이념 이전의 이념, 이념을 초월한 이념이다. 어떠한 논리, 어떠한 제도도 그것은 인간을 구곳하거나 제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사상이 그의 작품 도처에서 깊이 스며 있다. 그렇다고 그가 인간을 반드시 위대하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허약한 존재, 그리고 필경은 죽음에 이르는 可滅의, 아니 必滅의 존재라고 그는 보고 있다. <나 마음은 돌이 아니다>에 있어서의 노정필의 생애나<예낭 풍물지>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따한 사정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인간의 하망함 내지 애처로룸 같은 것을 절감하게 된다. 죽은 친구를 회상하는<中浪橋>와 정년 퇴직자의 비애를 다룬<미스山>도 그런 각도에서의 접근이 가능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병주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그 인간을 모든 가치와 질서에 우선시킨다. 이러한 사상이 현실에 부딧힐 때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권력과의 마찰이다. 왜야하면 권력은 인간을 상대로 행사되는 支配의 力學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권력의 집약적 형태로서 정치가 존재한다. 따라서 작가 이병주의 휴머니즘은 언제나 정치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소설의 상당수가 정치 사상적 에세이를 방불케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뚜렷이 정치를 의식하는 이러한 사상성은 여태까지의 우리나라 소설에는 너무나 부족되는 용소의 하나였다. 극 소수의 작가들이 작품에 사상의 도입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대체로 그 사상에 제대로 살을 붙이지 못하고 앙상한 뼈대만 노출시켰을 뿐이다. 바구어 말하면 사상의 문학적 형상화에 실패했던 것이다.

   20년대의 사상성을 중시했던 카프-파 작가들이 「얻은 것은 이데오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고 自嘆한 것도 그러한 실패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비단 카프 파 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수 많은 작가들이 같은 한탄을 되풀이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 가운데서 이병주는 강렬한 사상성을 작품에 도입하고도 그 예술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자칫하면 相衝하기 쉬운 사상성과 예술성의 조화는 그가 재미있게 푤치는 그 이야기 속에 사상이 충분히 용해된 결과라 하겠다.

   셋째로 그의 소설은 한국의 다른 어떠한 작가도 그와는 어깨를 겨룰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지식의 축적위에 서 있다. 웬만한 책은 모조리 한번 훑어본 사람이 아니고는 이런 글을 도저히 쓸수 없다는 느낌을 주는 그러한 소설이 그에게는 많은 것이다.

   백과사전적인「박람강기(博覽强記)」, 그 해박한 知的 섭렵의 경과는 그의 소설에서 마치 밤하늘의 그 무수한 성좌들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성좌들의 반짝임은 그것이 소설 속의 문장이란 의식을 떠나서 그 자체로만 있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어던 분야의 문제를 질문해 보더라도 이병주는 아마 그나름의 일가견을 피력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유식을 뽑내는 평론가라도 그 앞에서는 고개를 들기 어렵다. 이것은 문학적인 지식만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다.  이미 학문화되어 잇는 분야는 물론 이작 학문화되지 못한 또는 학문이 될래야 될 수 없는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지식까지 그는 끊임없이 긁어들인다. 그는 가장 탐욕스런 지적 호기심을 가진 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 광범한 실력의 수확을 그는 작품 도처에 훝뿌려 놓는다. 그래서 일부의 비평가들은 이 지나친 유식이 그의 문학에 있어서는 도리어 흠이 된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리고 문학은 그 가치, 그 성패가 작가의 지식량에 비레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이 작가의 무지나 무식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더욱 분명하다.

   또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가 아닌가. 아니 이것저것 다 젖혀두자. 어폐 있는 말이 될는지 모르지만 소살이 소설로서 읽히지 않고 머리속에 작으나마 하나의 도서관을 가진 박학다식한 독서인의 에세이는 읽혀서 그 나름의 매력을 발휘한다면 그 또한 작가의 영광일 것이다.

