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용회 장가계(張家界) 北京 旅行記

 

김상옥

 

  어어~이 이번에 몇 명이나 간다 하노!  하동에서는 누랑 누랑 가내?  부산 친구들은 몇이나 가내?

진주는?  기타 지구에서는?   그애는 꼭 가야된다이~  내도 전화할게  네도 또 전화 하래이~

꼭 같이 가자 해바래이~

  서력기원 2006년 1월달부터 여행을 떠나는 2006년 5월 9일까지 집행 실무자 끼리는 수 백번의 전화 통화가 오고 갔으리라!

  2005년 10월 14일~15일 부산에서 섬용회 전국총회를 할 때 내년에는 경치가 좋다는 중국의 장가계를 거쳐 북경에서 전국 섬용회 총회를 한번 해보자고 제안했던 김 광석회우가 안을 낸 이후부터 世界的으로 흩어져 사는 우리 섬용회 전 친구들에게 파악된 주소대로 편지를 117통 보냈는데 반송된 편지는 16통 뿐이였다.

  적은 모임도 아니지만 실없는 인연으로 맺어진 친구들도 아니었다.

  두고 쓰는 文字대로 백사청송(白砂靑松) 펼쳐진 아름다운 고장 하동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을 모두 모아 섬용회라 이름한 男女間 동기들 모임이 龍의해에 태어난 용띠들이라 지어진 이름이 蟾龍會다.

 

  서넛 사람들이 뜻을 모아 해외를 같은 날에 간다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100여명을 뜻을 모아 해외로 간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간다고 대답했던 분이 그런저런 사정으로 못간다 했다가, 못 간다 하였던 사람들이 갈 수 있다고 넣어달라하며 또 뒤바뀌고 숱한 사연을 남기고 최종적으로 65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여행사와 약정을 맺었다.

  成人 65명의 여행일을 잡고 확답을 받는데는 그런 저런 후일담이 많았다.

  더더욱 미국에서 동참 하겠다는 서 대식 친구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참여 하겠다는  이 정재 회우의 연락이 왔을때는 얼마나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 하였던지......기특한 일이 라고 치부해 두고자 하였다.


   중국으로 떠나는 2006년 5월 9일 화요일 5박 6일 간의 일정은 시작되고 인천 국제공항 B와 C앞 대기소에는 그렇고 그런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이 다른 이용객들의 귀를 따갑게 하였다.  어어이~ 반갑다,  온제왔노? 잘있었나..... 짜식 오랜만이다!

  10시에 모이기로 한 약속시간에 30분이나 늦게 온 친구도 있어서 집행부의 마음을 졸이게한 미운(?) 친구도 있었지만...... 12시 10분발 CA140 중국 항공기에는 한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탑승을 OK 받았다. 1시 20분 움직이기 시작한 비행기는 1시 40분에 이륙을 하였다


  창공을 날으는 비행기 속에서 오랜만에 동행하는 옛 동창들과 바쁜 世上事 잊고 주고받는 얘기속에 2시간 45분 거리인 항주에 도착하여 여행사의 안내를 받으며 첫 목적지인 육화탑으로 관광을 갔었다.

육화탑은 작년에 중국 황산을 서울 섬용회에서 단체로 갔던 곳이라 처음 간 몇분 들만 기념 사진을 찍고 항주의 특식이라는 거지닭과 동파육으로 망강루 춘정에서 석식을 하였다.

  거지닭과 동파육은 中國의 유명한 詩人 소동파가 지은 이름으로 어느날 이곳을 지나던 소동파는 구미를 끄는 음식냄새가 나는 곳으로 발길을 옮겨보니 다리아래서 거지들이 모여 앉아 닭요리를 하여 먹는데, 하도 맛있는 냄새와 얻어 먹어본 닭의 요리맛이 이하고 그 맛이 좋아 그 요리법으로 만들어 먹는 닭요리가 거지닭으로 이름 지어졌다 하며, 동파육은 돼지고기지만 소동파가 즐겨 먹었다 하여 그 요리법으로 만든 비법이 특이하여 지금까지 이곳의 특식으로 남아 내려오고 있다한다.

