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란의 여명 

 

 

미디어영상학과 3학년

학번 200626-343311

이 진 원

 

<피난>

 

  올여름 참외와 수박이 너무 잘 되어 여름철 인심이 좋을 것 같다는 아버지의 정겨운 표정이 참 좋다. 벼농사도 풍년이라 시국만 조용하면 태평천국이라 하신다.
  여름방학은 아직 멀었다. 군대가 학교운동장에 그제한 차, 어제 두 차, 오늘 네 차 주둔하더니만, 교실을 군부대 숙소로 사용하게 된다면서 방학이 앞당겨 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병들이 후송되어오면서 교실을 넘친다. 나중에는 노천운동장에 환자를 눕히더니 하동중학교 교정과 광평 송림까지 천막을 치고 환자를 나른다.

  갑오년 동학혁명군이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송림에 모여 있다가 모두 불쌍하게 죽었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모두가 피난을 떠난다고 야단법석이다. 부모님은 읍내를 비우고 참외밭 원두막에서 피난을 하셨다. 막내누나와 형과 나는 다섯째 누님부부를 따라 고전 잔내 산골에 있는 외딴 친척집으로 피난을 하였다.

  부모님은 강둑아래 있는 참외밭 원두막 밑에 깊은 땅굴을 파고 그곳에서 읍내를 드나들며 집과 논밭을 관리하였다. 인민군이 오거나 폭격이 시작되면 이곳에 숨어 피난을 하셨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고전에 살고 있는 사촌들은 우리를 돌본다는 핑계로 폭격이 그치지 않은 화염을 뚫고 하동 ‘너뱅이’ 참외밭으로 와서 부모님이 정성을 다해 마련해준 참외와 수박, 그리고 많은 양식을 힘겹게 짊어지고 도둑골재를 넘어 돌아온다. 그들은 그것을 우리에게 돈을 받고 팔아먹는다. 돈이 떨어지자 전란에 외상은 없단다. 먹고 싶으면 직접 집에 다녀오란다.

 

  전쟁 와중에서도 포탄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들의 욕심이 생명의 존귀함을 모르는 미련함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많은 가족이 굶어야 한다. 포탄에 맞아죽으나 굶어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절망에서 나온 극기라고 했다. 우리에겐 미련스럽고 얄미운 그들의 행동이 자기 가족을 위한 처절하고 아름다운 노력이라고 본 것은 그들을 용서한 뒤의 생각이다.

 

  형과 나는 배고픔을 더 참지 못하고 사촌의 말대로 하동에 다녀오기로 하였다. 늦은 오후다. 게잿재를 넘어 내려가는 길목 앞 하동읍 하저구 너뱅이 들 계곡언저리에서 인민군과 국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기관총과 대포소리가 교대로 들리며 끊이지를 않았다. 우리는 도저히 그 전장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 형과 나는 숲속에 숨어 전쟁놀이를 구경하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우리의 앞뒤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라 오갈 수도 없게 되어 전투가 멈출 저녁까지 기다렸다 되돌아가기로 하였다.

 

  장난감 같은 작은 짚 차 한 대가 하동읍 쪽으로 빠른 속력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국군의 짚 차 같다. 들어 갈 때는 엄호 기관총 소리가 계속하여 난다. 한참 있다가 다시 빠져 나오곤 하였다. 부상자를 결사적으로 실어 나르는 용감한 장면이다. 짚 차가 빠져 나올 때마다 인민군의 포탄이 차 앞 뒤쪽에서 터진다. 멈칫 섰다가 또 달려 나오고, 뒤에서 터지면 차가 훌쩍 뛰었다가 또 달아난다. 참으로 용감한 불사신 같다.

 

  세 번인가 네 번짼가 불사신 같은 용감한 짚 차가 국군진영에 다 와서 엉덩이에 바로 맞아 자욱한 연기 속에 불사신의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형님과 나는 서로 처다 보며 약속이나 한 듯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성아 짚 차가 그만 맞았재?”

“응, 그만 맞았다”

 형님과 나는 두 주먹으로 눈물을 훔친다. 산허리가 검은 연기로 뒤덮인 채  해마저 진 뒤라 어둡다. 화약 냄새가 풍기는 계곡을 따라 피난처로 힘없이 돌아온다. 피난처의 이웃동리 아저씨가 우리를 조용히 부른다.