   이병주의 네 번째 특성은 체험의 폭이 아주 넓다는 데 있다. 우선 직업만 하더라도 그는 중고교 교사, 대학교수, 신문사 편집국장, 주필, 사럽가 등을 다 겪었다. 그리고 직업은 아니지만 여기에 보탤 수 잇는 경력으로는 일본 유학, 학병, 중국 대륙에 있어서의 일본군 졸병 생활, 국회의원 입후보, 정치범으로 몰린 2년 7개월의 감옥살이 등이 있다. 이밖에 그는 말술을 사양치 않은 주객이며 또 술과는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여자에 대해서도 그야말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호방한 인물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을 사귀는 범위가 넓다는 점에서도 그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위로는 정계 재계의 거물 요인으로부터 아래로는 뒷골목 건달이나 작부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그는 사귀고 있는 것이다. 체험은 과연 폭넓은 것이 되지 않을수 없다. 한번 책을 펴들면 끝까지는 그것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그의 소설의 그 진진한 이야기이 재미도 이러한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아런 폭넓은 체험만이 우수한 문학을 낳는 것은 아니다. 체험은 남달리 풍부하건만 문학은 남보다 훨씬 뒤진다는 작가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재능이 동일한 수준이라면 체험의 질량은 작품의 성패에 정비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이병주는 체험도 풍부하고 재능도 풍부하다. 그 체험이 그 재능을 살렸고, 그 재능이 또한 그 체험을 살린 작가 인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예의 유식함에 기인하는 그의 지적 딜레탕티즘에 인간적 체취와 현실적 구체성을 부여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박과 사전적인「박람강기」로서 만물박사와 같은 지식을 자랑하는 그의 문학이 공소한 관념으로 떨어지지 않고 생생한 리얼리티를 발휘하게 되는 것도 이체험의 소치인 것이다.

   다섯 번째로 그는 우리나라 소설의 문장 전통에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작가하고 할 수 있다. 일률적인 재단은 물론 위험한 일이지만 대체로 한국 소설의 문장은 조촐하고 깔끔하고 담백한 것, 따라서 동양화처럼 생략적인 것을 그 주류로 삼고 있다. 하고 싶은 암을 다하는 것이 나이라 두세 마디로 나머지 여덟마디나 일곱 마디를 암시적으로 짐작케 하는, 그러니까 餘白의 美學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문장 전통이다.

   김동인(金東仁) 현진건(玄鎭健) 상허(尙虛)를 거쳐 황순원(黃順元)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문장 전통은 한국 소설의 예술적 조탁(彫琢)에 큰 공을 세웠지만 동시에 그것을 단편에만 한정시켰다는 잘못도 있다. 편의상 나는 이것을 채식민족의 문장 전통이라고 이름지어 본다. 그것은 지방질을 배척하고 그 대신 고담성과 서정성을 존중하는 문장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병주의 문장은 이러한 전통을 깨뜨리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문장은 종래 우리나라 소설에서 거의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다양하고 또 지성적이다. 방대한 독서량이 뒷받침하는 해박한 인용과 에스프가 번득이는 어포리즘, 그리고 정력적인 입심이 그것을 호화롭게 수놓고 있는 그의 문장은 그래서 또 풍성한 볼륨을 갖는다. 한마디로 그것은 동양화가 아니라 농도짙은 서양 유화를 연상케 하는 육식민족의 문장이다. 문장이 이만한 볼륨을 갖기 때문에 소설의 내용……그 사상이나 이야기도 역시 그만한 볼륨을 갖는 것이 아니가 하는 느낌까지 든다.

   평론가 백철(白鐵)은 이병주의 어떤 소설에 나오는  신문 사설을 두고 <대학의 신문학과 학생들이 교과서로 삼아야 할 문장>이라고 극찬한 일이있다. 이러한 문장의 특성을 보면 이병주의 소설에 중편이나 장편이 많다는 사실도 우연한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왜야하면 그의 볼륨있는 문장은 아무래도 예쁘게 다듬어지기 마련인 짤막한 단편보다는 이것저것 함게 뒤섞여 있는 부피 큰 장편에 어울리는 것이 때문이다.

   이병주와 같이 강렬한 사상성과 풍성한 이야기와 그리고 해박한 지식을 담자면 문장이란 이름의 그릇도 큰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큰 그릇에 많은 내용을 담은 소설, 그것은 장편이다. 그러니까 문장을 통해 본 이병주의 문학적 체질은 단편보다도 장편에 알맞는 것이라 하겠다.

   이직도 단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우리의 실정에선 본격적인 장편문학의 전개를 선도할 기수로서 그의 이름을 꼽자면 곱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상불 그는 최근에 와서 장편 연재물을 가장 많이 쓰는 작가가 되었고, 그 집필량도 한달에 일천장을 넘는 우리 문학사에 있어선 최고의 기록을 보이고 있다. 그점 그는 이미 장편문학의 선도자로서 자리를 굳혔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