 

 항주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장사 공항에 내린 시간은 현지시간 밤 11시 5분이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려고 밖을 나오니 삼성, LG, 두원, 현대 등 우리나라 여러 기업체들의 광고가 걸려있어 우리의 국력이 해외로 뻗어나는 것에 일행모두가 반가워서 한마디씩 하더라!

그날밤 숙소인 장가계 국제호텔(대주점)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 40분, 중국에 도착한 첫날밤을 이 호텔에서 여독을 풀기로 하였다.


[제 2 일] 5월 10일 水요일

  아침 여섯시에 울리는 morning call 전화는 수화기를 드는 사람마다 알아 듣지 못하는 중국말에 눈이 둥그레 졌다고 한다. 대학을 나온 친구가 수 십 명 이지만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이 진원 뿐이니 그럴 수 밖에......

人生不到 張家界(인생부도 장가계) 百歲豈能 稱老翁(백세기능 칭노옹)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장가계를 선전하는 글귀가 여기저기 걸려있는 元家界를 먼저 가기로 하고 8시 식사를하고 8시 40분에 버스에 올랐다.

 

  원가계 입구 십리화랑(十里畵廊) 코끼리 열차 승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8시 40분, 계곡을 오르는 차창밖에 비치는 기기묘묘한 암석의 형상들을 무어라고 표현할까? 십리화랑 계곡은 관광 열차를 타고 가는 종점까지 계곡에 펼쳐진 풍경들이 병풍(屛風)에 그림을 그려 10리 길가에 세워 놓은 것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다.

  종점에 도착하여 기념 사진들을 찍는 뒤쪽에 세자매봉(姉妹峰) 이라는 높은 돌산이 있는데 그 모습이 세 자매가 다정히 앉아 있는것 같았다. 그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조각상(彫刻像)에다 붙여진 이름 같아 이 곳을 들른 관광객 90%는 세 자매봉을 뒷배경으로 기념자신을 찍고 간단다.

 

  10시 30분 : 天子山삭도(케이블카)를 타고 삭계욕 자연보호구를 급경사지게 올라가는데 그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경치에 아찔아찔하고 가슴조이게 하는 이유는 행여나 정전이 되거나 줄이 끊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관광을 하는것 같았다. 무려 그 케이블카의 궤도선 길이가 왕복 7.45km나 된단다.

  山頂에 올라서 돌아보는 이 경관을 무릉원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장가계란 지역은 약 4억전에는 바다였으나 지구의 지각 운동으로 육지로 솟아올라 오랫동안 침수와 자연 붕괴등을 겪으며 현재와 같은 깊은 협곡과 기이한 봉우리 물 맑은 계곡 등의 자연 절경을 만들어 내었다한다.

 

  이곳은 옛 양자강 유역의 원시적인 소박한 자연 경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면서 태산의 웅장함과, 계림의 수려함과, 황산의 기이함, 화산의 험악함을 겸하여 가지고 있다한다. 張家界는 기봉 괴석이 많고 수목이 울창하며 자연 풍경과 원시적 운치로 세계 자연 유산으로 2000년 12월에 유네스코 문화 유산에 등재 되어 있다고도 한다.

  그 경관으로는 하늘의 선녀가 꽃을안고 헌화를 하는 형상을 한 선녀화(仙女花) 어필봉(御筆峰) 이라는 수십척 높이의 바위 봉우리는 황제가 글을 쓰다 세워놓은 붓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왼편은 큰 붓 한 자루 형상, 가운데는 작은 붓 네개가 합쳐진 모양이고, 오른편은 큰 붓 두개를 모아둔것 같은 형상인데, 날카롭고 앙증맞은 봉우리마다 그 꼭대기에 뿌리박고 자라는 소나무의 생명력은 보는이 마다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수분이 없이는 못 자라는 소나무가 수십길 바위 꼭대기에서 때때로 내리는 빗물로 저렇게 높은 바위 끝에서 수백 수천년을 저것만큼 자랐구나, 궁금하고 기이로움을 누구에게 물어 볼까나?