“어이 학생들, 이리 좀 오게!”

“아저씨!”

“음 너희들이 구나”

“이 전쟁터에 너들이 왼 일이냐?”

“하동 갈라고……”

“큰일 날라고!”

“하동 못 간다!”

“최후 발악 전쟁이다”

“국군이 전부 쫓겨 가고……”

“어서 집에 가자!”

“아저씨는 여기서 뭐합니꺼?”

“응, 먹을기나 있는가 찾아보러 왔는데……”

“참, 니 중학생이재?”

“와 예?”

“니 영어 할 줄 알 재?”

“모립니다.” 

“영어사전 볼 줄은 알 재?”

“예-”

“그럼 됐다”

“어서 집에 가서 너의 형과 의논하자”

  아저씨는 주위를 살펴보더니 지게의 한쪽 멜 방을 어깨에 걸친 채 걸음을 재촉하여 피난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든 가족을 불러놓고 비밀 상의를 하였다. 미군 한사람을 집 뒤 안 땅굴에 숨겨 살려 보내자고 한 것이다.

 

  원자탄이 터질 때 전 가족이 함께 피 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은폐하여 만들어 둔 깊은 땅굴 은신처다. 그를 위해 사용하기로 하고, 우리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저씨는 형님과 나를 데리고 화염이 쌓인 그 계곡으로 다시 올라갔다.

 

  으슥한 계곡의 큰 오동나무 밑 바위틈 속에서 희미하게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저씨가 손전등을 형님얼굴에 비추며 학생이라고 말하라고 이른다. 우리의 말소리를 들고 위험을 느낀 미군은 바위 틈 속에서 철컥하며 권총에 실탄을 장전한다. 아저씨는 불안하여 조급하게 속삭이듯 말한다. 마치 게릴라작전 같은 위기의 순간이다. 

 

“빨리 후라시를 니 얼굴에 비추고 학생이라고 해!” 속삭이듯 조른다.

형님이 어물거리며 더듬는다. 손전등을 턱 밑에서 비추니 형님얼굴이 머리를 깍은 몽달귀신처럼 보인다. 높고 큰 코가 더 크게 보여 진짜 귀신같다.

“아이 앰 마 스튜 어 덴 트” 하고 느리게 더듬거린다.

“아이 앰어 스튜덴트!” 조금 빨라진다.

아무런 응답이 없다.

“아임, 스튜던트”

 

  형님이 다급하여 더 빨리 말하는 것 같다. 그래도 아무런 응답이 없다.

  아저씨가 미군의 발언저리에 손전등을 비추어 본다. 미군이 손짓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 되었다고 하면서 나더러 지게를 가져오게 한다. 아저씨는 미군을 부축하여 지게에 앉히고,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꺾어 미군을 나뭇짐처럼 덮었다. 내려오면서도 형님은 뒤에 처져 망을 보고, 나는 초병처럼 맨 앞에서 전등을 들고 신호를 하였다.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와 굴속에 그를 감추어 주었다.

 

   아저씨는 권총을 가진 것으로 보아 장교라고 하였다. 미군은 포탄 파편에 한쪽 엉덩이와 허벅지살점이 떨어져 나가 하얀 뼈가 보였다. 많은 피를 흘린 것 같다. 옷을 찢어 스스로 지혈을 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가 우리를 만난 것이다.

 

  황토굴속은 밤낮 없이 어둡고 습하다. 그리고 냉기가 몸을 식혀 한 여름인데도 선선하다.

형님은 얄팍한 한영단어집의 단어를 지적하면서 미군장교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통역이다.