차를 타고 산길을 계속 오르니 河龍公園이 나온다. 중국 10대 원수중의 한명이라는 그의 이름을 따서 그의 승전지에다 말고삐를 잡고 방향을 돌리는 형상의 동상을 만들어 두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마다 기념촬영을 하는 것도 그들의 상술 같았다. 天子山 정상 식당에서는 한국 관광객을 위한 한식 뷔페가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니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오는 것을 알수가 있다.

 

  점심을 먹고 12시 30분에 버스를 타고 산복 도로를 따라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내려가 무릉원을 내려다 보는 天下第一橋 入口에 내렸다. 산삼과 장뇌삼, 목이버섯, 석이버섯, 불로초, 영지, 고산지대에서 나는 온갖 특산물을 파는 가게들이 입구에 줄을 지어 팔고 있는데 그들은 80%가 한국말을 할줄 아는것같다.

  아줌마~ 아저씨~ 싸게준다,  이리와봐~ 얼마~ 얼마~ 줄래 라는 욕반 부름반 소리를 귀 뒤로 남기고 산과 산을 바위들이 다리로 연결 324개의 다리가 있다는 천하제일교 길을 찾는다. 협곡을 자연적으로 연결된 다리를 건너면 눈 밑 그 경치는 장가계  아니면 이세상 어디에도 없을것 같았다.


  관광에 편리하도록 보도벽돌로 길을 만들어 두어 걷기에는 편리 하였지만 곳곳에 내려다 보이는 바위들의 형상과 수백길 낭떨어지 바위들이 외줄로 서서 넘어지지 않고 그 위용을 자랑하는 저 장엄한 모습들을 내려다 보는 곳곳마다, 내가 바람에 날려 떨어질까 무서움에 소름이 끼치고, 떼어 놓는 발길마다 볼거리라 감탄사를 연발하니 이곳을 이름하여 와~ 와아~ 와~ 아아 관광지라 하였던가? 갈수록 와~아~라는 감탄이 입에서 절로 나온다.

  내려다 보면 혼을 빼어다 놓는 迷魂臺의 雲河 저 흐르는 구름속 깊은 바위틈에서 선녀가 아니면, 독수리 한 마리라도 날아와서 나를 끌고가지 않을까(?)하는 착각에 빠지는 관광코스다. 여기를 오르면 이 자연의 경이로움에 혼을 잃는다는 미혼대란다.

 

  저 일직선으로 늘어선 바위의 높이가 300m에서 최고봉은 1,343m나 된다고 하니 적은 돌맹이 하나가 떨어져도 밑에까지 닿을때 그 충격은 얼마나 크게될까? 솟아 오른 바위틈과 꼭대기 마다 살아 자라는 수목들은 수분의 공급을 어떻게 받고 사는지......아름다운 분재들을 보는것 같았다. 이 곳을 우리나라 옛 시조시인 황진이가 와보았더라면

  천자산 높은 바위 홀로 섰는 저 남귀야

  누가 뿌린 씨를 받아 네 생명이 되었느냐?

  험한길 건널수 없어 독야 청청 하였는데

  너랑 나랑 같은 신세 홀몸으로 사는구나.......

  너도 홀몸 나도 홀몸 同苦同樂 하여보세.

 

  같은 詩 한수가 나올법도 하여 보인다.

  天下第一橋 관광을 하고 돌아오는 하산 코스에 세계에서 일직선 엘리베이터로는 제일 길다는 백룡(白龍) 엘리베이터가 깍아 지른 절벽에 붙어 우리를 실어 내린다. 그 높이가 328m 라고 하는데 중국의 기술로는 어려워 독일 사람들이 설치를 하였다는데 수직으로 떨어지면서 눈앞에 보이는 경치를 감상하는 맛도 잊을수 없는 관광이였다.  타고 내려와 올려다 본 경치 또한 장관이었다. 숙소로 오는길에 태평양 진주공장에 들러서 1억 2천만원을 호가하는 진주를 눈으로 사서 가슴에 담고 저녁 식사후 발 맛사지를 받으니 하루의 피로가 가시는 것 같았다.


[제 3 일] 5月 11日 木요일

  6시 모닝콜 6시 30분 식사후 황석채(黃石寨)를 가는 우리 관광 버스의 차창에는 빗물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오늘의 관광은 빗속에서 하겠구나! 비가 내리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오늘 관광을기대해 본다. 한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황석채 관광지 입구에는 비가 내리는데도 많은 관광객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케이블카 승강장 대기실에는 황석채의 지명 유래가 쓰여있다.

  옛 西漢시대 황석공이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神仙이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近世 장쩌민(江澤民)주석이 황석채를 와보고 썼다는 글이 그의 사진과 같이 붙어있다. 

   (不到絶景 黃石寨 勿易不論 張家界)

 

  황석채를 와보지 않고는 장가계를 구경하였다 하지 말라는 글이였다.

  비가 내려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밑을 내려다보니 깍아 지른 바위들이 부딪힐듯 부딪힐듯 수십차례 마음을 조이게하고 구름속으로 아래 내려다 보이는 경관은 무어라 형언하기 조차 쉽지 않은 절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황석채 정상 육기각에 오르니 낮 10시 이건만 빗줄기는 굵어지고 사방은 구름에 덮혀

한치 앞을 보기가 쉽지 않다. 강택민은 구름속에 와보고 그런 글을 남기지 않았으련만......육기각이란 신의 손이 여섯 개 방향으로 뻗어 있다는 의미로 여섯 개의 각이 세워진 돌각 정상에다 지은 정자인데 지금은 관광 상품의 매장으로 쓰고 있었다.

 

  작년에도 여길 와보았다는 최 진환 회우의 말을 들으니 황석채 정상의 전망대는 모두 돌위에 마련되어 있는데 앉는데 마다 神仙臺요 보이는곳 마다 天下라 지옥같이 깊게 내려다 보이는 골짜기는 자기가 神仙이 된것 같은 착각을 하고 간다는 곳이란다. 구름에 덮힌 황석채를 뒤로하고 내려오면서 본 하산(下山)경치 또한 장엄하여 잊을수가 없다.

  대기중인 버스에 내려와 원가계 입구에 모인 시간은 12시 20분경 금편(金鞭)계곡을 따라 걸어가는 길과 버스를타고 내려가는 두갈래 길에서 7.6km 계곡을 따라 걸어가자는 팀과 점심 시간에 늦으니 버스로 내려가자는 팀으로 나뉜다.

 

  의견을 묻는 중에 金 光石 회원은 구경을 왔으니 하고 가야지 라면서 앞장서 달려 내려간다.  그뒤를 30여명이 따른다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리는데 다시 올 기회가 쉬울것 같지 않아서 여길 세 번을 와 보았다는 최 진환 회원의 권유를 받고 같이 금편계곡을 따라 걸어 보았다. 金鞭계곡을 내려오는 끝까지 높이 높이 솟아오른 바위와 숲속을 따라 차갑고 맑은 물이 목청껏 창(唱)을 하며 계곡을 흐르고 20~30명 정도는 앉아 놀수 있는 크고 넓은 바위들이 계곡을 따라 수십 군데가 있었다.

 

  우리가 어릴적에 보았던 수정석처럼 6각 8각형의 바위들이 일직선을 하고 200m 300m 위로 치솟고 있는 밑으로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이 20리 길을 흐르고 있으니 돌과 물과 숲과 내가 있었으니 그중에 눈에 보지못한 神仙도 우리와 같이 동행 하였으리라 믿어진다.


  두시경 원가계 입구에서 만난 우리 일행은 발해관 이라는 큰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금편계곡을 가지 못한 팀에게 가본것이 좋았다고 모두가 한결같이 자랑을 하니 못가본 회원은 부러워 했다.

모두가 다 금편 계곡을 따라 구경을 가보고 싶었겠지만 건강상 20리길을 걸을수 없어서 같이 못간것이 한으로 남을 것이다. 여행도 역시 건강할 때 다녀야 된다는 것을 한번 더 깨달은 것이다.