  막걸리를 설명하고 먹이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매년 6·25만 되면 지금의 내가 그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어김없이 생각난다. 나는 아직도 그 미군장교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우정>

 

  비밀을 지킨다고 노력을 했는데도 보름이 채 되기도 전에, 하동읍내 치안대원이 지수까지 수색을 왔다갔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다행이 우리가 있는 곳은 외딴 숲속이라 일족형님을 모르는 분은 고전사람이라고 해도 우리가 있는 집을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가족회의를 열고 모두의 안전을 위해 미군을 돌려보내자고 하였다. 그 미군이 혼자 걸을 수 있으니 빠져나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때 미군이 지도를 땅에 그리면서 ‘메이산’ ‘메이산’ 하는 소리와 바다를 지적하는 것을 보았다. 마산과 바다를 지적한 것을 알고 노량 가는 길을 가르쳐 주며 바닷길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미군장교가 하얀 무명한복으로 갈아입고 밀짚모자를 쓴 채 간간이 절룩이며, 집 앞 논두렁길을 조심조심 걸어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자를 벗어 위로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한다. 감사하다는 작별의 인사다. 말 짓은 참으로 아름답고 정직함이 눈에 보인다. 슬픔과 기쁨이 이렇게 분명할 수가 있는가.

 우리에게 이 논두렁길은 마냥 행복만 오가는 길이었다. 그에게는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그 미군장교가 떠날 때 그가 차고 있는 야광시계를 벗어 형님손목에 채워주었다. 미군이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온 나를 보고 줄 것이 없자, 몸을 뒤지다 그의 군번줄에 끼어있던 군번만 떼어 주머니에 넣고 사진과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송두리째 나의 목에 걸어주면서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내가 군대생활을 하면서 항상 자랑하던 이 목걸이를 잃어버렸다.  

 

  형님이 얻은 야광시계는 다섯째 자형이 기를 쓰고 빼앗아 갔다. 물론 이분은 내가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에 어려운 친정을 돌보는 누님이 싫다면서 강제 이혼을 하였다. 청년시절에 데릴사위처럼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추악한 배신을 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소년인민군과 노부부>
 

  9월에 들자 무더운 열기가 식어가듯 전쟁의 소용돌이도 잠잠해 지는 듯하다. 그러나‘색색이’‘호주비행기’'이승만 처갓집 비행기’라는 이름을 가진<세이브>전투기의 폭격은 갈수록 기세를 더했다. 어떤 때는 민간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바람에 희생당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처음엔 우군의 비행기라고 반겨주던 우리들도 양 날개 끝에 럭비공 같은 혹을 붙인 ‘색색이’로 여겼다. 누구에게나 절대적 공포의 대상이었다. 군인이건 민간이건 길이나 들이나 산을 갈 때도 이 괴물이 나타나면 무조건 엎드려 지형지물에 몸을 숨겨 피해야만 살아 날 수 있었다.

 요즈음 공개되는 미국의 한국전쟁기록에 미국공군의 한국인 무차별 폭격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보니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어느 날. 아버지와 내가 강둑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색색이’ 두 대가 소리 없이 나지막하게 우리 앞을 지나갔다. 나는 빨리 피하자고 하였는데 아버지는 저들이 우리를 민간으로 알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셨다. 그러나 곧 되돌아온 그 ‘색색이’는 아버지와 나를 행하여 기총소사를 하였다. 우리 발 한치 앞에 두 줄로 탄 적을 내면서 총알이 박히고 뒤따라 뜨거운 큰 탄피가 떨어지자 아버지와 나는 혼비백산하여 원두막 땅굴로 다음 비행기가 오기 전에 숨었던 일이 있다. 그 후부터 아버지는 미국을 믿지 말라 하더니 참 걱정이라 하셨다.


  전쟁이 다소 평온해 지자 형님과 나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두 누님과 자형을 떠나 밤중을 이용하여 아버지와 어머님 곁으로 돌아와 버렸다. 비쩍 마르게 살이 빠진 우리를 보고 어머님은 아무리 전쟁이라도 애들을 이렇게 굶길 수 없다면서 화를 내셨다.

  비행기가 무섭다고 하시며 땅굴 밑에서 불을 가리고 흰쌀밥을 지어서 달콤한 김치를 두툼하게 찢어 담고 구수한 된장국까지 끓여주신 어머니의 밥상은 우리에겐 꿈속에 그리던 천국의 음식이었다.