 

  점심을 먹은후 비가 계속 내리는데도 황용동굴 관광을 하기로 했다. 東洋에서 제일 길고 세계에서 두 번째라는 동굴의 규모나 내부가 궁금하여 카메라에 필름을 한통 더 넣고 구경길에 들어섰다. 주차장에서 동굴 입구까지는 500m 거리인데 걸어가는 길거리를 예전 보다 더 길도록 만들었다 한다.  

  그 이유는 걸어가는 길가에다 관광상품 매점을 만들어 물건을 더 팔기위한 수단에 있단다. 거의 모든 상품을 천원 천원 하는 식으로 우리나라 돈을 안받는 곳이 없었다. 돌로된 조각품과 수공예품들을 파는데 어떤 상품은 원가도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황룡동굴은 1983년에 발견된 곳으로 지각운동으로 생성되어 있는 석회암 동굴 이라는데 동굴을 들어서자 마자 눈을 뜬 사람이면 와~와~하는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동굴내에는 13개의 홀과 폭포가 3군데, 지하 하류가 두군데로 분포되어 있다하는데 수천 수만가지의 형상을 가진 석순과 종류석 바위틈으로 형형색색의 조명을 장식하여 오르락 내리락 관광코스를 만들어둔 중국인의 상술이며 기기묘묘한 동굴내부의 종류석과 형주, 운합 석순은 설명으로선 부족하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 一見) 이라는 말이 이번관광에 딱 맞는것 같다.

 

  동굴관광 마지막에 배를 타고 동굴을 빠져 나오도록 한것도 인력이 많은 중국에서는 관광수입을 올리는데 얼마나 머리를 쓴 계획관광 이던가? 동굴 관광을 끝내고 평양 한방이라는 북한에서 직영하는 한약방에 들려서 우황청심환 우궁환을 하나씩 건강을 위하여 사온것도 북한이 우리를 속여도 약까지 속여 팔까? 

  우리 장군님도 쓰시는 약이야요! 라고 선전하며 파는 여성들의 해맑은 얼굴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오후 7시 30분 장가계와 원가계 관광을 끝내고 장사 시내에서 뚱뚱이 한식이라는 우스깡 스러운 우리글 간판을 달아둔 집에서 한식 저녁을 먹고 10시 15분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장사 공항에서 북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 4 일] 5월 12일 金요일

  북경시내에 있는 대방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명13능 관광을 떠난다. 북경 시내에서 약 50km 거리인데 도착하니 10시 30분 한시간이 더 걸렸다. 명의(明나라) 제 3대 황제인 성조(成祖) 영락제부터 마지막 황제인 의정 숭정제까지 13명의 황제와 그 황후들의 능묘로 현재까지 공개된것은 定陵, 長陵, 소능(昭陵) 등 세 곳 뿐이라는데 우리는 定陵을 가보았다. 수백년이 넘뵈는 향나무들이 파수꾼인양 줄을 서있는 능내에는 역사적인 유물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었다.


  관광을 위하여 파놓은 묘속에 놓여진 돌계단은 지하 63m 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죽어서도 살아있는것 같은 왕의 대접을 받기위해 생시에 쓰던 모든 물건들을 들여다 놓았다한다. 왕인 자기가 살아있을 때 부터 무덤을 파고 준비를 하였으니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제 3관문에 있는 돌문은 그 큰돌을 무슨 수단으로 그당시에 그렇게 옮겨다 땅속에다 설치를 하였을까?  궁금증만 쌓여가는 관광이다.

 반달같이 이루어진 산세를 따라 13명 황제의 무덤을 만들어 두었는데 그들은 수백년을 두고 무덤 하나 하나를 공개하면서 관광객을 불러 들일 것이다. 진시황 능인줄 알면서도 내부를 공개하지 않고 외부만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지금 방법 그대로.........

 

  능을 돌아보고 도화원(지금도 복숭아 철에는 이마을에선 맛좋은 복숭아가 많이 난다함)이라는 간판이 붙은 집에 들어가보니 식당을 들고 나면서 국가가 직영하는 잡화상점을 거쳐서 식당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식당은 3,000여명이 한꺼번에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인데 한국 관광객이 반이 넘어 보인다. 식당규모 또한 대국답다고 느꼈다. 음식도 우리나라에서 먹을수 있는 먹거리들 그대로 있는것 같았다.

  식사후에는 이곳에 들려 모두 모두 기념품 하나씩을 사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관광에는 꼭 쇼핑이 뒤따르는 것.

 

 어느덧 2시 40분, 지상 최대의 건축물이라는 그 유명한 만리장성에 올라가 보았다. 만리장성은 동쪽 호북성의 상해관에서 서쪽 감숙성의 자위관까지 6,350km 중국의 거리단위인 里수로 만리가 넘는다하여 만리장성이라 하는데 우리나라 서울 부산이 천리길인데 그 열배가 넘는 거리를 그것도 산 꼭대기까지 저런 돌들과 벽돌을 만들어 사람의 손으로만 규격있게 싸놓은 것에 놀랍기도 하지만,  그 후손들은 관광거리로 만들어 세계 각처 사람들이 관광을 오도록 하였으니 조상을 잘 둔 덕을 그 후손들이 관광수입을 톡톡히 보고 살도록 하였다. 毛澤東 主席이 관광지 入口에다 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남자가 20세에 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았다면 대장부라 부르지 마라) 뜻의 글이 쓰여있었다.  (男兒二十未登城 豈稱老翁 大丈夫)

 

  萬里長城을 돌아보고 내려와 모이니 오후 4시가 되었다. 다음은 인공으로 담수호를 만들었다는 용경협으로 발길을 돌린다. 용경협에 도착하니 4시 40분 밖에 되지 않았는데 깊은 산속의 기온은 12.3도로 느껴진다. 빵차라는 봉고형 소형차가 한차에 5,6명씩 태워서 용경협 입구까지 별도 요금을 내고 우리들을 실어 나른다. 산계곡을 150m 높이로 막아 만들었다는 입구에 다달으니 모두가 추워서 옷깃을 여미는데 일행중 한사람이 한국돈 1,000원을 내고 6.25전쟁때 보았던 중공군 복장과 같은 외투를 빌려입고는“어어이 내모습 어떻내? 하고 너스레를 떤다.

 

  보기에 따뜻해 보이고 옷을 입은 모습이 하도 우수꽝 스러워서 너도 나도 빌려입고 서로보고 웃으면서 옛 중공군 패잔병부대 같으니 모여서 단체 기념 사진을 찍자고 하여 모두 모여 찍었는데 그 필름은 누가 갖고 있는지 연락해 주길 바란다. 용의 형상을 만든 조형물 속으로 들어가니 에스컬레이터가 호수 입구까지 비스듬히 올라가도록 설치되어 있었다.

  용경협 山水의 경치는 계림이나, 장가계의 보봉호, 우루무치 天山天池, 호수를 버금가는 경치임을 배를 타고 한바퀴 돌면서 느끼고 감탄을 하였다. 북경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일행 모두가 발 맛사지를 하였다. 남자는 여자 맛사지사가 하였고 여자는 남자 맛사지사를 주인이 알아서 배치를 해 주었건만 일행이 너무 많다보니 여자 맛사지사가 모자라 남자 맛사지사를 배정받은 K친구의 불평을 모두가 웃으면서 받아 들이고, 조선족 맛사지사가 있음을 모르고 우리말로 진한 농담을 하였던 李모 친구의 농담을 조선족 아가씨가 큰소리내어 중국말로 통역을 하였으니 온 방안이 웃음 바다가 되었다.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함께 함은 오고가는 차중에서 또는 관광지에서 일어났던 실수담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추억으로 남으므로 여행은 아는 분들과 같이가면 좋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제 5 일] 5월 13일 土요일

  오늘은 북경의 시내를 구경하는 일정이다. 풍으로 고생한 최 형우 의원을 치료해 주었다고 자랑하는 중국의 유명한 제약회사인 동인당 약방에 들렸다. 흰까운을 입고 손님을 진맥하는 약사(자칭 교수님)들의

진맥을 받으며 처방에 따른 약들을 구입하였다. 각자가 건강을 생각하는 나이들이라 여기서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이화원의 동정호를 먼저 들려 보았다. 여걸 서태후(西太后가 산책을 할때 햇빛을 막고 정원을 거닐고 호수를 구경하기 위해 지은 회랑의 길이가 왕복 10리길, 중전 뜰에는 온갖 기화 요초하며 백송을 심어놓고 망원대라는 돌담을 쌓아 떠오르는 달을 보고 지어놓은 詩도 많았다한다.