  형님과 나는 시합이라도 하듯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모습을 정신 잃고 보시던 어머님. 뺏을 사람이 없으니 천천히 먹으라 하신다. 나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다. 그 많은 되 밥을 다 먹고 수박을 두 개나 먹었는데도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내일 아침은 안 해도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사흘 먹을 밥을 한 끼에 다 먹었으니 애들을 살리려거든 더 먹이지 말라고 하셨다.


  아침이 되었다. 형님과 나는 눈을 뜰 수도 일어 날 수도 없이 통대구처럼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 몸보다 큰 도롱뇽을 삼킨 실뱀처럼 형과 나는 맹꽁이처럼 부풀어 오른 배가 꺼져 내려갈 때까지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까지 누어 뒹굴었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는 우리를 곁에 두고 보시니 안심이 된다 하시면 서도, 인민군들이 부역을 핑계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고 있으니, 그들에게 우리가 들켜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하셨다. 


  9월 중순 무렵이다. 한 인민군이 둑 위에서 따발총을 들고 나타나 총 한발을 하늘을 향에 쏜다. 미처 숨지 못한 아버지가 밭에서 일을 하는 척하신다. 그가 아버지를 강둑 위로 불러올린다. 아버지는 미적미적 시간을 끌며 올라오지를 않자 또 총을 한방 더 쏘면서 빨리 올라오라 명령한다. 어머니와 우리는 원두막 땅굴에 숨어서 말소리를 듣는다. 손에 땀이 난다.

“노인 동무!”

“왜 그러시오”

“강변대밭에 숨겨둔 소가 노인동무 소지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고 천천히 둑 위로 태연히 걸어가신다.

“노인 동무! 소를 왜 숨겨두었소!”

“왜 내가 숨기요! 그놈이 대밭으로 들어 간 게지”

숨어서 듣고 있던 어머니는 애를 태우시며 아버지의 답답한 대답을 걱정하신다.

“우리 소가 아니라고 하면 될 걸.” 하고 안타까워하신다.

“니들 아버지는 너무 정직해서 탈이다”

인민군이 황소가 있는 대밭으로 함께 가서 소의 고삐가 풀려있는지 묶여 있는지 함께 가보자고 큰 소리로 말한다.

“노인동무의 말이 거짓말이면 이건 반동이요! 알갔소?”

“또 숨긴들 무슨 반동이요?”

아버지가 겁도 없이 천연스럽게 대꾸를 하시는 모습이 못마땅했던지 따발총을 아버지 가슴에 들이대며 더 큰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동무는 소를 숨겨두었다가 국방군에게 바치려 한 것 아니오?!”

“그러면 당신이 먼저 몰고 가시오!” 하고 더 큰소리다.

“강변 대밭으로 같이 갑시다.”


 인민군은 아버지의 등을 총열로 떠밀며 앞세워 강가로 내려간다. 어머니는 잘못하다가 아버지가 소를 몰고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강둑 길 아래 밭을 가로질러 대밭으로 먼저 가보려고 애를 써도 미치지 못하였다. 아버지와 인민군이 대밭에 와 보니 천운인지 다행인지 황소의 고삐가 진짜 풀린 채 대밭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고 있었다.


 인민군은 아버지의 침착한 행동에 미안했던지 부드러운 말로 이 소를 몰고 함께 가지고 하였다. 그때 막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어머니는 군인동무라 부르며 차분하게 그를 설득한다.

“이 소는 사실상 우리 소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소란 말이오!”

“불쌍한 이웃 어린아이의 솝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소 주인집이 폭격을 당하여 그 부모와 할머니가 모두 죽고, 어린 아이만 살았는데 그 어린 아이도 한쪽 팔다리가 상하여 병원으로 데리고 가면서 살아  남은 이 소를 밭에 혼자 계신 노인에게 맡겨 놓고 간 것 이오.”

“왜 진작 남의 소라고 말하지 않았소?”

“내가 보살펴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하고 그때서야 아버지가 변명한다.  어머니의 거짓말이 걱정되어서다.

“어찌 하겠소 노인동무가 소를 몰고 수고를 좀 해 주시오”

  어머니의 설득이 무시당하자 성정이 계신 어머님이 슬그머니 화가 치민 다. 다잡듯이 앞을 가로막고 대어들기 시작한다.