  돌아오니 12시가 되어 북경 한복판에 한글로 용아리라는 간판이 붙은집에 들려 푸짐한 갈비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우리 동포들이 세계 어느곳에 가더라도 자리잡고 우리글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는것을 볼때 우리나라의 국력이 많이 커져나간다고 생각되어 흐뭇해짐은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오후에는 자금성(紫禁城) 관광을 갔었다. 明왕조와 淸왕조때 왕궁으로 쓰던곳이며 1420년에 준공되어 1911년 마지막 황제 푸이가 퇴위 할때까지 24명의 황제가 약 500여년에 걸쳐 봉건 통치의 중심으로 둘러 쌓여 있었던 곳인데 우리나라 경복궁과 건물배치가 비슷하지만 규모면에서는 열배도 넘을것 같다.  이래서 옛날에는 중국을 대국이라고 하였던가?......

 

  왕궁으로서는 현존하는 세계 최대급의 규모라 하는데 보수 중인곳이 많았다. 걸어서 천안문(天安門) 광장으로 가보았다. 베이징시 중심에 있으며 천안문과 궁전의 중심에 있는 광장으로 약 40만㎡로 이루어진

넓은 과장바닥은 대리석으로 되어있고 50만~100만명도 모일수있는 광장이라고 하는데 明, 淸시대에는 황제의 즉위식이나 과거시험을 치르던 황제들의 전용 장소였으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처음 개방된후 일반에게 공개 되었으며 문화 혁명때 이 광장에서는 가는 탱크 앞에서 중국의 깃발을 흔들고 서서 버티던 젊은이의 기개가 TV로 수십차례 세계 각국으로 보여준 화면이 우리눈에 서려 있는 곳이다.

 

  현재는 광장 주위로 중국 통치의 본산인 여러 행정 사법 입법 기관들이 동서 남북으로 배치되어 건립 되어있고 모택동 광장 이라고도 불리워지고 있으며 그의 큰사진이 천안문에 지금도 걸려 있었다.

오후에는 서커스 극장에서 오랜만에 진짜 중국인들이 펼치는 서커스를 구경하고 天方大河 프라자 호텔에서 2006년도 섬용회 전국총회를 개최하였다. 소박한 회의실에 우리 회원들이 모여서 서울에서 준비해간 플랭카드며, 태극기며, 식순이며, 그 식순에 애국가 까지 넣어서 섬용회 창립후 첫 번째 해외 총회를 멋있게 치루고저 하였던 대한민국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섬진강변에 태어난 미꾸라지들의 꿈이 용으로 승천도 못해보고 치루었던 섬용회 총회는 저리고 쓰린 가슴을 아름답게 생각 해야만 될 추억으로 남기고 2006년도 전국 섬용회의 밤 행사는 짧은 식순에 따라 끝을 맺고 2006년 5월 14일 일요일 오후 6시 30분 CA125편 중국 민항기에 몸을 싣고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길러준 조국 대한민국에 돌아와 기억에 남는 여행기를 적어 회원 여러분에게 남기고져 합니다.

 

*후 기 : 여행비를 보조해주신 김 광석 회우님

          관광 여정을 영상으로 만들어 주신 이 홍충 회우님

          중국의 특산품을 선물로 주신 조 동구 회우님

          미국에서 동참하여 주신 서 대식 회우님

          남아 공화국에서 일부러 나와주신 이 정재 회우님

          각지에서 참여해 주신 회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 여행 일정표의 시간기록과 참고자료를 준 강 채형, 최 진환 회우에게도 감사드립니다.


             2006년  9월  어느날

      섬용회 서울 회장 김 상 옥