  “보소 인민군동무, 소도 없고 이 노인도 없으면 어린아이가 돌아오면 맡긴 소를 훔쳐 도망간 늙은이가 될 판이니, 당신이 혼자 몰고 가던지, 우리 두 늙은이를 여기서 쏘아 죽이고 가시오!”


  어머니는 큰소리로 인민군을 윽박지른다. 인민을 위해 충성한다는 인민군이 인민을 죽이는 군인인가 어디 좀 보자고 하시며 대어들었다. 보통이 넘는 할머니의 살기에 질린 인민군이 뒤로 물러서려는 초조한 모습을 눈치 챈 어머니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영감! 돌아갑시다. 총을 쏘아 죽이던지 소를 몰고 가든지, 어서 갑시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앞세우고 뒤에 일부러 천천히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불쌍한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시늉을 하셨다.

“보시오! 노인동무 거기 서시오, 안서면 쏘겠소!”

  바람결에 들려오는 인민군의 힘없는 정지명령소리를 들은 어머님은 그 순진해 보였던 어린 인민군이 등 뒤로 총을 쏠 것 같지는 않았다. 인민군은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할 수 없이 직접 소를 몰고 대밭을 나가는 모습을 먼 곳에서 바라보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유엔군의 폭격기와 전투기가 번갈아 가며 계속하던 공습이 여명이 가까워서야 공습이 멎었다. 아무리 간이 큰 사람도 기가 질릴 정도로 무서운 공습이었다. 들도 산도 시내도 온통 쑥밭이 되어 버렸다. 고향의 아름다운 풍광은 그 때에 다 부서지고 아름답던 섬진교도 세 토막으로 잘려 버렸고 섬호정도 강변의 정자도 모두 부서졌다.

 

 

 <동란의 여명>

 

 그날 저녁 형님과 내가 물도랑에서 잡아온 피리 붕어를 손보시는 아버지에게 인민군이 몰고 간 소가 누구의 소인지 물어 보았다.

“그 소가 우리 솝니까?”

“니들 큰 자형소다”    

“그 소가 어디 있다가 나왔습니까?”

 

  아버지는 무책임한 큰 자형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두서너 달 전에 비리 먹어 금방 죽을 것 같은 소 한 마리를 질질 끌고 와서 ‘이놈이 남해로 갈려면 며칠쉬어야 할 것’이라며 구례, 남원을 다녀와서 몰고 가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맡겨두었다.

 

 전쟁난다는 소문에 너의 자형은 남해로 바로 가버렸다. 흙 간에서 금방 죽어 가는 놈을 술과 약초를 먹여 두 이래를 치료하여 가까스로 기운을 차리게 한 뒤에 어두운 밤에 조용히 몰고 나와 낮에는 대밭에 숨겨 소의 기를 살리고 밤에는 원두막 아랫바닥에 짚단을 깔아 따뜻이 잠을 재웠다. 우리는 그 황소 배 밑에 땅굴을 파고 숨어살았다.

 

 니들 큰 자형이 구례로 가면서 병든 그 소가 이틀을 넘기지 못할 것을 알고 갔단다. 내가 살려내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보다 더 유명한 소의 명의라 하면서 그 소를 나에게 선물로 넘겨주었다. 아버지는 하필 병든 소를 선물하여 큰 고초를 겪게 했다고 하시며, 어떤 경우든 부모를 시험하는 자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오늘 그 소를 살리려고 나름대로 정성을 들였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괜스레 우리의 눈도 뜨거워졌다. 그 황소가 참으로 우리와 운명을 같이한 귀한 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이다. 아버지가 밖에서 어머니와 우리를 부르시며 어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귀에 익은 황소의 울음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우리가 잠든 후에 그 황소가 코뚜레만 단 채 원두막을 제집처럼 찾아와 잠을 잔 것이다. 그렇게 무서운 공습 속에서도 살아 도망쳐 돌아온 우리 황소가 이처럼 햇빛이 아름답고 신기한 아침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버지가 조용하게 탄식하신다. 동란의 여명이라!

  이젠 공습도 없고, 국군도 인민군도 보이지 않는다. 구월이 노 오란 바람소리를 내며 가을을 부끄러운 듯 슬며시 밀어내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